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 대한 평가를 서술한 문서.2. 상세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경력만으로 기억되지만 그는 이미 그 전부터 남미 리그를 평정하며 세계 축구의 정점에 있던 선수로, 페렌츠 푸스카스와 더불어 역대 최초의 월드 스타라고 할 만한 선수다. 30대가 다 돼가는 나이에 유럽으로 건너가 그때부터 유러피언컵 5연패를 이뤄낸, 요컨대 무려 20년 가까이 세계 축구계를 지배했던 선수로, 요즘으로 치면 호나우지뉴, 카카와 동시대에 데뷔해 지금까지도 메날두와 동급의 활약을 보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다. 또한 서른을 넘기고 발롱도르를 두 번이나 받은 선수는 지금까지도 디 스테파노와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뿐이며, 3표 차이로 스탠리 매튜스에 밀려 2위에 그쳤던 초대 시상식도 공헌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튜스에게 수상이 돌아갔을 뿐 실질적인 당시 유럽 최고의 선수는 디 스테파노였다.펠레, 디에고 마라도나의 등장 이후에도 디 스테파노의 평가는 현재의 펠마메처럼 펠레, 마라도나와 함께 TOP 3를 형성하고 있었다. 남미와 유럽 리그를 모두 평정했지만 FIFA 월드컵 경력이 없는 디 스테파노, 브라질 리그와 월드컵만 보면 최고라고 할 수 있지만 유럽 리그 경험이 없는 펠레, 남미에서도 유럽에서도 월드컵에서도 활약했지만 각각을 상대와 비교해보면 어딘가 다소 부족한 마라도나의 구도가 짜여졌기 때문이다. 또한 1989년 슈퍼 발롱도르도 디 스테파노가 크루이프, 베켄바워를 모두 제치고 수상했다. 정리하자면 21세기 이전까지는 크루이프보다도 우위였으나 21세기 이후 그리고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루이프는 둘째치고 베켄바워와 호날두에게도 다소 밀리는 형국이다.
다만 가장 앞 세대 선수라 경기력에 대한 자료 및 실제 경기를 본 사람이 거의 없고, 지독한 국가대표 불운으로 월드컵 활약이 부재하다는 이유로[1] 현재 그의 인지도는 다른 역대급 선수들에 비하면 상당히 낮다. 하지만 고작 A매치 30경기에 월드컵 0경기인 국가대표 경력을 가지고 이 정도 평가를 받으려면 어지간한 실력으론 어림도 없다. 클럽에서의 퍼포먼스와 커리어가 다른 선수들과 급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올드 축구인들은 커리어는 몰라도 개인기량은 펠레, 메시, 마라도나보다 디 스테파노가 떨어진다고 볼 수 없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고, 선수 생활 초기의 마라도나가 일명 '디 스테파노의 재림'으로 평가받았다는 점을 보면, 디 스테파노는 최고의 개인 기량을 가진 선수의 대명사였다. 따라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월드컵 활약이 전무하다는 한계가 있으나 그 한계를 가진 선수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선수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축구사를 상징하는 거물 중 하나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10위 안에 들어가는 레전드이자 이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활동한 인물이다.
3. 유러피언컵의 제왕
1955년, 드디어 유럽 대륙의 최강자를 가리자는 취지의 유러피언컵, 즉 현재의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격 대회가 시작된다. 축구 팬들은 스페인 무대를 먹어치워 버린 레알 마드리드와 디 스테파노가 유럽 전역에서 얼마나 통할지 기대 반 걱정 반의 시선을 보냈으나... 저승사자 군단의 유럽대항전 도전은 유러피언컵 5연패라는 전무후무한 성적으로 귀결되었다.그 중심에는 당연히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가 있었고, 디 스테파노는 1959-60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상대 해트트릭을 비롯해 5년간 결승전에서만 5경기 7골 및 5년 연속 골, 득점왕 2회 수상 등 미친 활약을 보여주었으니 그에게 발롱도르 2회 정도는 오히려 부족한 헌사였다.[2] 유러피언컵 통산 득점은 58경기 49골로, 라울 곤살레스가 깨기 전까지는 수십 년 동안 역대 최다 골 기록이었으며 경기당 0.84골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그 리오넬 메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도 높은 수치이다. # 여담으로 1960년 4월 21일에 열린 유러피언컵 준결승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의 유럽 대회 100호 골을 득점했는데, 상대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르셀로나였다.
