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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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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가이자 잉글랜드의 전 축구선수에 대한 내용은 앨런 스미스(196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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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파일:Alan Smith.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앨런 스미스
Alan Smith
출생 1980년 10월 28일 ([age(1980-10-28)]세)
잉글랜드 웨스트요크셔리즈 로스웰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 체중 75kg
직업 축구선수 (미드필더, 공격수 / 은퇴)
축구코치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7~1998 / 유스)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8~200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4~2007)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07~2012)
밀턴킨스 던스 FC (2012 / 임대)
밀턴킨스 던스 FC (2012~2014)
노츠 카운티 FC (2014~2018)
지도자 노츠 카운티 FC (2014~2018 / 플레잉 코치)
노츠 카운티 FC (2017 / 감독대행)
국가대표 19경기 1골 (잉글랜드 / 2001~2007)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의 축구선수 출신 코치. 그 유명한 리즈시절의 주인공이다.

2. 클럽 경력

2.1. 리즈 유나이티드 FC

파일:Alan-Smith-Leeds.jpg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데뷔. 리즈 유나이티드 유스 출신이며 18세에 리그에 데뷔하면서 팀 내 최고 유망주로서 많은 기대를 받았다. 2000-01 시즌에 주전 공격수인 마이클 브릿지스마크 비두카와 함께 공격라인을 형성하였다. 당시 데이빗 오리어리 감독은 스미스를 투톱의 공격수, 오른쪽 윙포워드 등으로 사용하면서 활동량에 강점을 둔 스미스를 공격자원으로 적극 활용하였고, 2001년에는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촉망받는 공격수였다. 하지만 리즈가 망해가면서 공격수와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오른쪽 윙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분투하지만 결국 팀의 강등을 막지는 못하였다.

리즈가 2부 리그로 강등된 이후, 에버튼이나 리버풀 등의 많은 구단들이 스미스에게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특유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와 상남자 태클 플레이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눈에 띄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했으나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1]

2.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이적 후 프리시즌에 판니스텔로이와 루이 사하를 백업해 줄 공격수로서 그리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으나 영입한지 몇 달도 되지 않아 웨인 루니가 맨유에 영입되고[2] 그는 더이상 공격진에 포함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뤼트 판니스텔로이는 부동의 주전이었으니. 사이드로 가자니 라이언 긱스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쌍벽은 이미 굳건했고, 후반에도 올레 군나르 솔샤르의 노련함을 이겨낼 수 없었다.

로이 킨의 노쇠화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퍼거슨 감독은 그의 투지를 눈여겨보고 수비형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시켰고 이후 나름 적응하나 했지만 투지만 보여줄 뿐 부실한 수비력에 위험한 태클이나 일삼아 실패로 끝났다. 사실상 자신의 플레이와 팀 전술이 맞지 않아 발전이 멈추는 단계였다. 물론 잘했던 경기도 몇 번 있었다. 맨유가 첼시를 상대로 홈에서 1:0승리를 거둘 당시, 앨런 스미스는 4-4-2를 쓰는 자신의 팀이 마케렐레-램파드-에시앙의 3미들 중원을 압살하는 데 공헌했다. 하지만 잠재력을 보였던 상황에서 불행히도 EPL 역사상 끔찍한 부상 BEST 10 안에 들어갈 부상을 입고 거의 1년간 그라운드에 서지 못하게 된다. 05-06 시즌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당대 EPL 최강의 파워키커 중 하나였던 욘 아르네 리세의 프리킥을 막다가 그 공에 왼쪽 발목을 맞은 뒤 착지하는 과정에서 골절 및 탈구 부상을 입은 것이다.[3] 당시 부상 부위를 본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내 생애 본 부상 중 가장 끔찍한 부상이었다"라고 언급했을 정도였다.[4]

그 후 꾸준한 재활을 거쳐 다시 복귀했다. 원 포지션인 스트라이커로 다시 활약했으나 결국 맨유의 주전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고, 당시 선수 사느라 바빴던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2.3.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뉴캐슬에선 꾸준히 주전으로 출장하였으나 30여경기를 출장하며 단 1골도 기록하지 못하는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5]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성년자 성매매에 연루되면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2부리그로 강등당한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뛰면서 팀의 승격을 위해 노력한 결과 결국 뉴캐슬은 한 시즌 만에 다시 1부리그로 복귀했다.

