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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노모도(조미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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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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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지노모도에서 개발한 조미료.

2. 역사

파일:external/www.minjog21.com/2619_7891_5642.jpg
파일:external/www.minjog21.com/2619_7887_569.jpg
일제강점기를 풍미했던 아지노모도의 광고자료. 아지노모도의 맛은 한국의 전통음식의 맛까지 바꾸어놓았다.
"명절 음식은 아지노모도를 쳐서 맛있게 하십시다"
"철썩철썩 떡 치는 소리 풍성풍성. 모든 명절 음식은 아지노모도를 쳐서 맛있게 하십시오"
"맛이 딴판일세. 우리 시골 국수맛과는 맛이 딴판이라우. 무엇을 치나우? 아아아, 아지노모도를 쳤구려!"[1]
"우리집 동치미 맛은 일등! 나는 가끔가끔 꺼내먹지요. 맛이 어찌 좋은지요? 아지노모도를 쳤으니 맛이 좋지요"
"울리집 욜리 맛이 이서. 울리집의 욜리 맛이 좋지. 손님 많이 왔지. 그거 왜 그래? 울리집 욜리 아지노모도 쳤지.[2]"
"성공 성공. 아지노모도를 쳐서 요리를 한 뒤로는 손님은 많아지고 고기값 양념값은 적어졌으니 주판이 선다. 성공이다 성공."
"만점의 신부는 마음 얼굴 침선과 음식 솜씨입니다. 음식 솜씨는 음식 만드실 때에 아지노모도를 쳐서 맛있게만 하면 그만······."
[3]

아지노모토가 한창 회사를 창립하여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을 때 한반도는 일제강점기였고 아지노모토도 돈 벌 기회를 노려서 한반도로 진출, 1915년에 아지노모도를 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본 본토에서도 뱀이 아지노모도의 원료라는 헛소문이 나돌던 판이었고, 가격대 또한 매우 비싸 한동안 고전했다. 그러나 한국 요리에 국물 요리가 많다는 점에 착안해 1929년을 기점으로 주요 신문과 잡지에 조선의 식문화를 적극 반영한 광고를 내놓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친 결과 1930년대에는 조선 최대의 광고주가 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냉면집이나 설렁탕집, 중국집 등 외식업계를 대상으로 아지노모도가 납품되자 이때부터 MSG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 대만인들의 입맛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당시의 외래어 표기의 경향대로 한글로는 주로 '아지노모'라고 표기했다.[4]

조선방송협회 문서를 보면 JODK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연속 드라마가 인기를 끌자 스폰서로 붙었던 일화가 있다. 그리고 배우들은 냉면 먹는 장면을 위해 실제로 한일관에서 냉면을 한 대접 시켜다 먹으며 "아지노모도를 친 냉면 맛이 일품이오"라고 간접광고를 했다.[5][6]

당시 아지노모도의 값은 15전으로 매우 비쌌지만 조선에서의 매출량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조선 지사장이 본사 사장 다음으로 높은 자리였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으나, 중일전쟁 발발 이후로 전시식량통제로 아지노모도의 생산량이 줄기 시작하자 결국 1943년에 조선사무소를 폐쇄했으며 일제 패망 이후 다른 일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이미 아지노모도에 입맛이 길들여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부유층 사이에서 일본산 아지노모도를 밀수입하는 경우가 많았고 상표나 내용물을 위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 동아화성공업(現 대상)미원.

참고로 미원은 아지노모도를 의식한 상표인데, 아지 노 모토, 즉 '味の素'에서 (흴 소)를 일본어훈독이 もと(모토)로 동일한 (으뜸 원)으로 고친 것이다. 게다가 상표마저 표절. 원조 아지노모토는 빨간 색의 뚜껑을 덮은 국그릇, 보통 된장국(시루(汁)를 담는 그릇의 모양인데, 미원은 거기에다 고리를 달아서 신선로 모양으로 슬쩍 바꾼 것이다. 자세히 보면 그릇의 운두가 낮고 받침도 좁아서, 널리 쓰던 신선로 모양에서 좀 벗어났다. 그렇게 표시하고 "신선로표 미원"이라고 광고했다. 제품 이름이나 상표나 표절이지만 당시는 저작권 개념이 없던 때였고, 일본도 마찬가지로 저작권 의식은 쌈싸먹던 시대였던건 매한가지였다.

당시에는 아직 해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대부분의 한국인이 아지노모도라는 제품을 알고, 일본어도 알고 있었기에 이런 것이고, 자연스레 아지노모도의 수요를 미원이 대체했다.[7]

이후 미원은 자체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서 한동안 조미료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고 1969년 제일제당이 미풍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품질 개선을 위해 아지노모토社와 기술 제휴까지 했으나 미원의 아성을 넘을 수는 없었다. 이병철이 이에 대해 '인생에서 뜻대로 안 되는 게 세 가지(자식 농사, 골프, 미원)가 있었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결국 제일제당은 다시다 쇠고기맛이 대히트를 치고 나서야 미원을 넘고 한국 조미료 시장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아지노모토라고 하면 판다 얼굴이 그려진 병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해당 내용은 새문사의 한국사 교재에 언급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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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수에 왠 MSG인가 싶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고기 대신 아지노모도를 사용해 육수를 만들어 팔던 평양냉면 가게가 유행이었고, 오늘날에도 평양냉면 전문점에선 고기를 우린 육수에 미원을 미량 첨가한다.[2] 그림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이 광고의 화자는 중국인이다. (정황상 화교로 추정) 이 독특한 말투와 일그러진 문법은 중국인 특유의 발음을 표현한 것이다.[3] 표기는 현대식으로 다듬었다.[4] 오늘날 한국인들이 거센소리로 옮기고 발음하는 외래어 음소들을 구한말이나 일제시대에는 예사소리, 혹은 된소리로 옮기고 발음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구한말이나 일제시대에 음역된 천주교나 개신교의 외래어 표기들도 파열음을 예사소리로 옮긴 경향이 아주 또렷하고 일괸되이 나타난다. 당장 Petros를 '베드로'라고 음역한 것도 이런 사례이다.[5] 이 장면은 영화 라듸오 데이즈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6] 식객의 27권 중 오봉주도 아지노모토가 냉면 맛을 망친 주범이라고 말하기도 했다.[7] 실제로 미원은 창업주 임대홍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조미료 업체에서 퇴직한 직원들에게 기술을 전수받아서 한국에 돌아와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