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마바라 성의 전경. 모형이나 그림이 아니라 실제 크기다.[1]
1. 개요
나가사키현 시마바라시에 위치한 성. 홈페이지2. 역사
기존 영주였던 아리마가의 아리마 나오즈미가 전봉[2]된 후 새로 영주로 들어온 마츠쿠라 가문의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축성을 지시하였다.1618년에 짓기 시작하여 1624년에 완공되었다. 기존의 히노에 성이 작다는 이유[3]였는데 지역 규모 및 생산력에 맞지 않는 거성을 지어 버렸다.
당시 시마바라 번의 고쿠다카는 4만 석이었는데 이조차도 현실적인 수확량보다 과하게 책정됐다고 한다. 그런데 시마바라 성의 규모와 징수 정도는 최소 10만 석(...). 안내 페이지에서조차 4만 석 다이묘에게는 과분했던 것 같다며 돌려까고 있다.[4]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33M 높이의 부흥 천수로, 일본의 현존하는 천수각 중 세 번째로 높다.[5] 동서 약 360m, 남북 약 1,260m의 부지 너비에 성벽은 약 3,900m였는데 도저히 변방 군소 영지의 성이라고 볼 수 없는 정도였다.[6]
2대 영주인 마츠쿠라 카츠이에에 이르러서는 영민을 가혹하게 착취, 고문[7]했는데 이는 기독교 탄압과 함께 시마바라의 난의 주 원인이 되었다. 시마바라의 난 당시에는 영주군의 주둔지였다. 이후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잘못된 통치로 반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에도 막부에 의해 가이에키당하고 에도로 끌려가 참수당했다.[8] 이후 메이지 유신 전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도쿠가와의 방계인 마츠다이라 가문에 통치를 맡겼다.
1874년의 폐성령으로 인해 철거되고 부지에는 학교와 논밭 등이 들어섰다가 1960년대부터 단계적으로 복원되었다. 대부분의 복원한 성이 그렇듯 과거와 비교하면 규모나 건물 수에서 꽤 차이가 많은 편이다. 다만 규모가 줄어들었어도 원본이 워낙 컸던 데다 시골이다 보니 실물은 압도적이라고 한다.
3. 관광
시마바라 철도선의 시마바라역을 통해 갈 수 있다. 역 밖으로 나오면 성이 바로 보이지만 입구는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좀 걸어가야 한다. 해자는 현재 나무, 풀, 이끼 등이 무성하게 자라있으며 일부 구간에는 물이 고여 있다. 성 주변에는 무가저택 거리와 수로가 형성되어 있어 같이 둘러보면 좋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천수각은 540엔의 입장료를 별도로 받는다.4. 기타
현재는 성 1층에 기독교, 카쿠레키리시탄의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나가사키현의 둘뿐인 일본 100명성이며 다른 하나는 히라도시의 히라도성이다. 그런데 100명성 중 대다수가 국가 사적, 하다못해 현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마바라성은 시 사적에 불과하며 히라도성은 그조차도 해당되지 않는다. 100명성 중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곳과 시 사적인 곳은 각각 6곳에 불과하다. 때문에 성의 규모, 역사적 중요도, 인지도 등을 고려하면 다소 의문인 부분이다.
[1] 시마바라시의 인구는 약 4만, 시마바라반도 내 다른 지자체들까지 합쳐도 지역 일대 인구가 약 12만 명에 불과한 시골이다. 이를 고려하면 성이 이상할 정도로 커 보이다 보니 실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술.[2] 쫒겨난 것이 아니라 본인 요청에 의한 것이다. 아버지인 아리마 하루노부가 키리시탄 및 서양 세력과 얽혀 처형된 이후 영지 대부분을 차지한 키리시탄 영민, 가신들에 대한 악감정이 크게 작용했다.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예수회 사료에 1613년 나오즈미가 세례명을 받은 자신의 두 이복동생들을 8세와 6세일 때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시마바라의 난에서는 토벌군으로 참전해 과거 자신의 영민과 가신이었던 반군들을 마음껏 썰고 다닌다(...).[3] 명목상 이유는 이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지역 장악을 위한 의도적인 거점 변경과 과시욕 등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반도 남부에 있던 히노에 성과 하라 성 등을 버리고 북부로 옮겨가버린 결과 시마바라의 난 당시 남부 주민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반도 남부의 인접 지역이었던 아마쿠사의 반군까지 합세해 농성을 벌이게 된다.[4] 원문은 '4万石の大名にしては過分な城であったようです'다. 출처[5] 천수각 높이 1, 2위는 오사카성과 나고야성이며 4, 5위는 구마모토성과 히메지성이다. 현재의 부흥 천수는 그림이나 기록, 구술 등을 바탕으로 복원했는데 복원된 천수각을 발굴 작업 결과 및 과거 사진 자료와 비교했을 때 과거보다 작게 지어졌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돈을 퍼부은 거야[6] 약 45만 제곱미터에 달한다. 이게 얼마나 큰 규모인지 비교하자면 현재의 오사카 성이 가로세로 약 1km(100만 제곱미터) 정도이며 구마모토 성이 여기보다 약간 더 큰 약 51만 제곱미터의 면적을 차지한다. 구마모토 번이 당시 52만 석 영지인데 다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당시 터득한 축성 기술을 활용해 대대적으로 보강했음에도 불구하고 4만 석 영지의 성과 면적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7] 무리한 축성으로 인해 많은 돈이 소모되면서 재충당을 위해 수탈이 더욱 심해졌다. 이와는 별개로 키리시탄 탄압 과정에서 그 유명한 운젠 지옥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헌데 이 고문은 전대부터 했던 것으로, 카츠이에는 여기에 미노오도리라는 도롱이 옷을 입게 한 뒤 불을 지르는 고문을 추가했다. 일본의 유명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이들의 행태를 두고 '일본사에서 이만큼 꺼려야 할 사람(시게마사)은 적다.' 라고 평한 바 있다. (원문: 日本史の中で松倉重政という人物ほど忌むべき存在は少ない)[8] 카츠이에는 에도 시대에 참수된 유일한 다이묘로, 에도 시대의 다이묘는 죽을 죄를 저지르더라도 명예를 고려해 할복 명령이 내려졌다. 이를 고려하면 막부는 카츠이에에게 상당히 무거운 형벌을 내린 것인데 보신 전쟁 전까지 최대 규모의 반란 보신 전쟁이 반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실패한 반란 중에서는 최대 타이틀을 지켰다 이었고 그 원인이 상상 이상의 폭정과 비리 때문이었기에 중앙에서 화가 많이 났을 만도 하다. 똑같이 반란이 일어난 곳이지만 아마쿠사의 영주는 석고만 깎였는데 그는 딱히 폭정을 저지르지는 않았고 반란의 원인이 된 키리시탄 박해는 이전부터도 국가적으로 행해 온 일이라 문제될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석고가 깎인 건 아무래도 시마바라의 난이 수만 단위의 대규모 반란이라 어쨌든 책임을 지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