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후의 음악 세계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신윤식은 그룹 작은 거인, 건아들 출신의 뮤지션이다. 신윤식은 80년대 후반 '황토길'과 '흔적' 등의 앨범을 발표했다. 그는 대중음악은 물론, 클래식과 현대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연극과 광고 음악의 작곡 및 편곡 활동에 주력해온 '진짜 음악인'이다. KBS1 '인간극장' 시그널 음악도 신윤식의 손에서 탄생했다.장아름, 〈포스트맨 신지후 "'신촌을 못 가', 내 음악 인생의 터닝포인트"(인터뷰)〉, 《뉴스1》, 2014. 9. 29.
김수철이 리드한 4인조 대학생 밴드 '작은거인'은 1979년 한양대 노천강당에서 열린 제1회 전국대학가요 경연대회에서 〈일곱색깔 무지개〉로 금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1981년 2집 앨범은 멤버들 중 김수철과 최수일 2명이 남아 제작한 음반이다. 2집 앨범 발표 후 최수일은 밴드를 탈퇴했다. 1982년 김수철(건국대 대학원 1년), 신윤식(단국대 2년), 허준(인하대 대학원 1년)으로 멤버가 교체되어 활동했다.[A] 2집을 끝으로 밴드는 해체했고 김수철은 솔로로 독립했다.[5]
건아들은 1979년 서울 보건전문대생으로 구성된 5인조 캠퍼스 록 밴드이다.[6] 1기 멤버는 정낙인(베이스), 이영(보컬), 이건식(오르간), 박대봉(기타), 김관영(드럼)이었다. 2기 라인업 구축 후 프로 밴드로 활동을 시작했다. 새로운 멤버는 신윤식(베이스), 이희영(키보드), 이진우(기타), 곽종묵(드럼, 보컬)이었다. 건아들은 멤버들 모두 보컬이 가능한 밴드였다. 정규 1집의 타이틀곡은 신윤식의 곡 〈꿈꾸는 아이들〉과 정인환의 곡 〈계절이 가기전에〉이었다.[7]
대중적이지는 않았지만 고정 팬들이 꽤 많았는데 3집 앨범 〈흔적〉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미리내 극장에서의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가요계에서 멀어져 갔다
강원도,북한에서는 진달래를 님달래라 한다더군요. 저는 님을 달라는 의미로 님달래로 테마를 정해서 작사.작곡했던거구요. 이 곡 발표시기가 노태우정권 중간평가 시긴지라 방송금지되고 저는 가수생활을 접게 되었습니다. 진달래가 북한 국화라는둥 트집 잡혀서요. 이미 운동권에서 많이 불려진 제 노래 황토길이란 노래로 찍혔었었나봐요.ㅎㅎ'달래 - 신윤식 k-pop' 유튜브 영상에 달린 신윤식의 댓글삭제된 영상
(원문 그대로이므로 맞춤법이 틀린 부분이 있다.) 안녕하세요? 리스프로에서 제작하는 인간극장의 음악을 작곡, 편곡, 연주하는 신윤식입니다. 인간극장 많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극장(리스프로제작)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음악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저의 창작곡임을 알려드립니다. 여러분이 좋아해 주셨던 엔딩 곡은 「- 인간 - 비. 바람」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뒤늦게 2악장을 붙여 올려놓았습니다. 게으르게도... 앞으로 여러분의 요청이 있을 때 극중의 배경음악을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에 대한 얘기를 해도 될까요? 주제넘게도... 초등학교 5학년 때 동요음반 취입을 하였고 중 1때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작곡을 하였고 중2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안하고 록그룹사운드 결성하고 시 쓴답시고 밤새고 클래식 공부하여 수준있는 대중음악을 하고 싶어서 대학에서는 작곡을 전공하고 피아노를 부전공하였습니다. 대학 다니면서 취미생활로 그룹 작은거인, 건아들에서 Bass 주자로 활동하였고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기도 했습니다. 가곡을 작시, 작곡하여 발표하기도 하고 국립무용단 음악, 한국무용음악, 현대발레음악, 연극「애니깽」의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생이 흔히 하는 유학준비를 하다가 음반사의 권유로 가수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3장의 앨범 「신윤식」「황토길」「흔적」을 작사, 작곡, 편곡, 노래, 연주하여 발표했습니다.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고정팬들이 꽤 많았는데 3집 앨범 「흔적」이 금지곡 되는 바람에 미리내 극장에서의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가요게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1년동안 방황했습니다 너무도 쓰라리고 아펐던 시절이었구요 어느날 아침 7시에 술을 사러 가는데 새소리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무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구요 나무는 보기에 좋았고 새소리는 듣기에 좋았고 바람은 느기기에 좋았고 땅은 걷기에 좋았습니다. 음악을 잊었었던 나는 그 자리에서 30분간 서있었습니다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죠 CF음악감독이 되었습니다 가장 싫어했던 상업광고 음악을 하게 되었죠 고도의 테크닉과 순발력을 요하는 음악으로 저를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많은 작품을 했고 성공을 거두었죠 그후 저는 그 세계를 떠났습니다 저하구는 당연히 안맞으니까요 제가 하고 싶었던 아이들을 위한 음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분은 방정환선생님이거든요 우리나라 어린이 음악은 순수성이 결여되고 상업적인 면만이 팽배해 있습니다 가요는 많은 투자가 되지만 동요는 천대를 받는다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아이들을 위해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프군요 우리 모두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정채봉 시인의 글을 읽으며 순수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정채봉 시인의 글로 작곡하며 음반준비중에 있습니다 매우힘들겠죠? 좋은 글을 노래로 작곡하는걸 제 의무라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은 다큐멘터리 음악도 하고 싶구요, 다시 노래도 하고 싶습니다 조용한 시골로 가는 것도 계획중입니다 제가 요즘 견디기 힘든건 쓸쓸함이라는건데요 여러분은 쓸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더욱 좋은 인간극장의 음악을 만들겠습니다 많이 사랑해주시구요 서투른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문화 많이 접하시길 바라며 저의 2집 앨범중 「빗소리」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시를 적어 보겠습니다
학력사항은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주간경향(1982. 3. 7.)[A]에서는 1982년 작은 거인의 교체된 멤버로 '신윤식(단국대 2년)'이라고 나온다. 신윤식이 작성한 글로 추측되는 인간극장 타이틀송(퍼옴)에서는 "대학에서는 작곡을 전공하고 피아노를 부전공하였습니다. … 대학생이 흔히 하는 유학준비를 하다가 음반사의 권유로 가수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