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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0:32:00

아치볼드 더글러스(리데스데일 기사)

이름 아치볼드 더글러스
Archibald Douglas
출생 미상
스코틀랜드 왕국
사망 1333년 7월 19일
스코틀랜드 왕국 할리돈 힐
아버지 윌리엄 더글러스
어머니 엘레노어 드 로뱅
형제 휴고(친형제), 제임스(이복형제)
부인 베아트리체 드 린제이
자녀 윌리엄, 존, 엘레노어
직위 스코틀랜드 호국경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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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할리돈 힐 전투에서 에드워드 3세와 맞서 싸웠으나 전사했다.

2. 생애

아버지 윌리엄 더글러스는 록스버그셔의 모어배틀, 덤프리스셔의 커칸드루스, 뷰컨의 랫트레이 및 크리몬드, 킨카딘셔의 컨버트, 리데스데일 등지의 영주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했다가 자기에게서 독립하려는 발리올을 페위한 뒤 스코틀랜드를 강점한 것에 분노해 윌리엄 월레스에게 가담해 에드워드 1세와 맞서 싸웠다. 그러나 1297년 7월 잉글랜드군에 체포되어 베릭 성에 감금되었고, 다시 런던으로 이송되어 1298년 런던 탑에서 옥사했다. 어머니 엘레노어 드 루뱅은 리틀 이스턴의 영주 매튜 드 루뱅의 딸이다. 친형제로 휴고가 있었고, 이복 형제로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하고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등극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제임스 '블랙' 더글러스가 있었다.

그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1320년 로버트 1세로부터 록스버그셔의 모어배틀과 덤프리스셔의 커칸드루스에 대한 영주권을 인정받았을 때였다. 1324년 뷰컨의 랫트레이 및 크리몬드, 킨카딘셔의 킨버트를 수여받았으며, 사망하기 전에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지대인 리데스데일의 영지도 소유하고 있었기에 '리데스데일 기사'로 일컬어졌다. 1329년 로버트 1세가 사망한 뒤 5살의 아들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었다. 1332년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잉글랜드 귀족들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을 때, 그는 던바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의 휘하에서 이에 맞섰다.

1332년 8월 11일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마르 백작 돔놀 2세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주력군이 궤멸된 후, 패트릭 5세와 윌리엄 더글러스는 일단 후퇴하여 에드워드 발리올이 스콘에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는 걸 허용했다. 이후 돔놀 2세의 뒤를 이어 데이비드 2세를 대신해 스코틀랜드를 다스릴 호국경이 된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패트릭 5세는 에드워드 발리올에게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데이비드 2세와 발리올 중 누구를 스코틀랜드 왕으로 간주할 지를 논의하게 할 테니 1332년 2월 2일까지 휴전을 맺자고 제안했다. 발리을은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패트릭 5세의 제안을 받아들인 뒤, 잉글랜드 추종자들을 돌려보내고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성탄절을 보내기 위해 아난으로 이동한 뒤, 캐릭 백작 알락산더르 브루스를 비롯한 수많은 지역 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고 여유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제3대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는 비밀리에 군대를 모아 야간 행군을 통해 아난으로 이동했다. 1332년 12월 17일 새벽, 스코틀랜드인들이 발리올이 머물고 있던 아난을 급습했다. 잉글랜드인들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완패했고, 에드워드 발리올의 형제 헨리, 월터 코민, 존 모브레이를 포함한 여러 귀족이 피살당했다. 에드워드 발리올 본인은 간신히 포획에서 탈출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거의 벌거벗은 채 칼라일로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추종자들은 데이비드 2세 추종자들의 역습을 받고 잉글랜드로 도주했다.(아난 전투)

