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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15:52:54

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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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운동가.신영호.jpg
출생 1902년 6월 25일
충청북도 청주군 가덕면 인차리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
사망 1947년 2월 2일 (향년 45세)
중화민국 눈강성 치치하얼시
이명 신영호(申榮浩, 申鍈浩) 또는 신횡호(申鐄浩)
범일(範一)
본관 고령 신씨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82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부모 아버지 신정식, 어머니 연안 이씨 이정희
자녀 딸 1명[1]
친인척 사위
외손자 배성우, 배성재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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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영호.초상화.jpg
신영호의 공식 초상화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배성재배성우의 외할아버지이다.

2. 생애

신영호는 1902년 6월 25일 당시의 충청북도 청주군 가덕면(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신정식(申正植, 1883 ~ 1918. 11. 16)과 어머니 연안 이씨 이정희(李正熙, 1883 ~ ?. 11. 6) 사이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성 중앙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를 입수한 그는 충청북도 책임자의 사명을 띠고 귀향한 뒤 3월 9일 청주공립농업학교 기숙사로 가서 학생들에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알리고 청주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의해 찬성을 얻어냈다. 이후 독립선언문과 경고문 등을 제작하고 인쇄하는 등 거사준비를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했으나 5월 5일 경성복심법원과 5월 3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각각 기각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2월 21일 가출옥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은거하다 1947년 2월 2일 중화민국 눈강성 치치하얼시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신영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3년 10월 13일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3. 여담

2014년 6월 30일 힐링캠프에 출연한 배성재는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 신영호인걸 알렸다. 그는 뒤이어 일본관중이 세계적인 축제인 월드컵 응원전에서 전범기를 그리고 나온 행위를 비판했다. 그는 "경기장에 보이는 전범기를 하고 나오는 게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모르는 것도 잘못이다. 제지를 하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나쁘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1] 배성우배성재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