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22:17:58

아르나룰룽우아크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아르나룰룽우아크
Arnarulunnguaq
파일:1000010845.jpg
출생 1896년
그린란드 섬 툴레[1]
사망 1933년
북그린란드 감찰령 툴레[2]
국적
[[그린란드|]][[틀:국기|]][[틀:국기|]]
직업 탐험가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툴레 제5차 탐험대로의 소속2.3. 말년
3. 여담4. 참고 자료

[clearfix]

1. 개요

그린란드의 탐험가.

그린란드계 덴마크인 탐험가인 크누트 라스무센(Knud Rasmussen)의 탐험에 참여한 인물로서, 최초로 북극 횡단을 완수한 여성이다.

2. 생애

2.1. 유년기

1896년 툴레(현 카나크) 출생으로, 우마크(Uumaaq)와 알레카세르수아크(Aleqasersuaq)의 슬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곱 살의 나이에 부친인 우마크(Uumaaq)가 사망함에 따라 궁핍하게 자랐다. 그린란드의 혹독한 환경 탓에, 종종 공동체 내에서 전체 인구를 부양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노인이나 어린아이가 자살하거나 죽이는 식으로 강제로 인구를 조절하는 상황이 흔히 발생하곤 했는데, 아르나룰룽우아크가 이 희생양으로 지목되었다.

따라서 아르나룰룽우아크의 목을 졸라 죽이게 되어 있었으나, 그녀의 형제인 아야코(Ajako)가 극구 만류하는 등 모친 또한 그녀를 차마 죽이지 못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된다.

이는 아르나룰룽우아크의 성격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후일 아르나룰룽우아크는 이 날을 기점으로 자신이 '다시 태어난 것과 같다'며, 거의 선물과 같이 받은 목숨인 탓에 사람들에게 쉽게 동요하지 않는 성격이 된 것 같다고 회고하였다.

2.2. 툴레 제5차 탐험대로의 소속

엽사 이기앙우아크(Iggiannguaq)와 결혼하였으며, 크누트 라스무센이 툴레 제5차 탐사에 나설 때 이들 부부를 현지 동행자로 택함에 따라 북극 탐사에 올랐다.

본래는 그녀가 아닌 그녀의 형제 아야코(Ajako)가 탐험대에 속할 예정이었으나, 그가 돌연 의문사하는 바람에 이기앙우아크 내외가 대신 참여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정작 이기앙우아크는 고트호프(현 누크)에서 탐험을 시작하기 직전에 폐렴으로 사망하고 말았으나, 아르나룰룽우아크는 라스무센에게 청하여 탐험대에 남아 여정을 속행하였다.

이에 관해 라스무센은 1921년 9월 26일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당연히 이기앙우아크의 미망인은 남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녀에게 툴레로 돌아갈 수 있는 선택지를 주었다. (...) 오늘 그녀가 탐험대에 남아도 되느냐 물어 왔다. 남그린란드에 영영 혼자 떨어져 생면부지인 사람들과 섞여 살 길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 그녀가 남고자 하여 자못 기쁘게 생각한다. 그녀는 (...) 우리와 함께하는 가장 유능한 여자이다.

1921년 9월 7일부터 탐험이 시작되었으며, 이동은 개썰매를 통해 이루어졌다. 본래 10명 이상으로 시작하였으나, 대부분의 대원들은 허드슨만에 도착하였을 때 해산하였다. 반면 라스무센과 아르나룰룽우아크 및 그녀와 사촌지간인 카비가르수아크(Qaavigarsuaq)는 탐험을 속행하였고, 캐나다 동부에서부터 북극을 관통하여 오늘날 러시아알래스카 사이의 베링 해협까지 도달하였다. 이 탐험에 2년이 소요되었으며, 그동안 아르나룰룽우아크는 식사를 준비하고 북극 탐험에 반드시 필요한 가죽을 가공하는 일과 야영지를 준비하는 일 등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본래 그녀는 가죽 가공과 식사 준비 등 탐험을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할 예정에 있었으나, 여정이 이어짐에 따라 그녀가 개썰매를 모는 데 매우 능하다는 점이 부각되었고, 점차 다종다양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라스무센은 그녀가 관찰력이 매우 뛰어나다고 평했으며, 덕분에 각종 식생과 고고학적 발견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음을 기록하고 잡지에 기고한 바 있다. 실제로 아르나룰룽우아크는 탐험 중 캐나다 일대의 이누이트 여성들이 몸에 새기는 각종 문신들에 관한 삽화를 비롯해 여러 기록을 남겼다.

