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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22 16:35:24

암다 세욘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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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mda_Seyon.jpg
15세기에 묘사된 암다 세욘의 모습

1. 개요2. 생애3. 매체

1. 개요

Amda Seyon I (그우즈어: ዐምደ ፡ ጽዮን ʿamda ṣiyōn, 암하라어: አምደ ፅዮን, '시온의 기둥')[제호], Gebre Mesqel (ገብረ መስቀል gäbrä mäsḳal)[이름]

암다 세욘 1세는 1314년부터 1344년까지 솔로몬 왕조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를 역임한 인물로, 메넬리크 2세와 함께 에티오피아 최고의 정복왕이다. 그는 거의 평생을 이슬람교도와 맞서 싸워 제국의 영토를 늘렸으며, 많은 에티오피아의 중세 연대기들이 그를 영웅으로 묘사한다. 이슬람에 대항한 그의 전방위적인 정복 활동은 당시 이슬람에 고립되어있었던 콥트 정교회의 위세를 크게 늘렸으며, 그가 죽은 후 이슬람 세력의 압박이 더 강해졌을 때도 에티오피아 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이 콥트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의 정복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사후 제위는 아들 뉴야야 크레스토스가 이어받았다.

2. 생애

파일:Ethiopian_1300.png
파일:Ethiopian_empire_under_Amda_Seyon.jpg
전임 황제 웨뎀 아라드 시절 강역(위)[3]와 재위 동안 그가 확장한 영토(아래). 그의 재위 동안 영토가 거의 두배로 늘어난 모습을 볼 수 있다.

연대기에는 그가 전임 황제 웨뎀 아라드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아버지의 첩과 결혼하는(...) 소동을 일으켜 교회로부터 파문 협박을 받았을 때 그는 뜬금없이 자기가 웨뎀 아라드가 아니라 그의 동생 퀘드마 아스가드의 아들이라 말했는데, 진실이 무엇인지는 약간 불명확하다.[4] 다만 학자들에 따르면 웨뎀 아라드와 그의 승계 부분이 부자연스러우며, 그가 어떻게 해서 황제가 되었는지 직접적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반란을 일으켜 그를 몰아내고 황제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근대에야 족보 주작은 워낙에 흔했으니 뭐...

어쨋든, 그는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되어 1316년, 고잠 지역 남부의 다못 지역의 이교도들에 대한 침공을 개시해 1317년 쯤에 복속시켰다. 이후 북부 티그라이와 인데르타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는데, 이 지방은 솔로몬 왕조의 시조인 예쿠노 아말락에게 복속된 이후에도 당시 그 지역 총독이었던 잉기다 이그지가 받았던 '파리채의 수호자'[5]라는 고대 악숨 왕국의 작위를 대대로 세습하며 북부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로 군림했다. 잉기다 이그지가 죽은 이후에는 후계자인 테스펜세 이그지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을 '나의 왕국'이라 부르는 거만한 행위를 한다거나, 또 그의 아들은 토지 서류에서 황제를 언급하지 않는 등 제국으로부터 은근히 독립을 꾀하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결국 반란이 일어났으나 반란에 동조한 귀족들과 군세를 모으는 데는 실패했는데, 황제는 이를 노려 반란에 동참한 영주를 먼저 살해하고는 이어 티그리아로 처들어가 반란군을 이기고 지역을 무력으로 정복, 그가 가진 칭호를 분할하고는 그다지 출신이 뛰어나지 않은 여러명에게 각각 수여했다. 이후 황제는 이 지역에 군정을 설치한 뒤 여제인 빌렌 사바를 총독으로 임명했으나 그녀가 간접적으로만 이 지역을 통치하자 다시 이 지역에서 불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고.[6], 결국 그의 아들 중 한명인 바르 세게드를 파견해 다스리게 하고는, 1328년에는 해양에 대한 통제권까지 부여했다.

