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12-13 18:11:52

신두식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신두창(申斗昌)·황학명(黃鶴明)·신두식(申斗植)
본관 평산 신씨[1]
출생 1896년 2월 12일
평양부 숙천군 우상방 통덕리[2][3]
(현 평안남도 숙천군 용덕리)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신두식은 1896년 2월 12일 평양부 숙천군 우상방 통덕리(현 평안남도 숙천군 용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8년 8월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연락기관을 봉천성 심양현(瀋陽縣)의 십간방물산도매상(十間房物産都賣商)으로 위장 설치해 놓고 연락업무를 수행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서로군정서 의용대장 이석(李錫)과 동지 전일과 함께 펑톈에서 모조 폭탄 수백개를 제조하였다.

그리하여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여 일본인 관리 및 일제 관청을 습격하는 등의 의열투쟁을 지원하려고 계획하던 중, 그해 9월 15일 밤에 심양현 옛 성경성(盛京城) 소남문(小南門)[4] 내 천성여관(天成旅館)에 숨겨 두었던 폭탄 1개가 땅에 떨어져 불이 타올라 전일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따라서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상하이로 피신하여 1920년 3월 4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지방국장에 취임하였으며, 같은 해 5월 20일에는 임시정부 내무부 비서국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같은 해 12월에는 상해 대한적십자회에서 적십자병원의 설치 등을 위해서 4대(隊)의 행동대를 설치하게 되자 그는 3·1대에 속하여 모금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이후 그의 행적 및 최후에 대해서는 자료가 미비하여 알 수 없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34세 식(湜) 철(澈) 순(淳) 영(泳) 항렬.[2] 1896년 평안남도 숙천군 우상면 통덕리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평원군 숙천면 통덕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숙천군 용덕리[3] 인근의 도덕리·백로리·미남리와 함께 평산 신씨 집성촌이다.[4] 천우문(天佑門)이라고도 했었다.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선양시 선허구(瀋河區) 샤오난제(小南街)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