하지만 EPL 복귀 이후 뉴캐슬에서의 출전시간은 점점 줄어갔으며 팀내 새로운 경쟁자들의 영입으로 잉여롭게 있다가 결국 2010-11 시즌 종료 후 방출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차기 행선지는 2부 리그로 강등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가 유력시 됐다.

다만 본인은 남은 기간인 2012년 까지 팀에 남으려 하고 있기 때문에 뉴캐슬의 팬들은 그의 훌륭한 멘탈과 충성심 등을 미루어 보아 잉글랜드의 줄리우 밥티스타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중이다.

결국 시간은 흘러 계약기간 만료를 6개월 앞둔 2012년 1월 현재 완벽한 잉여 취급을 당하고 있다. 경기를 뛰고 싶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내보냈는데 여기서 앨런 파듀 감독로부터 '못 뛰는 이유는 니가 더 잘 알텐데?"라는 예리한 디스를 당한 것으로 알려져 과거의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다. 더군다나 '지금 은퇴하면 코치 자리 정도는 알아봐 주겠다"라는 말로 확인사살까지 당했다고 한다. 지못미.[6]

2012년 1월에는 리즈 유나이티드로의 임대설이 돌았고 실제로 리즈 임대에 근접하기도 하였으나 구단간 주급 분담 및 선수의 주급 삭감 문제[7], 그리고 스미스의 건강 문제로 인해 리즈 유나이티드 임대는 파투가 났다.

2.3.1. 평가

최초 영입시에는 키어런 다이어의 공백을 매워줄 섀도 스트라이커 정도로 큰 기대를 받았으나 리즈 시절에도 "공격수 치고는 안 좋은 편"이라는 평을 들었던 득점력이 점차 부상과 무리한 포지션 변경으로 인해 "'축구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까지 퇴보했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뉴캐슬의 감독들은 그의 최전방 기용을 포기했다.

준수한 수준의 공격수들을 보유했던 맨유에서는 투지나 활동량은 괜찮은 편인 스미스가 최전방에서 나름의 장점을 활용하여 1인분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장점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던 뉴캐슬에서는 잉여의 왕이 되어버렸다.

결국 몇 경기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수비형 미드필더로 전업하고 있으며, 최근 몇년간 뉴캐슬의 중앙 미드필드진에 구멍이 뻥뻥 뚫린 관계로(수미 포지션에 실질적인 경쟁자가 노쇠한 니키 버트밖에 없는데다가 부상으로 인한 자동 로테이션 여파도 있어서) 굉장히 많은 출전수를 올렸다. 하지만 절대로 잘해서 계속 나오는게 아니었다. 뉴캐슬 팬들은 앨런 스미스라는 선수에 대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평을 내린다.

한마디로 뉴캐슬 팬들의 평은 최악. 심지어 해외 포럼에서는 심심치않게 "스미스를 수미로 두느니 10명으로 게임하겠다."라는 평이 나올 정도다. 케빈 키건 감독은 스미스를 쓰지 않기 위해 수비수 다비트 로제날을 억지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전향시키기도 했고, 조 키니어 감독은 어쩔수없이 노쇠한 버트를 매주 기용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으나 결국은 대체 옵션 부족으로 인하여 스미스는 계속, 꾸준히 경기를 뛰었고, 뉴캐슬 팬들의 주름살은 늘어만 갔다. 그가 부상을 당하면 뉴캐슬 팬들이 환호성을 지른다는 점에서 이미 과거의 3B와 동일한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3B는 어찌저찌 다른 클럽에 이적해서 셀레스틴 바바야로를 제외하고는 갱생에 성공했으나 스미스는 입질조차 안들어와서 팔지도 못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하다.

2009-10 시즌, 뉴캐슬의 강등 이후 첫경기에서 스미스가 주장 완장을 달고 출장하자 전세계의 뉴캐슬 팬들은 절규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시즌 중간에 부상을 당하면서 전력에서 이탈했고, 시즌 중반을 넘어서 크리스 휴튼 감독이 버트와 스미스를 모두 배제하기 위해 "차라리 수미없이 뛰자"라는 용단을 내리면서 뉴캐슬은 무패행진을 이어나가기 시작했고 오히려 실점률도 낮아졌다. 그 이후 2010년 여름, 뉴캐슬이 코트디부아르의 걸출한 수비형 미드필더 셰이크 티오테를 영입하면서 1군에서 자취를 감췄고, 모든 뉴캐슬 팬들은 감동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티오테의 경고누적으로 2010년 11월 20일, 스미스는 볼턴 원더러스 원정경기에서 선발출장하게 되었고 뉴캐슬은 5-1로 패했다.(이청용도 득점했다.)

