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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방송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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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틀:국기|]][[틀:국기|]]
개국일 1927년 2월 16일
폐국일 1948년 8월 5일
당시 본사 조선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구 정동정 1-10[1]
1. 개요2. 라디오 방송의 시작3. 경성방송국 시대4. 라디오의 정착과 관영방송의 한계5. 역대 수장6. 기타7. 관련 문서8. 관련 논문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에서 유일했던 방송국. 당시 경성(서울)지역 호출부호는 JODK였으며 이후 부산, 평양 등지에 지역국이 개설되었다. 해방과 분단 이후 남측 지역의 방송국은 서울중앙방송국(오늘날의 KBS 제1라디오)이 되었으며, 평양의 방송국은 오늘날의 조선중앙방송이 되었다.

일본어 발음을 로마자로 옮기면 'Chōsen Hōsō Kyōkai'가 되지만 'CHK'로 줄여 부르는 일은 없었다. 이 시기에는 일본방송협회도 로마자 약칭 NHK를 사용하지 않았다.

2. 라디오 방송의 시작

조선방송협회의 송출 역사는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를 기원으로 하며 이 날 개국한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JODK)이 모체이다. 이는 동양에서 4번째로 개국한 방송국이다.[2] 일본에 의해 개국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무선호출 국가코드인 'JO' 다음에 네 번째인 'D'코드를 부여 받았다.

송출개시 전파는 겨우 1㎾에 불과했으나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미국에서도 약하게 감지되어, 어느 아마추어 전파동호인이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역시 양덕후[3]

원래는 1924년 11월부터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매일 시간을 맞추어 시험방송을 하고 있었지만 이 기록은 방송 관계자들이 그냥 기록으로만 취급하고 있는 듯.

3. 경성방송국 시대

파일:external/www.japanradiomuseum.jp/JODKoffice.jpg
(경성) 안테나 중천에 솟다((京城)アンテナ中空に聳ゆる)
JODK 경성중앙방송국(ゼ[4]・オ・デ・ケ 京城中央放送局)
경성방송국 전경. 네모진 방송국 건물에 비해 그 앞의 구세군 본부가 좀 더 고풍스럽게 생겼기에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개국 당시의 어수룩한 방송환경 때문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은데, 자세한 것은 류승범 주연 영화 라듸오 데이즈, 혹은 이 각본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다른 책으로도 잘 나와 있다.

4. 라디오의 정착과 관영방송의 한계

JODK 개국 후에는 일본방송협회(NHK) 소속에서 떨어져 나와, 조선총독부 유관기관 '조선방송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언론의 자유가 미진했던 일본 제국 체제에서 언론이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기는 힘든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ODK는 1933년에 들어 출력 10㎾의 연희 송신소[5]를 신설하여 일본어 채널(제1방송)뿐만 아니라 조선어 채널(제2방송)까지 두 개의 라디오 채널을 제공했다(위에서 서술한 개국 3년차의 연속극도 조선어로 이루어졌다)[6]. 그리고 연속극이나 명사의 리사이틀 등 점차 대중으로부터 조선어 방송의 반향이 오자, JODK도 조선어 방송 비중을 늘려나가게 된다. 1933년에는 3천 대에 불과하던 라디오 수상기의 보급대수도 불과 3년만에 22,751대까지 늘어났던 것. 예나 지금이나 막장쪽대본드라마는 시청률은 잘 나온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국은 중국 상하이에 50㎾의 고출력 송신소를 세워 방송을 개시한다. 아무래도 아시아판 릴리 마를렌을 노렸던 건지 그러자 일제도 이에 반응, 1937년에 연희송신소의 송신출력을 10㎾에서 50㎾로 증강했다. 이 연희송신소는 6.25 중에 인천 상륙 작전 후 이를 되찾으려는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교전(연희고지 전투)이 벌어지기도 했다.

연희송신소가 세워지고 출력증강이 이루어지던 이 시기에 전국방송망이 구축되기 시작했는데, 1935년 기존의 JODK는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칭하고 조선방송협회를 결성, 1936년부터 부산방송국(JBAK)을 시작으로 평양(JBBK), 청진(JBCK), 이리(JBFK), 함흥(JBDK)에 1차로 지방방송국이 개국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7년부터 순차적으로 대구(JBGK), 광주(JBHK), 대전(JBIK), 원산(JBJK), 해주(JBKK), 신의주(JBLK), 춘천(JBMK), 마산(JBOK), 목포(JBNK), 성진(JBPK), 청주(JBQK), 강릉(JBRK)에 지역방송국 체제를 갖추었다.