이후 그는 하디야 왕국에 대한 정벌에 나섰다. 이유는 벨람이라는 이름의 무슬림 예언자가 하디야의 왕 아마노에게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지 말라고 해 그가 공물을 바치기를 거부한 것 때문이었는데, 이에 황제는 격노해 즉시 하디야로 쳐들어가 점령하고 약탈한 뒤 아마노 왕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으나 그 문제의 예언자는 이파트 술탄국으로 피신해 붙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복의 결과 아프리카의 뿔 지역 내륙의 통제권을 확립하고 이슬람 국가들에 대해 무역 우위를 차지한다는 황제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동부지역 이슬람 국가들의 주특기였던 노예무역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으며, 이는 후일 이슬람 국가들이 손잡고 그에게 대항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연대기에 따르면 다모트 북쪽의 고잠 지역에 대한 원정도 단행했다고 하는데, 이 전쟁의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이 지역에 존재하던 고잠 왕국은 제국에 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1320년쯤, 맘루크 술탄국의 술탄 알 나시르 무함마드가 콥트교를 믿는 신민들을 박해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사절단을 파견해 이에 항의하는 한편 박해를 중단하지 않으면 나일강에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협박했다. 술탄이 이 경고를 무시하는 바람에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나일강 유역에 사는 이집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데는 성공했다. 한편 사절단이 다시 수도로 돌아오던 중 에티오피아 동쪽의 이슬람 국가 이파트 술탄국에서 사절들을 억류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파트의 술탄은 그들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했으나 듣지 않자 죽이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암다 세연은 불과 7명의 기병을 이끌고 나가 술탄의 군대를 쳐부순 후 술탄 본인까지 전사시키고는, 이어 수도 이파트를 약탈하고 파괴해 많은 금은보화를 챙겼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이파트 술탄국의 전역을 돌며 파괴와 약탈, 방화, 살해를 지속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사실을 접한 주변의 무슬림 왕국들이 더이상 이슬람 국가에 대한 황제의 공격을 좌시하지 못하게 되었고, 동맹을 맺고 사방에서 황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제는 2월 14일, 그의 군대를 포위하고 공격한 10명의 무슬림 왕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슬람 왕국들의 목표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저번에 하디야에서 도망친 가짜 예언자 벨람이 새로운 이파트 술탄인 사바르 앗 딘에게 황제는 이제 몰락할 것이고 당신이 새로운 시온의 왕(즉 새로운 황제가 될 것이란 뜻이다)이 될 것이니 황제를 공격하라며 부추겨댔다. 또 아달과 모라 지역의 콰지(대주교와 유사)이자 해당 지역 사람들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가졌다는 사라라는 사람이 다른 무슬림 지도자들을 선동하며 황제에 맞설 것을 촉구했으며, 연대기에 따르면 황제에 대항하는 연합군 결성을 제안한 것도 그라고 한다. 아무튼 이런 선동의 결과 새로운 이파트 술탄도 마치 전임자가 그랬던 것처럼 황제에게 들어가는 공물을 중간에 갈취하는 등 계속해서 황제에게 시비를 걸어댔다.
이후 마침내 1332년 사바르 앗 딘이 정식으로 황제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전쟁을 일으키며 자신이 대신 에티오피아의 황제가 될 것이라 선포했다. 정확히는 온 에티오피아 사람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교회를 모스크로 바꾸거나 파괴하며, 시온의 왕으로써 그리스도교인들을 다스리겠다고 선언했다. 한편 황제와 그 부인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하도록 권유하지만 거부할 경우 자기 하인으로 삼겠다는 모욕도 했다. 이후 에티오피아 북부 지방에 자기 사람들을 영주로 임명하고는, 자신에게 가담한 데와로 지방 영주인 이슬람교도 하이데라와 함께 군대를 세 갈레로 나누어 다른 두 군단은 암하라와 앙곳으로, 자신은 세와를 정벌하러 떠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황제는 군대를 소집하고는 그들에게 금은과 좋은 옷들을 선물해 병사들을 달랬다. 그러나 적군의 위세에 싸우길 거부하는 병사들이 늘어나자, 할 수 없이 남은 병력만으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파트 지형의 험난함 때문에 또 탈주해 적군으로 도망치는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황제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는 적군 진지를 급습해 그들을 궤멸시키고는 이파트 수도까지 진격해 다시 한번 수도를 파괴, 약탈했다. 그러나 사바르 앗 딘이 도망치고는 항복을 거부하자 황제는 그를 잡을때까지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협박하자 할수 없이 항복했다.

신하들은 사바르 앗 딘의 처형을 요구했으나 그는 그 대신 그에게 호응해 반란을 일으킨 영주를 투옥하고는 그의 동생인 자말 앗 딘을 이파트 술탄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 직후 아달과 모라 지역에서 황제에 대항해 전쟁을 선포하는 바람에 황제는 그들과 또다시 싸워야 했다.

황제는 일단 구엣 마을로 가 그곳을 잔뜩 약탈한 다음, 현대 소말릴란드 지역에 위치한 딜호야 지역으로 가 그곳도 약탈했다. 그 이유는 이전에 그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황제는 데그위 지방으로 가 이전에 황제가 이파트 술탄국을 정벌한 이후 다른 이슬람 왕국에게 황제에 대항할 것을 선동한 바 있는 와르지(warjih)라는 이슬람 수도자를 죽였다. 그리고는 샤르카 지역을 초토화시키고는 그곳 영주 요세푸스를 투옥했다. 이런 일련의 정복 결과 에티오피아의 영역은 현대 에리트레아와 지부티, 소말릴란드 일부까지 미치게 되었다. 다만 연대기에 따르면 황제는 이 정복 이후 다시는 이 지역으로 가지 않았다고 하는데, 또다른 몇몇 지역 전승이나 연대기에는 황제가 아달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기록한다.

황제는 1320년대 내내 남부 지방의 무슬림 거주 지역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여 데와로, 사르카 지방을 정복하고 베일 술탄국과 아르바니 술탄국을 멸망시켜 제국 영토에 합병했다. 이 지역은 황제가 이파트 술탄과 전쟁을 벌일때 반란을 일으켜 이파트 술탄국과 연합을 시도했지만 모두 진압되었고, 가혹한 보복을 받았다. 이 지역은 이후 결국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1329년, 황제는 세미엔, 웨게라 등 홍해와 접한 북부 지방에 대한 원정을 단행한다. 이 지역에서는 유대교로 개종한 베타 이스라엘들이 한창 세력을 키우는 중이었는데, 티그리아 북부의 이슬람 세력도 정복할 겸 이들이 제국의 종교적 통일성을 해친다고 여겨 이들을 평정해 굴복시켰다. 이 원정의 결과로 에티오피아는 홍해의 통제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한편 이 원정 도중 아르메니아로 순례가는 중이었던 에워스타테오스라는 당대의 유명한 수도자를 만났다고 하는데, 그는 에티오피아 테와히드 정교회에서 시성한 인물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 한다.

3. 매체


[제호] [이름] [3] habesha는 에티오피아인이라는 뜻이다.[4] 여담으로 그는 그를 고소한 주교들을 구타하고 수도 밖으로 쫒아내 버렸다고(...). 성깔 하나는 있었던 듯하다.[5] 파리채라고 하니까 우스워보이지만 고대에는 파리채가 권위의 상징으로 쓰였다고 한다.[6] 이건 암하라인과 티그리아인과의 민족감정과도 연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