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안토니오 사스트레 (Antonio Sastre) |
생년월일 | 1911년 4월 27일 |
사망년월일 | 1987년 11월 23일 (향년 76세) |
국적 | 아르헨티나 |
출신지 | 로마스 데사모라 |
포지션 | 인사이드 포워드, 라이트 하프 |
신체조건 | 177cm | 72kg |
소속팀 | CA 인데펜디엔테 (1931-1942) 상파울루 FC (1942-1946)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플라타 (1947) |
국가대표 | 34경기 6골 (1933-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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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사스트레는 1931년부터 CA 인데펜디엔테에서 뛰었지만 이때의 인데펜디엔테는 리그 준우승 이상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그러나 아르세니오 에리코와 비센테 데라마타가 팀에 합류하고 나서 인데펜디엔테는 당시 리그 최고 수준의 공격진을 갖출 수 있었다.인데펜디엔테는 그들의 활약으로 사상 첫 리그 우승을 포함해 2번 우승했고 사스트레는 팀에서 340경기에 출전할 동안 112골을 넣었다. 그러나 1942년, 사스트레는 인데펜디엔테와의 11년간의 동행을 끝내고 상파울루 FC로 이적했다.
상파울루에서 저는 빨리 적응할 수 없었어요. 브라질 언론은 팀이 오래된 트램, 녹슨 다리미라 불리는 본디(bondi)를 구입했다고 했죠. 팀은 처음 두 게임을 패했고 감독이 사임했어요. 그때 요레카(Lloreca) 감독님이 부임했고 저는 매일의 훈련과 경기에 집중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어서 감독님께 말을 걸었어요. 감독님은 일요일 점심 전에 직접 필드에 갈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음 경기에서 우리는 9대1로 이길 수 있었어요.
안토니오 사스트레. 상파울루에서의 초기를 회상하며.
안토니오 사스트레. 상파울루에서의 초기를 회상하며.
사스트레는 초기의 어려움을 딛고 상파울루에서 다시 힘을 냈고 1931년 이후로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이 없던 상파울루는 사스트레와 함께 한 5시즌동안 3번 우승을 차지했다.
사스트레는 1947년,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플라타에서 팀을 승격시키며 선수 생활을 마쳤다.
2.1.2. 국가대표
사스트레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34경기 출전 6골의 기록을 남겼다.지금같았으면 사스트레는 1934년 월드컵에 출전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지만 당시 아르헨티나가 2진급 선수들로 대회에 참가해서 사스트레는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아르헨티나의 불참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사스트레는 FIFA 월드컵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사스트레는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는 출전했고 아르헨티나는 1937년과 1941년, 두 번의 대회에서 우승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사스트레는 다재다능하고 축구 지능이 높은 선수였다. 그는 오늘날의 플레이메이커와 비슷한 역할을 주로 수행했지만 팀이 필요로 하면 어느 포지션에서도 뛸 수 있는 선수였다.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2회: 1938, 1939(CA 인데펜디엔테)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 3회: 1943, 1945, 1946(상파울루 FC)
- 프리메라 B 메트로폴리타나 우승 1회: 1947(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플라타)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4회: 1932 LAF, 1934 LAF, 1935, 1940(CA 인데펜디엔테)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준우승 1회: 1944(상파울루 FC)
4.1.2. 국가대표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 2회: 1937, 1941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35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