주급은 6만 파운드, 그리고 2007년 4월 10일 UEFA 챔피언스리그 AS 로마전 이후 3년 7개월간 공식전 골이 없다. 그리고 2011년 1월 2일, 위건과의 1-0 원정 승리에서 후반 교체출전하면서 대망의 100경기 무득점 기록을 경신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은 실력도 어느 정도 있었고, 투지와 근성, 그리고 팀에 대한 헌신도가 지극히 높았던 점을 들어 어느 정도 애정있게 기억하는 경우도 있지만, 뉴캐슬 팬들에게는 암적인 존재였다.[8]

2.4. 밀턴킨스 던스 FC

리즈로 가지 못한 대신 잉글랜드 3부리그 팀인 MK 돈스로 임대를 가 그럭저럭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며 부활의 조짐을 보였지만, 시즌 종료후 끝내 뉴캐슬과 재계약을 맺지 못한채 MK 돈스로 완전이적했다. 이 시즌 qpr에서 뛰는 박지성과 컵대회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는 감격의 재회를 하기도 했다.

2.5. 노츠 카운티 FC

밀턴킨스 던스 FC에서 활약한 뒤 2014년부터는 리그 1의 구단인 노츠 카운티[9]로 이적, 플레잉코치로 뛰었다. 2015년 5월에 팀 동료인 로이 캐롤[10]과 함께 1년 연장 계약을 맺은 것을 보니 2015-16 시즌에도 볼 수 있을 듯.

2017년 1월 3일, 노츠 카운티의 존 셰리든 감독이 경질되면서 감독대행을 맡게 되었다. 기사 감독대행으로 1경기 1패의 성적을 거둔 후 뉴캐슬 시절 동료였던 케빈 놀란이 감독으로 부임하며 다시 플레잉코치로 돌아갔다. 놀란이 예전 동료 숄라 아메오비까지 영입하며 맥파이스 동료 3명이 다시 맥파이스로 재회했다.[11]

2017-18 시즌이 끝난후 은퇴했다.

3. 기록

3.1. 대회 기록

3.2. 개인 수상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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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cdn.images.dailystar.co.uk/253301_1.jpg
데이비드 베컴 이후 잉글랜드 축구 꽃미남 라인에 감히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맨유에서 뉴캐슬로 이적할 당시 뉴캐슬의 여성 팬클럽 회원수가 급증했다고 한다. 또한 맨유가 한국을 방문할 당시 여성팬들이 그를 보고 하악대는 걸 보고 영국 기자들은 놀라워 했다고 한다.

존 테리, 스티븐 제라드와 동갑이다.

동명이인으로 축구선수 출신 방송인인 앨런 스미스가 있다. 영어 철자까지 동일하고 포지션도 같아서 헷갈리기 쉬운데, 이 분은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레스터 시티와 아스날에서 활약하였던 선수 출신이다. 그리고 선수 시절에는 아스날에서 두 번의 영국 1부리그 득점왕과 두 번의 리그 우승, 그리고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이끌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아스날의 레전드로 손꼽힌다. 피파 12 이후 피파 20까지의 해설을 담당하고 있으며, 각종 해외축구 관련 기사에서 전문가로 등장하는 경우는 대부분 이 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는 본의아니게 삼각관계가 되어버렸다. 호날두가 순수했을 시절, 파티에서 제마 앳킨슨이라는 유명한 글래머 배우에게 첫눈에 반해서 연락처를 따고 사귀게 되었다. 제마 앳킨슨은 호날두 때문에 경기장에 가보겠다는 멘트를 언론에 흘리며 전형적인 스포츠 스타-연예인 커플의 탄생을 알리는가 했다.

하지만 뉴스 오브 더 월드에서 폭탄이 터졌다. 폭로하길 앨런 스미스와 제마 앳킨슨이 사실은 섹스파트너로서 관계를 맺어왔다고 대문짝만하게 보도한 것.

제마 앳킨슨은 호날두에게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였지만 이후 사건의 전개는 뉴스보도를 사실로 믿을수 밖에 없는 전개가 되어버렸다.