게다가 그가 유럽에 온 것이 나이 27살 때였다. 즉 챔스 5연패의 전성기를 30대에 보냈다는 것이다. 지금도 30 넘으면 슬슬 에이징커브 걱정해야 하는데 하물며 그는 50년대 선수였으며 또한 당시 유러피언컵과 현재 UEFA 챔피언스 리그가 현재 클럽 축구계에서 최고 대회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대회가 정립되는 초창기 시절부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라는 슈퍼 스타의 미친 활약도 주요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그를 현대 클럽 축구의 아버지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UEFA 챔피언스리그가 생긴 지 70여년이 흐른 아직도 챔피언스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언급할때 먼 미래에 같은 클럽에서 활약하게 되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함께 최우선으로 뽑힌다.
4. 레알 마드리드 그 자체
그가 마드리드에서만 쌓은 커리어만 봐도 라리가 우승 8회, 코파 델 레이 우승 1회, 유러피언컵 우승 5회, 피치치 5회, 라리가 MVP 4회, 유러피언컵 득점왕 2회, 발롱도르 2회 등이다.특히나 레알 마드리드에서 기록한 스탯을 보자. 라리가에서만 282경기 227골을 넣었으며, 이런 저런 대회를 다 합치면 총합 307골이다. 이 307골은 2009년 말 라울 곤살레스가 경신하기 전까지 50여 년을 내려온 레알 마드리드 역대 최다 골 기록이었다. 전설이 전설을 계승한 것이다. 그를 빼놓고는 절대 레알 마드리드를 논할 수 없을 것이다.
현역 시절 엘 클라시코에서만 18경기 18골을 때려 넣으며 그야말로 바르셀로나 킬러로 군림하였다. 앞서서 디 스테파노가 레알 마드리드와 협상을 맺고 태업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 이유가,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확정된 이후, 특히 그 직후의 엘 클라시코에서부터 폭발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걸출한 공격수들이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거쳐갔음에도, 엘 클라시코 18골 기록은 오랜 시간 동안 깨지기는커녕 추격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독보적인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근 반 세기가 되어서야 그가 올랐던 반열에 오른 라이벌 팀 선수에 의해 깨졌다.[3] 그 이전에는 라울만이 어느 정도 근접했었다.
상술했듯 말년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명예 회장직을 맡았으며 그 영향력은 죽은 적이 없었다. 2010-11 시즌 끝자락에 라이벌 바르셀로나에게 떡실신당한 것으로 구단 내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쟤들이 더 낫네 이 한심한 것들아'라는 식의 일갈로 구단 프런트 및 선수단 모두를 데꿀멍시켰다. 심지어 말빨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주제 무리뉴 감독조차...
다만 요한 크루이프나 프란츠 베켄바워같은 이후의 천재들이 역시 각각 바르셀로나와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팀에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며, 클럽의 위기 때마다 평정을 유지하려고 하는 반면에 마드리드에서 그 역할을 해야 할 디 스테파노 옹은 되려 마드리드 팬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라 너무 팬들의 입장에서만 프런트 및 선수진을 대하다 보니, 무리뉴 감독 및 선수들과의 대립이 눈에 띄었던 편이다. 이런 점은 라이벌 바르셀로나의 요한 크루이프 역시 마찬가지인데, 크루이프의 이야기는 편견이건 고집이건 간에 자기 나름의 전술적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조금 다르다.
자기가 몸 담았던 팀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은 좋지만, 과거의 향수에 취해 현재의 모습을 자신이 활동하던 시기에 빗대어 끊임없이 깎아내리기만 하던 모습은 팬으로서나 제3자로서나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지라, 이 점에 대해서 적지 않은 논의가 있었다.[4]
5. 월드컵 불운
쥐스트 퐁텐도 언급했지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월드컵 본선에 단 한 번도 출장한 적이 없다. 그래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가 누구냐고 하면 펠레, 리오넬 메시, 디에고 마라도나를 주로 말하지만, 월드컵에서 뛴 적이 없는 선수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가 누구냐고 하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이름이 가장 먼저 언급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갉아먹은 이유가 되었다. 펠레가 유럽에서 뛴 적이 없다는 이유로 마라도나 지지자들에게 폄하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그런데 문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실력이 부족해서 못 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개 위대한 선수가 불운으로 월드컵을 못 나갔다고 하면 허약한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인 경우가 대부분인데,[5]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소속되었던 국가는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이고, 양쪽 모두 상급이거나 혹은 최상급 전력이었다. 본인의 실력 역시 그런 팀에서 주전으로 뛰기에 문제가 없었고, 적응기 따위 없는 건 국가 대표로서도 마찬가지여서 스페인 소속으로 치른 데뷔전에선 해트트릭을 기록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왜 못 나갔느냐 하면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운명의 여신이 디 스테파노를 미워해서 그렇다. 일단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프로 입단한 것은 1943년이었다.
