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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1 13:04:28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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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28b22><colcolor=#fff>
에티오피아 제국 자그웨 왕조 제12대 황제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
ተክለ ጊዮርጊስ
파일:TekleGiyorgisII.jpg
출생 1836년
에티오피아 제국 라스타
사망 1873년 6월 21일 (향년 37세)
에티오피아 제국 아바 가리마 수도원
재위기간 에티오피아 황제
1868년 6월 11일 ~ 1871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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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28b22><colcolor=#fff> 가문 자그웨 가문
이름 ዋግሹም ጎበዜ
Wagshum Gobeze
와그슘 고베저
아버지 와그슘 게브레 메딘
어머니 아이체쉬 테들라
배우자 딘키네시 메르하 (1815년–1907년)
종교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

1. 개요2. 생애
2.1. 혈통2.2. 즉위 전, 반란자 와그슘 고베저2.3.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 황제2.4. 몰락과 폐위

[clearfix]

1. 개요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 강렬한 전임자후임자에 묻혀서 유명하진 않지만, 마지막 자그웨 왕조 출신 에티오피아 황제이다.

2. 생애

2.1. 혈통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는 상당히 흥미로운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와그슘 게브레 메딘은 자그웨 왕조의 직계 왕손으로, 옛 자그웨 왕조의 중심지이던 와그 지역을 다스리는 공작이었다. 어머니 아이체쉬 테들라는 라스타의 공작인 데자즈마흐 테들라 하일루의 딸로, 솔로몬 왕조 곤다르 분가 출신이었다.[1] 데자즈마흐 테들라 하일루의 할머니가 백여 년 전 대대적인 군사 원정을 통해 와그 남쪽의 라스타 지방을 통일했고, 아이체쉬 테들라는 아들이 없는 테들라 하일루의 상속인이었다. 따라서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는 에티오피아 제국의 두 왕조인 솔로몬 왕조와 자그웨 왕조의 피를 모두 이은 것이다.

2.2. 즉위 전, 반란자 와그슘 고베저

그의 출생명은 와그슘 고베저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1836년 어머니가 다스리는 라스타에서 태어난 것 말고는 별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처음 나오는 때는 1858년, 아버지의 사망이다. 아버지인 와그 공작 와그슘 게브레 메딘은 테워드로스 2세에게 대항하기 위해 몰래 북부의 군벌 아그웨 니구세와 .동맹을 타진했는데, 이것이 테워드로스 2세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와그슘 게브레 메딘은 즉각 토벌당했고, 수도로 끌려가 심문받았다. 이후 데브레 제비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처형당했다. 따라서 아들 와그슘 고베저가 와그를 상속받았다. 이윽고 6년 후, 테워드로스 2세 황제는 지지도가 크게 떨어져 온갖 반란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와그슘 고베저도 반란의 기치를 올렸다. 그의 반란군은 에티오피아의 수많은 반란군 중에서도 손에 꼽게 강대했다. 실제로 와그슘 고베저는 1867년에 옛 수도 곤다르를 함락시키기도 했다. 이후 1867년 말에 수도 마그달라로 진군하다가, 수도권인 베겜데르 일대로 남하한 월카이트의 반란군 티소 고베저와 충돌했다. 이들이 맞붙은 크윌라 전투에서, 와그슘 고베저는 티소 고베저를 전사시켜 자신의 힘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1868년 앵글로-아비시니아 전쟁이 벌어졌을 때 와그슘 고베저는 티그레이의 카사 메르하, 셰와의 메넬리크와 함께 영국에 협력을 약속했다. 마침 테워드로스 2세는 오로모인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전장에서 마그달라까지 회군하는 길이 와그슘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유격전을 벌이면서 황제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테워드로스 2세가 수도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데는 실패했다.[2] 테워드로스 2세 사후에는 영국군에게 테워드로스 2세의 포병 장비를 넘겨 받았다.