개중에는 마산방송국처럼 간이방송소에서 시작한 곳도 있었고, 이들 지방방송국은 청진의 10㎾ 송신출력을 제외하면 모두 50 W~500 W의 저출력으로 방송이 송신되었다. 청진방송국의 경우 일제 패망 후 소련군에게 넘어가기 전에 관동군이 폭파시키고 철수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어 방송인 제2방송은 1940년의 조선언론 탄압정책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의 개전으로 인해 크게 축소되었다. 그러던 중 제2방송은 1942년 12월 발생한 단파방송 밀청사건으로 조선어 방송 실무자들이 줄줄이 연행되는 등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결국 1943년 6월 제2방송은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다. 이후에는 일본어로 된 방송만 실시하였고 그 내용도 태평양전쟁 전황보도나 쇼와 덴노의 연설 등 태평양 전쟁에 관련된 것들 뿐. 그나마 제대로 방송되지도 않았다. 일본 국민들이 실상을 알게 된 것은 미군이 사이판을 점령하고 B-29로 혼슈 폭격을 실시하면서부터. 당연히 청취율이 좋을 리 없었고, 쌀 한 말 값에 육박했던 청취료 때문에라도 더더욱 라디오를 안 듣게 되자 나중에 일제 당국은 각 관공서와 동네 부잣집 등에 강제로 라디오 수상기를 떠안기고 수신료를 받아가는 형식으로 방송을 듣게 했다.

해방후 호출부호를 HL로 배정받으면서 남한 지역에 잔류한 구 조선방송협회 산하의 지역방송국들도 방송을 재개하면서 호출부호를 재배정받았다. 이때 지역방송국은 조선방송협회 시절의 호출부호 2자리를 순서만 뒤집어 재활용했다. 예컨대 이리/익산(이후 전주로 이전)(JBFK→HLKF), 대구(JBGK→HLKG), 광주(JBHK→HLKH), 대전(JBIK→HLKI), 전주(JBFK→HLKF), 춘천(JBMK→HLKM), 목포(JBNK→HLKN), 청주(JBQK→HLKQ), 강릉(JBRK→HLKR) 마산/창원(JBOK→HLKO). 단 이 원칙이 모두 적용된 것은 아니었는데, 해방 이후 서울은 JODK에서 HLKA로, 부산은 JBAK에서 HLKB로 새로 재배정 되었으며, 마산은 1959년 HLKO에서 HLKD로 새로 재배정되었다. HLKC는 한동안 결번이었다가, 1962년 500㎾ 규모의 대규모 남양송신소(현 화성송신소)를 건설하면서 RSB 라디오서울에 배정하게 되었다.

5. 역대 수장

6. 기타

7. 관련 문서

8. 관련 논문


[1] 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2] 최초의 방송국은 도쿄의 JOAK(현 NHK 도쿄 제1방송)로 이후 오사카(JOBK, 현 NHK 오사카 제1방송), 나고야(JOCK, 현 NHK 나고야 제1방송) 순으로 개국했다.[3] 현재에도 미국 서부 해안에서 본 방송의 후신인 KBS에서 방송하는 한민족 제1방송의 수신이 가능하다. #[4] J[dʒeɪ\]의 발음을 고려하면 'ジェ(ー)'로 옮겨졌을 법도 하나, 당시엔 외래어에서 [dʒ\] 발음으로 시작하는 음절을 'ジャ' 행 가나가 아닌 'ザ' 행 가나로 옮기는 경우도 많았다. jelly도 'ゼリー'로 굳어졌다(물론 'ジェリー'로도 쓰인다.).[5] 당인리선 방송소앞역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1971년에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소래송신소로 이전하면서 폐지되었다.[6] 사실 일본 본토에서도 1931년에 각 지역방송국들이 제2방송을 개국한 상태였다. 다만 장르에 따라 방송을 구분했던 일본 본토와 달리 조선에서는 언어로 구분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7] 당시에는 총재가 없어서 부총재만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