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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0:40:32

스티브 월시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
파일:스티브 월시_lcfc.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스티브 월시
Steve Walsh
본명 스티븐 월시
Steven Walsh
출생 1964년 11월 3일 ([age(1964-11-03)]세)
영국 잉글랜드 랭커셔프레스턴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91cm
직업 축구 선수 (센터백, 스트라이커[1] /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위건 애슬레틱 FC (1982~1986)
레스터 시티 FC (1986~2000)
노리치 시티 FC (2000~2001)[2]
탬워스 FC (2001~2002)
코번트리 시티 FC (2002)
탬워스 FC (2002~2003)

1. 개요2. 클럽 경력3. 은퇴 이후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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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레스터 시티에서 14년간 뛴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이다.

2. 클럽 경력

2.1. 위건 애슬레틱 FC

랭커셔프레스턴에서 태어난 월시는 동네 축구팀을 운영하시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축구선수가 되었다. 유소년 축구팀에서 두각을 보이자 당시 위건의 선수 겸 감독이었던 래리 로이드가 위건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할 것을 제안하였다. 2주 후, 맨시티와의 경기에서 등번호 5번을 달고 데뷔전을 가진 후 위건에서 거진 150경기[3]를 뛰면서 1984-85 시즌, 프레이트 로버 트로피를 들기도 하였다.

그러다 1985-86 시즌 종료 후 위건의 감독이었던 브라이언 해밀턴이 레스터 시티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해밀턴이 그와 함께 했던 월시 영입을 요청했고 2부리그였던 위건 대신 더 높은 무대에서 뛰길 원했던 월시 역시 이를 승낙했다.

2.2. 레스터 시티 FC

파일:월시의 초창기_lcfc.jpg
Captain Fantastic

결국 1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당시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소속의 레스터 시티로 이적했다.

월시는 루턴 타운과의 경기에서 데뷔하였다. 하지만 해당 시즌 레스터는 리그 20위를 기록하며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영입했던 브라이언 해밀턴 감독과도 이별하게 되었다. 다음 시즌인 1987-88 시즌에 월시는 슈루즈베리와 경기에서 상대 공격수 데이비드 게디스의 턱을 부러뜨리는 심각한 반칙으로 11경기 출장 정지를 받았다. 그런데도 뛰어난 활약으로 레스터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1991-92 시즌, 브라이언 리틀 감독이 새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리틀은 스티브 월시의 스트라이커로의 포지션 변경[4]을 중심으로 리빌딩을 시작하였다. 불과 한 시즌 전만 하더라도 겨우 강등을 피했던[5] 레스터는 91-92 시즌과 92-93 시즌 각각 9골과 16골을 뽑아냈던 월시의 활약으로 두 시즌 연속 승격 플레이오프에 향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1991-92 시즌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전, 블랙번과의 경기에서는 상대 공격수 데이비드 스피디에게 논란의 여지가 있는 페널티킥을 주었다. 결국 이 페널티킥 실점으로 레스터는 패배하며 1부 승격은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92-93 시즌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전, 스윈던 타운과의 경기에서 1:3[6] 지고 있던 68분, 2:3 만회하는 헤더골을 성공시켰다. 이후 1분도 안되 스티브 톰슨이 동점골을 뽑아내며 극적인 동점을 만들어...낸 줄 알았으나 정규시간이 얼마 안 남은 시간 상대 공격수와 월시의 접촉을 페널티킥으로 선언하는 아쉬운 판정으로 페널티킥 실점을 내주었고[7] 극적인 경기는 비극으로 마무리됬다.

안타깝게도 93-94 시즌, 월시는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며 시즌의 반 이상을 날리고 말았다. 해당 시즌 레스터 시티는 트란메어를 꺾으며 3시즌 연속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에 올랐고 결승 상대는 운명의 장난인지 라이벌 팀, 더비 카운티가 되었다.
파일:walsh_derby.jpg
2전3기, 이번에는 웸블리에서 웃다.

Twice the Webley loser. Now the Wembley Champion.
두 번의 웸블리에서의 패배. 하지만 이제는 챔피언입니다.
경기 종료 후 코멘터리