2.3.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 황제

황제가 급사하고 제위가 비자 제국 내의 유력자들 가운데에 눈치 게임이 벌어졌는데, 이때 와그슘 고베저는 발빠르게 칭제하였다. 6월 11일에 칭제한 후 정교회 교단에 접촉하여 관계를 형성했고, 그 해 8월에 와그 지역의 중심지 소코타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제관을 받았다. 즉위명은 테클레 기요르기스로, 테클레 기요르기스 1세 황제의 이름을 딴 것이다. 테클레 기요르기스 1세는 솔로몬 왕조 곤다르 분가의 마지막 황제였는데, 와그슘 고베저의 어머니가 그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총대주교좌가 공석이었기 때문에[3] 에체게라는 고위 주교에게 제관을 받았다. 대관식 후 아버지가 처형당한 곳인 데브레 제비트에 가서 제관을 쓰는 의식을 거행해 원수를 갚았음을 선언하기도 했다.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 황제가 처음으로 진행한 정책은 곤다르 복구였다. 곤다르는 유서 깊은 에티오피아의 수도로, 오랫동안 솔로몬 왕조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황권이 약화되면서 곤다르라는 도시의 세도 줄었고, 판관의 시대 말기에는 명분만 남은 소도시 꼴이었다. 실제로 전임자 테워드로스 2세는 아예 곤다르를 수도로 삼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는 모계의 솔로몬 왕조 곤다르 분가 혈통을 주요한 명분으로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의 혈통을 강조하기 위해 볼 것도 없이 곤다르를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곤다르를 복구했다. 옛 파실리데스 황제의 성 등의 유적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 당대 에티오피아의 한 연대기 작가는 파실리데스 황제 이후 곤다르에 이리 신경 써준 황제는 처음이었다고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황제는 황권 강화를 위해 정교회가 손잡으려 했다. 그래서 곤다르를 복구하며 곤다르 내에 수많은 교회를 지었으며, 테워드로스 2세의 개혁 정책으로 인해 압수, 분배된 교회의 토지를 돌려주었다. 또 총대주교 아부네 살라마 3세의 장례를 새로이 성대하게 치러 주기도 했다. 이러한 곤다르 복구와 친교회 정책으로 그는 확고한 교회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황권 강화를 위해서, 황제는 지역 귀족들과의 관계를 조절하기도 했다. 우선 고잠의 총독을 자신과 친한 솔로몬 왕조의 인물 라스 아달로 교체했다. 그리고 라스 아달에게 여동생 워이제로 라체흐를 결혼시켜 고잠 지역의 지지를 확고히 했다. 또 셰와 왕 메넬리크의 사촌여동생 워이제로 티세메와 자신의 이복동생 하일루 월데 키로스를 혼인시켰다. 결정적으로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 본인은 티그레이 왕 카사 메르하의 여동생 딘키네시 메르하와 결혼했다.

2.4. 몰락과 폐위

하지만 상술한 정책 중 그 무엇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카사 메르하와 메넬리크는 호시탐탐 제위를 노렸다. 카사 메르하는 영국 장교 존 커크햄을 군사 고문으로 삼고 영국군이 주고 간 무기를 보급해 군대의 서구화를 착착 진행했고 1870년에는 해로를 뚫어 유럽 국가들과의 교류를 재개했다. 메넬리크는 야망을 숨기지는 않았지만 당장 거병하지는 않고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와 카사 메르하가 싸우게 두며 어부지리를 취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시간적, 자금적 여유를 셰와의 서구화에 쏟아부었다.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는 적의를 거두지 않는 카사 메르하가 두려워졌고, 그가 더욱 강해지기 전에 짓밟으려 했다. 황제는 메넬리크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단독 군사만 이끌고 1871년 초에 티그레이로 북진하여, 6월 1일에 타카체 강을 사이에 두고 카사 메르하의 군대와 조우했다. 이들은 한참 동안 서로 기싸움을 벌이다, 카사 메르하가 먼저 타카체 강을 건넜다. 양군은 6월 21일에 타카체 강 남안의 마이콜루에서 만나 마이콜루 전투를 치렀다. 양군의 전력차는 제법 컸는데,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 진영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소 6만 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한 반면 카사 메르하는 1만 2천 명의 군대를 데리고 왔다. 하지만 양군의 차이점은 서구화 개혁으로,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의 군대는 대다수가 머스킷과 창, 활로 무장한 반면 카사 메르하의 군대는 완벽히 서구화되었고 12문의 대포를 갖고 있었다. 이런 양군이 맞붙은 결과는 충격적으로, 카사 메르하는 황제를 압도했다. 심지어 전투 중에 존 커크햄이 직접 이끄는 800명의 보병대가 수 천명의 적군을 무찌르기도 했다. 패배한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는 황급히 퇴각하려 했으나, 카사 메르하는 기동전을 벌여 아드와에서 퇴각하는 황제군을 막아서고 포위했다. 이 1871년 아드와 전투[4]에서 황제군은 전멸했다. 포로만 2만 4천 명이 나왔고 그 외의 병사들 중 멀쩡히 도주한 이는 거의 없고 대부분 죽거나 다쳤다.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 역시 싸우다 생포당했다.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는 즉시 폐위되었다. 그리고 실명당한 후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아드와에 있는 아바 가리마 수도원에 연금되었다. 그를 폐위시킨 카사 메르하는 칭제했고, 1872년 1월 21일에 대관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했다. 즉위명은 요하네스 4세였다.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는 실명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과 몰락으로 인한 심적 고통으로 앓다가 1873년에 수도원에서 쓸쓸히 사망했다. 자식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그의 아내 딘키네시 메르하는 요하네스 4세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에 별 일 없이 재혼했다. 재혼 상대는 라스 월데 키로스라는 귀족이었다. 요하네스 4세가 즉위 전에 사별한 후 재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았으며, 이것이 인정받아 죽을 때까지 황후 호칭을 유지하며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1] 솔로몬 왕조는 역사가 무척 길어서 가문원이 매우 많았다. 하지만 모두들 솔로몬 성씨를 썼기 때문에 지역별로 수많은 분가가 생겼다. 곤다르 분가는 비교적 본가라고 할 수 있는 분가이다.[2] 이후 테워드로스 2세는 수도에서 영국군을 맞아 싸우다 패배가 확실해지자 권총 자살한다.[3] 전임 총대주교였던 아부네 살라마 3세는 1867년 말에 병사했다.[4] 훗날 벌어지는 저 유명한 아드와 전투와 구분하기 위해 1871년 아드와 전투로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