성격 또한 쾌활한 편이었는지, 라스무센은 그녀에 대하여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탐험에 함께한 어떤 남자에게도 밀리지 않을 용기와 재치를 갖추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2.3. 말년

파일:knud-rasmussen-left-arnarulunnguaq-middle-photo-by-national-photo-company-collection-library-of-congress.jpg
1924년 11월 3일, 워싱턴 D.C.
당시 미국 대통령 캘빈 쿨리지를 만났을 때 촬영한 사진으로, 왼쪽부터 크누트 라스무센, 아르나룰룽우아크, 미테크이다.
탐험대는 1924년 말엽 미국을 거쳐 덴마크로 돌아왔다.

뉴욕을 거치면서 라스무센은 두 이누후이트[3]를 데리고 마천루 꼭대기에 올라 도시를 보여주었는데, 이때 아르나룰룽우아크는 경탄을 멈추지 못했다고 전한다.
"가장 위대하고 경이로운 것은 자연이라 생각했건만, 여기엔 오로지 사람이 지은 산과 해안과 절벽이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이미 죽어서 다른 세상에 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 광경을 보고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어쩌면 자연보다 더 위대한지도 모른다. 저 멀리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들은 사람이 지은 돌 평원 위에 돌벽을 쌓고 살고 있다. 바쁘게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지만 도무지 어디에도 사냥감은 안 보이는데, 그런데도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하고 살아간다."

라스무센은 이를 두고 '백인의 눈에 모든 것이 신비롭게만 보이던 이누이트의 땅이 그들에게는 일상이었듯이, 이번엔 반대로 그들이 백인들의 일상적인 땅을 보고 신비로워할 차례'라 평하였다.

덴마크로 돌아와 코펜하겐에서 검진한 결과 결핵을 진단받았고, 이로 인해 입원하였으며, 입원해 있는 동안 당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로부터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았다.

1925년 10월 2일 퇴원하고 움만나크(현 비두픽 우주기지)[4]로 돌아갔으며 이때 칼리팔루크 피어리(Kaalipaluk Peary)[5]와 재혼하였다.

결핵으로부터 영영 쾌차하지는 못하였으며, 결국 이로 인해 탐험이 끝나고 9년이 지난 1933년 향년 3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칼리팔루크는 그녀가 매우 재능 있는 사람으로, 어느 하나 잘 못하는 일이 없었으나, 북극 횡단 탐험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은 없다고 기억하였다.

3. 여담

4. 참고 자료

다음의 글을 참고해봄직하다.

Arnarulunnguaq - A tough greenlandic explorer, Visit Greenland
The Journey of Arctic Explorer Arnarulunnguaq, 왕립지리학회
Memory of Arnarulunnguaq Lives on in Greenlandic culture, Nunatsiaq News
[1] 당시에는 단순히 이누이트 토착민이 사는 곳으로서, 덴마크가 이곳을 관할하지 않았다.[2] 덴마크가 실질적으로 관리하였으나, 아직 툴레 식민지구가 편성되기 전이었다.[3] Inughuit, 북극 이누이트인을 이르는 명칭.[4] 카나크 인근에 존재하였던 정착촌으로, 툴레 공군기지(현 비두픽 우주기지)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해체되었고 주민들은 카나크로 강제 이주되었다.[5] 최초로 북극점의 얼음 위에 도달했다고 잘못 알려진 북극 탐험가이자 미합중국 해군 장교였던 로버트 피어리의 아들이다.[6] 자신은 그냥 따라다니기만 한 여자일 뿐 탐험을 한 사람이 아니고, 훈장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7] Fortjenstmedaljen. 덴마크 왕실에서 수여하는 훈장으로, 국왕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인물에게 수여된다.[8]누나부트준주의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