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ʻAkilisi Pōhiva아킬리시 포히바는 통가의 사회운동가, 정치인이다. 통가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서 제16대 총리를 역임했다.
2. 생애
1941년 4월 7일 통가의 하파이 제도, 파카카카이에서 태어났다.직업은 교사였고 사우스퍼시픽 대학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1984년 그는 정부를 비판한 이유로 교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로 인해 80년대말부터 통가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1]
1987년 그는 처음으로 선거에서 당선되어 통가 의회에 들어갔다. 1996년엔 왕실보다 의회에 먼저 보고했다는 이유로 수감되기도 했다. 통가 대법원이 해당 구금을 두고 헌법과 맞지 않다고 판결하면서 풀려났다. 2002년에는 자신의 소유 신문인 켈레아(Kele’a)에 왕실이 숨겨둔 재산이 있다고 보도해 선동 혐의를 받기도 했다. 이 혐의는 배심원단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7년에는 그 전해에 일어난 누쿠알로파(Nukuʻalofa) 폭동을 조장했단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런 와중에 2008년 통가 총선거에서 통가타푸1선거구에서 당선되어 8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시 통가 의회는 정원이 30명이었지만 귀족이 9명, 왕이 12명을 임명해 지역구에서 뽑는 인원이 9명 밖에 안 됐다.
2010년 9월에 포히바는 프렌들리 제도 민주당을 세웠다. 당시 민주화 운동 정당인 인권민주운동(Human Rights and Democracy Movement)의 일부가 참여했다.[2] 2010년 총선에서 프렌들리 제도 민주당은 3석을 더 얻어 12석이 되었다. 귀족과 무소속 등의 의석은 14석으로 감소했다. 통가 의회의 정원은 26명으로 감소했고, 지역구가 17석으로 증가했다.
당시 개헌으로 인해 처음으로 총리를 의회에서 선출하게 되었다.[3] 귀족파의 투이반코 경(Lord Tuʻivakanō)이 귀족파 14표를 얻어 총리에 취임했다. 포히바는 12석으로 패했다.
2014년 총선에서 프렌들리 제도 민주당은 9석으로 감소했다. 무소속이 8석을 얻고, 귀족대표는 9석을 유지했다. 무소속들이 대거 총리 투표에서 그를 지지하면서 2014년 12월 30일에 포히바는 통가의 16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2015년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을 비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동성결혼과 낙태 등의 논쟁이 벌어지면서 이를 철회했다. 감리교가 사실상 국교에 가까운 통가의 정치 지형상 어려웠다.
2017년 국왕인 투포우 6세가 국회해산을 하면서 치러진 총선에서 프렌들리 제도 민주당은 14석으로 단독과반을 확보했다. 포히바는 총리를 연임하게 되었다. 이 선거에서도 포히바는 통가타푸 1선거구에서 11선으로 재선되었다.
2018년에 폴리네시아인의 높은 비만율을 거론하며 국가정상들끼리 다이어트 내기를 하잔 얘기도 했다. 관련기사
2019년 총리 재임 중에 뉴질랜드 오클랜드 시티 병원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9월 11일 무렵에 폐렴 증상으로 오클랜드로 후송되었으나 다음 날 별세하였다. 뉴질랜드에 통가인 디아스포라가 많다 보니 오클랜드에서 열린 장례식에 2천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 뉴질랜드 총리였던 재신다 아던도 참석하여 추모하였다. 뉴질랜드 공군에 의해 시신이 통가로 운구되었고, 국가 추모일이 선언되었다.
프렌들리 제도 민주당 소속으로 포히바 정부에서 부총리를 지낸 세미시 시카[4]가 총리 권한 대행을 했다. 이후 재무장관인 포히바 투이오네오타[5]가 17대 총리로 정식 취임했다.
3. 가족관계
네오마이와 결혼하였다. 2018년에 네오마이는 세상을 떠났다.네오마이와의 사이에 1973년생 아들 포오이(Po'oi Pohiva)를 두었다.[6] 다른 자식이 있는지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았다.
2019년 보궐선거에서는 아들인 시오아시가 통가타푸 1구 선거구를 계승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비서를 지내다가 지역구를 물려받는 일이 매우 흔한 일본의 사례와 유사하다.
4. 여담
평민으로서는 두번째 총리이다. 2006년에 민주화 시위가 한창일 때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당시 국왕인 타우파하우 투포우 4세가 평민인 Hon. Dr. Feleti Sevele을 총리로 임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총리에겐 각료 임명권이 없었고 국왕에게 있어서 별 실권이 없었다.[1] 1905년 영국의 보호령이 됐던 통가는 1968년에 외교권과 국방권 등을 다시 되돌려 받았다. 1875년에 만들어진 헌법은 국왕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기에 20세기 말에는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성격이 되었다. 총리도 왕세자나 국왕의 친인척이 지낼 만큼 왕실과 귀족들에게 많은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거기에 타우파하우 투포우 4세는 민주주의에 부정적이었다.[2] 포히바도 이 당 출신이었다.[3] 그전에는 왕자가 총리를 맡기도 하는 등 왕실에서 임명했다.[4] 통가타푸 2선거구[5] 통가타푸 10선거구[6] 링크드인 프로필에 따르면 아버지의 비서를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