1333년 2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발리올이 스코틀랜드의 주권을 자신에게 양도하고, 그가 가신으로서 스코틀랜드에서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하며, 스코틀랜드 남부를 잉글랜드에 양도하는 대가로 그를 공식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그해 3월 에드워드 발리올이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칼라일에서 출진해 스코틀랜드로 진입했고, 그해 4월엔 에드워드 3세가 뉴캐슬에서 본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6,000 가량의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 국경의 요충지인 베릭 성 앞에 집결한 뒤 그곳을 포위했다. 에드워드 3세는 투석기 수십 대를 제작한 뒤 거대한 바위를 여러 차례 퍼부어 베릭 마을 대부분을 파괴하고 수비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여기에 마을에 물을 공급하는 지하 파이프 4개를 끊고 베릭 인근의 모든 촌락을 파괴하고 농작물을 약탈해 수비대가 굶주리게 만들었다. 또한 잉글랜드 해군은 트위드머스라는 작은 항구를 통해 군수 물자를 원정군에 공급했다.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침략군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대거 동원했다. 당시의 연대기에는 그 수가 14,629명, 30,000명, 40,000명, 80,000명, 90,000명, 100,000명 이상이거나 잉글랜드인보다 5대 1로 많았다고 다양하게 추정했다. 학계에서는 약 15,000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스코틀랜드군은 컴벌랜드에 소규모 습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더글러스는 지금 가지고 있는 병력으로 잉글랜드군에 바로 도전하기 보다는 좀더 많은 병력을 확보하려 애썼다. 그러다가 베릭 성이 7월 20일까지 구호받지 못하면 항복할 예정이라는 통보를 받자, 그 전에 잉글랜드군과 승부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1333년 7월 19일,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트위드 강을 건너 북서쪽에서 베릭으로 접근했다. 당시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군은 베릭에서 북서쪽으로 2마일 떨어진 할리돈 힐에 숙영지를 세우고 500명의 후방 경비대를 남겨 베릭 마을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코틀랜드군이 접근하자, 그들은 즉시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잉글랜드군은 3개 대열로 구성되었다. 각 대열은 하마기사와 맨앳암즈로 구성되었으며, 각 대열의 양쪽 측면에는 장궁병들이 배치되었다. 에드워드 발리올이 왼쪽 대열을 지휘했고, 에드워드 3세는 중앙 대열을 맡았으며, 기사 에드워드 드 보훈이 오른쪽 대열을 지휘했다.

스코틀랜드군은 4개의 쉴트론[1]으로 구성되었다. 제3대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가 첫번째 부대를 지휘했고, 로지스의 제임스 스튜어트가 두번째 부대를 지휘했으며,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세번째 부대를 지휘했고, 로스 백작 휴 드 로스가 제번째 부대를 지휘했다. 스코틀랜드군이 언덕 근처에 이른 뒤, 양자는 상대방이 공격을 시작하기를 오래도록 기다렸다. 그러다가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다음날인 7월 20일에 베릭 성이 항복하는 걸 막기 위해 전투를 서두르기로 하고 전투를 개시하기로 결정하면서, 스코틀랜드군이 선제 공격에 착수했다. 그들은 고지 중간에 있는 습지 계곡을 건너 잉글랜드군 숙영지를 향해 할리돈 힐 측면으로 전진했다.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전진하는 스코틀랜드군을 향해 화살비를 퍼부었다. 스코틀랜드 전사들은 일반적으로 투구를 착용하지 않았거나 바이저(안면 보호대)가 없는 투구를 착용했기 때문에, 머리가 화살에 취약했다. 이 때문에 많은 스코틀랜드 장병들이 화살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고, 늪지대를 강제로 통과하고 고지에 올라가야 해서 속도가 느려졌고 대형도 흐트러졌다. 이윽고 스코틀랜드 선두 부대가 잉글랜드군 전선에 도착했을 때, 잉글랜드군 맨앳암즈들은 전열을 유지하고 긴밀한 대형을 갖춰서 흩어지고 지친 스코틀랜드군을 쉽게 격퇴했다.

짧은 백병전 끝에 스코틀랜드군이 허물어져 후방으로 도주하자, 발리올과 에드워드 휘하 하마 기사들이 후방에 있던 말에 올라타서 그들을 추격해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이때 로스 백작의 네번째 쉴트론은 전장을 우회해 베릭 성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다른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한 잉글랜드군이 사방에서 에워싸면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잉글랜드군은 해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 스코틀랜드군을 맹렬하게 추격해 학살을 자행했다. 스코틀랜드군은 8마일(13km) 동안 추격당해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로스 백작 휴 드 로스 및 여러 스코틀랜드 기사들과 함께 전사했고, 베릭 성은 7월 20일에 항복했다.

3. 가족


[1] Shiltron: 최전방에 창병이 있는 조밀한 원형 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