- 1946년 월드컵: 제2차 세계 대전이 막 끝난 후 전 세계가 전후 복구에 여념이 없는 바람에 대회 자체가 날아가 아예 열리지도 못했다.
- 1950년 브라질 월드컵: 브라질과의 외교문제로 소속 국대인 아르헨티나가 불참했다. 1938년 월드컵 개최권 분쟁에 더해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분쟁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 1954년 스위스 월드컵: FIFA에서 디 스테파노의 출전을 금지했다. 당시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의 이중국적이었고, 이 직전까지는 어느 국적을 가지고 있든 출장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6]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부터 규정이 꼬이기 시작했고, FIFA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어느 국적으로든 월드컵에 출장하는 것을 막아버렸다. 어차피 아르헨티나는 1954년 월드컵 예선에도 불참했기에 FIFA의 규정이 아니었어도 월드컵 참여는 불가능했다.
- 1958년 스웨덴 월드컵: 이때는 1957년에 스페인 국적을 취득한 상황이어서 스페인 국적으로 참여하려고 했다. 디 스테파노는 전성기를 맞아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을 쓰고 있었고, 이 시기 스페인은 디 스테파노, 프란시스코 헨토, 바르셀로나의 레전드인 라슬로 쿠발라 등 최상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스페인이 유럽예선에서 스코틀랜드에 밀려 귀신 같이 탈락하고 16개국 본선에 진출 실패라는 이변이 일어났다.
- 1962년 칠레 월드컵: 이때에도 스페인 대표 팀의 전력은 최상이었고, 당시 나이 36세였던 디 스테파노는 마지막 불꽃을 태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페렌츠 푸스카스도 국가 대표팀에 속해서 '이번에는 정말...'이라는 생각뿐인 상황이었다. 유럽예선도 무난하게 통과해서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여 이젠 정말 경기에서 뛰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디 스테파노는 월드컵 본선 개막전 직전에 치른 경기에서 부상당한다. 결국 디 스테파노는 본선 경기에서 단 1분도 뛰지 못했다.
-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월드컵 직전에 40세였던 디 스테파노는 허리 부상을 당했고, 결국 그대로 은퇴했다.
1958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 실패를 제외하고 모두 디 스테파노 본인의 역량 문제가 아닌 외부 문제로 인해 월드컵 무대에 서고 싶어도 갈 수 조차 없었던, 축구라는 종목의 최초의 월드스타 플레이어에게 주어졌던 가혹한 운명이였다. 어찌 보면, 똑같은 아르헨티나 대표팀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디스테파노는 이런 저런 일로 그 뛰어난 실력으로 월드컵에 못 나간 반면, 하마터면 엔트리멤버에 못 올라갈뻔 하다가 동료 선수의 부상으로 겨우 들어가서 2022 카타르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 앙헬 코레아와 대조된다.
[1] 그 이유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월드컵 취소, 조국의 본선 진출 실패, 국적 문제, 부상 등 다양했다.[2]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 이야기가 이전에 적혀 있었는데, 펠레와 마라도나는 비유럽권 선수 제한 때문에 발롱도르의 후보도 될 수 없었다. 이후에 비유럽권 선수 제한이 풀리면서, 예전 선수들에게 명예상 개념으로 발롱도르를 수여했는데 이 수상자가 펠레와 마라도나, 그리고 황당하게도 이미 수상 경력이 있는 디 스테파노였다. 또한 1989년에 프랑스 풋볼에서 슈퍼 발롱도르를 제정해서 투표를 했는데 요한 크루이프와 미셸 플라티니를 제치고 디 스테파노가 이 상을 수상한다. 마라도나와 펠레는 각각 1996년, 2013년에 발롱도르 명예상을 수상한다.[3] 두 선수 모두 아르헨티나 출신에 스페인 국적도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4] 그러나 그가 바르셀로나만 만나면 박살을 내던 것도 사실이었고, 레알 마드리드 팬이던, 타 팀 팬이던 어떠한 관점에서 보아도 그 경기에서 바르셀로나가 압도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팀 레전드로써의 태도가 비판을 좀 받았을 뿐 해당 발언에 대해서는 아무도 제대로 반박을 할 수 없었다.[5] 발롱도르까지 받았음에도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한계로 번번이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던 조지 웨아,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라이언 긱스가 대표적이다.[6] 당시 디 스테파노는 콜롬비아 국적으로 콜롬비아 국가 대표 팀 경기에 4경기를 출장했으나 애초에 콜롬비아 리그가 FIFA에 제대로 가입도 되어 있지 않는 등의 사정이어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월드컵에 참여할 생각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