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안석응(安碩應) |
생몰 | 1891년 9월 25일 ~ 1936년 4월 12일 |
출생지 | 평안북도 의주군 서남면 |
사망지 | 만주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안석응은 1891년 9월 25일 평안북도 의주군 서남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2월 10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유여대는 선천에서 열린 평북장로회 노회에서 역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양전백으로부터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가 서울에서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가담하기로 했다. 유여대는 양실학교 교사인 김두칠과 정명채와 함께 거사에 대해 협의한 뒤 20여 명의 동지를 모아놓고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오는 대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때 회의에 참석한 안석응은 도청 등 관공서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임무를 담당했다.하지만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인쇄물이 도착하지 않자, 유여대는 차선책으로 일본으로 유학간 한인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를 임시로 등사해 쓰기로 했다. 이윽고 3월 1일 오후 2시, 유여대는 의주 읍내 서교회당 부근 공터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 등 700~800명을 모아놓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김병농 목사가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도록 하나님께 비는 기도를 드린 뒤, 유여대가 나서서 "이로부터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 식사(式辭)를 마치고 선언서를 낭독하려 했다. 이때 서울에서 인쇄한 기미독립선언서가 도착하자, 그는 그것을 낭독했다. 이후 안석응은 예정된 대로 도청 등 관공서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고, 시위대와 함께 만세 삼창을 외치며 행진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9월 1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에도 의주 지방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했고, 1928년부터 1929년 까지는 신간회 진천지부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만주로 망명했으며, 1936년 4월 1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안석응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88년에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그리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