그리고 결승전, 이번에도 레스터는 선제 실점을 허용하며 이후에도 상대 골키퍼 마틴 테일러의 미친 선방들로 또 다시 결승의 문턱에서 패하며 승격에 실패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41분, 게리 코스워즈의 크로스를 더비의 골키퍼인 테일러가 잡으려 한 순간 헤더로 슛을 날렸고 더비의 수비수 폴 윌리엄스가 걷어내지 못하며 동점골을 기록하였다.[8] 이에 그치지 않고 정규시간 4분을 남긴 86분, 주장 사이먼 그레이슨이 올린 크로스를 이안 오몬드로이드가 헤더를 날렸지만 테일러의 선방으로 막힌 공을 기여코 밀어넣으며 역전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대로 경기가 종료되며 3번의 도전끝에 레스터는 라이벌을 꺾고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였고 월시는 이전 두 번의 설움을 딛고 레스터의 영웅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94-95 시즌, 프리미어 리그에 올라왔음에도 막상 월시 본인은 무릎 부상 때문에 5경기 출전에 그쳤다. 거기에 시즌 중, 승격의 1등 공신이었던 브라이언 리틀 감독까지 빌라로 떠나버렸다. 결국 레스터는 1시즌만에 강등을 당하며 월시의 개편 후 첫 프리미어 리그 생활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파일:steve_walsh_1996.jpg
주장으로써 웸블리에서 첫 트로피를 들어올리다.
다시 돌아온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에서 레스터는 리그 선두를 달리며 승격이 유력해보였다. 그러나 감독 마크 맥기울버햄튼으로 감독직을 떠나버리며[9] 팀은 승격 플레이오프권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결승전인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경기에서 감독 마틴 오닐이 월시에게 주장 완장을 달아줬고 경기는 스티브 클라리지의 결승골로 승리하며 1시즌만에 프리미어 리그로 복귀했다.
파일:steve_walsh_1997.jpg
이번엔 리그컵 우승을 이끌다.
프리미어 리그로 돌아온 96-97 시즌 강등 후보로 예상된 것과 달리 레스터는 9위라는 호성적을 남겼으며 월시는 22경기를 뛰었다. 나이도 어느덧 30줄을 넘어섰고 십자인대 부상도 있던 점을 감안하면 많이 뛰어준 편. 그리고 미들즈브러와의 코카콜라컵 결승 재경기에서[10] 프리킥을 머리로 받아 올렸고 스티브 클라리지가 발리로 꽃아 넣으며 우승하였다. 이러한 활약으로 결승전 MOM을 석권하였다.


[11]
97-98 프리미어 리그 4R, 필버트 스트리트에서 펼쳐진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데니스 베르캄프에게 멀티골을 내주고 84분에 에밀 헤스키가 만회골을 넣은 후였던 90분, 하프라인에서 올린 볼을 헤더로 맷 엘리엇에게 깔끔히 떨어뜨려줬고 앨리엇이 중거리로 골을 성공시키며 2:2 기적적인 동점을 이루는 어시스트를 하고 극적인 동점으로 끝...나는듯 했으나 몆 분만에 베르캄프에게 그 유명한 해트트릭을 허용하며 3:2로 역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경기 종료가 얼마남지 않은 시점, 게리 파커의 코너킥을 받아 월시가 헤더를 하고 뜬 볼을 스펜스 프라이어가 다시 머리로 월시 쪽으로 붙였고 월시가 그대로 골문에 꽃아넣으며 3:3, 극적인 재동점에 성공했다. 현재까지도 레스터 팬들에게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경기로 꼽히며 특히나 이 시즌 아스날은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차지한 팀이기에 더욱 빛나는 골이 되었다.

파일:UEFA_fantastic_walsh.jpg
코카콜라컵 우승 팀 자격으로 출전했던 97-98 UEFA 컵 1차예선 1차전, 에스타디오 비센테 칼데론에서 열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 전 선수들을 이끌고 나갈 준비를 하는 월시의 모습. 은퇴 전까지 월시의 유일한 유럽대항전 출전 경기이다. 경기는 이안 마샬이 선제골을 넣었지만 주니뉴 파울리스타에게 동점골을, 논란이 있는 PK 판정으로 크리스티안 비에리에게 실점하여 2:1 패배했다. 해당 시즌 월시는 전체 28경기에 출전하여 앞서 언급한 아스날전을 포함해 3골 1도움을 기록했다.

다음 시즌인 98-99 시즌, 전체 22경기에 출전해 해당 시즌도 3골 1도움을 기록했다. 워딩턴컵 결승에 오르기도 했으나 토트넘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99-00 시즌, 확실히 나이가 나이인지라 경기 출장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주장직 역시 맷 엘리엇에게 넘겨줬으며 첼시와의 FA컵 16강전에서 경고누적으로 퇴장당하는 등 좋지 못했다. 하지만 워딩턴컵 8강 풀럼과의 경기에서 0:2 지던 중 85분에 만회골을 넣은 이안 마샬에 이어 2분만에 동점골을 넣기도 했다. 마치 2시즌전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터뜨린 동점골이 생각날 정도. 이후 1골씩 주고받고 승부차기에서 풀럼의 선수들 3명이 모두 실축하며 4강에 진출했다. 이후 4강전에서 빌라까지 꺾고 결승전 트란메어와의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 했지만 맷 엘리엇의 두 골로 3년만에 웸블리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마틴 오닐 감독이 떠난 01-02 시즌, 새로 부임한 피터 테일러는 나이많은 월시를 플랜에서 제외시켰고 결국 450경기[12] 62골이라는 기록과 영광의 시간을 함께했던 레스터와의 동행은 아쉽게 마무리 되었다. 레스터에서의 마지막 경기는 01-02 시즌 프리미어 리그 1R 빌라전이 되었다. 당시 월시는 자신이 사랑하는 클럽에서 쫓껴났다는 사실에 큰 상실감과 충격을 느꼈고 이때쯤부터 월시의 선수 경력, 더 나아가 인생 자체가 급격히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2.3. 이후

