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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왕국 32대 군주 არჩილი | 아르칠리 | ||
제호 | 한국어 | 아르칠리 |
조지아어 | არჩილი | |
라틴어 | Arch'il | |
생몰 년도 | 미상 ~ 435년 | |
재위 기간 | 411년 ~ 4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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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베리아 왕국 32대 군주.2. 생애
이베리아 왕국 31대 군주 미흐르다트 4세와 아누시의 외아들이다. 411년 사산 왕조 샤한샤 야즈데게르드 1세가 파견한 사산 왕조군에 의해 아버지가 생포되어 크세노폰으로 끌려간 뒤, 이베리아 왕실은 나라 전역을 황폐화하는 적군을 피해 카케티 산악지대의 은신처에 숨어서 그를 왕으로 옹립했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나르세스 장군에게 이베리아 일대의 지배를 확립하도록 시키고, 자신은 트란스캅카스를 침공해여 그곳의 부족들을 복종시켰다. 아르칠리는 사산 왕조군의 기세에 짓눌려 야즈데게르드 1세에게 복종을 서약해야 했다.이베리아를 복종시킨 뒤, 야즈데게르드 1세는 페르시아로 돌아와서 이베리아, 아르메니아, 코카서스 알바니아의 통치자들에게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채택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아르메니아 및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항전했다. 다르바트 인근의 여러 사산 왕조 측 요새는 아르메니아-이베리아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야즈데게르드 1세가 파견한 군대는 아르메니아 장군 미스킨에게 베르두지 강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 후 아르칠리는 사산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던 트란스캅카스로 쳐들어가서 이베리아의 지배력을 회복했다. 특히 사산 왕조 총독 마즈반 바르자부드의 관할 하에 있던 아란 족의 영역은 심하게 황폐해졌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적힌 이야기에 따르면, 야즈데게르드 1세는 연이은 패배에 분노하여 인질로 잡힌 모든 기독교 주교, 이베리아 및 아르메니아 귀족을 처형한 뒤 다시 이베리아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가 아르칠리의 어머니인 아누시가 눈물로 호소하자 침략을 중단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아르칠리의 아들 미흐르다트 5세가 마즈반 바르자부드의 딸인 사두후트를 보고 한 눈에 반했고, 아버지를 설득해 전쟁을 중단하고 그녀와 결혼했다고 한다. 그는 사산 왕조와 전쟁을 치르는 도중에 샤한샤에 의해 이베리아로 파견된 수많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하고 교회를 재건했으며, 수도자들이 기독교 교리를 학생들에게 교육시킬 수 있도록 여러 학교를 세웠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는 그런 그를 용감하면서도 신에게 전력으로 헌신하는 인물이라고 호평했다.
이렇듯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는 아르칠리가 사산 왕조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신빙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우선, 사산 왕조측 기록에는 야즈데게르드 1세가 이베리아를 대대적으로 침략해 기독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친선 관계를 유지했으며, 사산 제국 내 기독교인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또한 아르칠리와 동맹을 맺고 사산 왕조에 함께 대항했다는 아르메니아 왕국은 387년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에 의해 전 국토가 분할된 뒤 서부는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고, 동부는 사산 왕조의 번국으로 전락했고, 414년부터 424년까지는 아예 사산 왕조의 직접 통치를 받기도 했기에 사산 왕조에 맞서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421년 샤한샤에 오른 바흐람 5세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권고에 따라 기독교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를 하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반발하여 사산 왕조와 1년간 전쟁을 벌였는데, 학자들은 이때 이베리아도 로마와 연합하여 사산 왕조에 대항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는 이때의 일을 과장하여 서술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또한 사산 왕조와 동로마 측 기록에는 사산 왕조가 이베리아, 아르메니아, 알바니아 등 캅카스 일대의 통치자들로부터 조공을 지속적으로 받았으며 그들에게 매년 병역을 부과했다고 서술되어 있으며, 이 시기에 이베리아 각지에 조로아스터교 신전들이 세워졌다는 사실이 고고학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428년 이베리아 왕국의 남쪽 국경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왕국이 사산 왕조에 완전히 합병되면서, 이베리아 왕국의 입지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435년 사망했고, 아들 미흐르다트 5세가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