울버햄튼으로의 임대 이적을 추진했지만 무산되었고 결국 2000년 1월, 풋볼 리그 챔피언십 소속의 노리치로의 이적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레스터에서의 방출로 인한 큰 충격으로 경기장이 아닌 술집이나 호텔에 들락거렸고 단 4경기 출전만 하였다. 29R QPR전 이후엔 기록도 없다. 그러다보니 트랜스퍼마크트는 알려지지 않은 팀으로 갔을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후 하부리그인 탬워스 FC에서 1년을 보낸 뒤 코번트리로 이적을 갔다. 하지만 이번엔 노리치때보다도 못한 시즌 2경기 출전에 그치며 3개월만에 탬워스로 돌아온 뒤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였다.

3. 은퇴 이후

은퇴 후 세금 문제로 살게된 스페인에 골프장을 차리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과 영국에 있는 집 모두를 잃었다.

레스터셔 주 및 러틀랜드 주의 신문인 레스터 머큐리에서 주간 칼럼을 쓰고 있다. 또한 레스터 타이거즈 출신의 닐 백과 이벤트 회사를 설립했다.
파일:월시투어.jpg
파일:월시방문.jpg
현재는 팀 동료였던 무지 이제트와 함께 어린이 축구 교실을 운영 중이며 레스터 시티 경기 하프타임쇼에 나오기도 한다.

4. 플레이 스타일

큰 키를 활용한 제공권 장악헤더 능력이 출중했다. 이 덕에 골뿐 아니라 어시스트도 머리로 한 경우가 많았으며 이를 활용해 공격수로 뛸때도 골을 잘 넣었다.

그리고 선수 자신이 레스터의 상징적인 인물인 만큼 리더십 역시 뛰어났다. 물론 다혈질 논란이 있긴하더라도 그만큼 팀에 활기를 불어넣는 선수이기도 하였다.

또한 수비수와 공격수, 멀티포지셔닝이 잘됬으며 클러치 능력도 상당해 중요한 순간에 골을 수많이 넣었다.

다만 이 모든걸 상쇄한 단점이 다혈질, 이로 인한 잦은 카드 수집이라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게디스의 턱을 부러뜨려 11경기 출장 정지를 당하기도 했으며 걸핏하면 퇴장당하여 승리를 놓치는 바람에 감독이 잘리기도 했다. 무려 13장의 레드카드를 받으며 풋볼 리그 역대 최다 퇴장 공동 1위라는 불명예를 가지고 있다.[13] 이때문에 좋은 실력을 가지고도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했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그래도 나이가 듦에 따라 차차 이런 모습이 줄어들긴했다.

또 피지컬이 상당했던만큼 스피드는 상당히 좋지 못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여담



[1] 브라이언 리틀 감독이 스트라이커로 기용했다.[2] 위키백과 기준, 트랜스퍼마크트는 이 사이 2001년 1월 1일에 새 팀으로 이적 갔다고 서술했다. 다만 그 팀이 어느 팀인지는 서술되어있지 않다.[3] 레스터 시티 공식, 위키백과는 126경기로 서술했다.[4] 사실은 수비수와 공격수 모두 소화했다.[5] 당시 순위였던 리그 20위면 강등이었으나 1990-91 시즌 개막 전에 강등팀을 한 팀 줄여 극적으로 살아남았다.[6] 먼저 3골을 내주며 0:3 패배하고 있었지만 57분, 월시의 제공권을 이용한 헤더가 골대에 맞고 나온 것을 줄리안 요아킴이 집어넣었다.[7] 이때 페널티킥 실점 이후 월시는 격분하여 그 볼을 잡으며 심판에게 욕설을 날렸다고 한다. 퇴장까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심판도 성깔을 알아서인지 경고도 받지 않았다. 사실 취소선을 그었지만 실제로도 퇴장이 하도 많아서 심판들이 경기만 하면 월시를 예의주시했다.[8] 다만 이는 테일러가 공을 잡으려는 순간 레스터의 이완 로버츠가 팔꿈치로 테일러의 얼굴을 치며 넘어뜨렸기에 파울이었다. 하지만 당시 주심인 로저 밀포드의 오심으로 골이 인정됬다.[9] 1년전 브라이언 리틀이 빌라로 감독직을 옮긴 모습과 데자뷰를 이룬다(...)[10] 당시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결승전은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1:1 무승부를 거뒀는데 규정상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하면 재경기를 하였다.[11] 월시의 골은 영상의 22분 47초 경부터.[12] 레스터 시티 역대 출장 수 6위[13] 다른 한 명은 로이 맥도노[14] 1991-92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전(1부리그가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이었던 때라 2부리그가 세컨드 디비전이었다), 1992-93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전, 1993-94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전, 1995-96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전, 1996-97 코카콜라컵 결승전, 1996-97 코카콜라컵 결승 재경기, 1998-99 워딩턴컵 결승전, 1999-2000 워딩턴컵 결승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