앨런 스미스가 쫒겨나듯이 딴팀으로 이적하고 호날두는 루이스 나니 등 신입들을 축하한다면서 콜걸들을 불러서 섹스파티를 연것. 그 이후로 제마 앳킨슨은 더이상 호날두랑 연락안한다는 말을 하였다.

즉, 사건을 해석하자면 호날두는 부모의 반대로 9살 연상의 이혼녀와 첫사랑에 실패한 후에 오랜만에 사랑을 느끼고 제마 앳킨슨을 만났으나 언론에 의해서 그가 같은 팀 동료와 섹스파트너 관계였다는 걸 알게 된 호날두는 앨런 스미스에게 진실을 물어보게 되고 앨런스미스는 결국 사실대로 말하게 된다. 이에 호날두는 그동안 말하지 않은 앨런 스미스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다. 맨유에서는 팀 케미스트리를 고려해 팀의 미래인 호날두를 선택하고 앨런 스미스를 결국 방출하듯이 딴팀으로 보냈다.

리즈 유나이티드 팬들에게 있어서는 해리 키웰 등과 더불어 최악의 인물이 되었다. '장미전쟁'으로 알려질 정도로 극악한 사이인 맨유로 이적한 게 가장 큰 이유이다. 특히 출생지도 리즈였고 리즈 유스팀에서 성장했고 리즈시절 리즈 올해의 영 플레이어 상을 2회 수상할 정도로 팬층의 지지가 두터웠던 인물이기에 그런 선수가 맨유로 이적한다는 것만으로도 팬들에게는 커다란 멘붕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12] 그 당시 팬들의 멘붕이 얼마나 심했는지 맨유로의 이적뉴스가 뜨자 일부 팬들이 스미스의 집을 습격하고 갔을 정도.
그러다보니 뉴캐슬에서 잉여잉여거릴 당시 리즈 유나이티드로의 임대설이 돌 때도 팬들의 반응은 매우 좋지 않았던 편이었다. 아무리 유다취급 받는 선수였다지만 그래도 '와서 팀에 도움이 된다면...' 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하기도 했던 선수이기도 했고, 맨유로 갈 당시에 '내가 32세였으면 리즈에 남았겠지만 23세이다보니 리즈를 떠나야 한다. 대신 언젠가 다시 리즈로 돌아오겠다' 라는 인터뷰를 했던 선수가 기껏 고향팀으로 돌아오려고 협상할 때는 임대 주급협상에서 파토를 내 버려서 리즈 팬들의 뒷통수를 두번 쳤으니.

암튼 상술했다시피 수려한 외모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그라운드에서는 "깔끔함", "예쁘장함"과는 거리가 먼 투사형 선수였으며 그 우직한 플레이스타일 때문에 맨유 팬들에게는 애증의 대명사다. 잘해줄 때는 그럭저럭 평타는 쳐 주었지만 가끔씩 삽풀 때는 그야말로 미친듯이 까고 싶게 만들었기 때문.

그러나 지금도 맨유 팬들에게는 은근히 안까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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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경이 되면서 까지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4.1. 리즈시절?

이 선수가 한국에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리즈시절이라는 용어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박지성 맨유 이적 후 해외축구를 보기 시작한 (당시의) 뉴비들이 올드비 행세를 하기 위해 "앨런 스미스 리즈 시절 ㅎㄷㄷ"이란 말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리즈 시절이라는 유행어를 낳은 것. 더불어 리즈가 한 때는 잘 나갔지만 한 순간 몰락했다는 팩트까지 널리 퍼지면서 여러 의미로 리즈 시절이라는 단어가 옛 광명을 뜻하는 유행어로 고착됐다.

자매품으로는 '그래도 아직은 호아킨이죠'도 있지만 리즈시절의 포스가 워낙 강해서 묻혀버렸다.

자세한 것은 리즈시절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 스미스는 리즈시절이라고 해도 딱히 후덜덜하다고 할정도로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 다만 기량이 매우 돋보이는 유망주였는데, 그렇게까지 좋은 기록을 남긴 것은 아니라서 이걸 전성기로 쳐야 할지도 애매하다.[13] 결국 올드비들에게 리즈시절이란 용어는 우스갯소리로 쓰이게 되었다.


[1] 리즈와 맨유는 앙숙 중 앙숙이라 리즈 팬들은 스미스를 유다라고 칭하며 향후에도 많은 야유를 보냈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당시 엄청난 재정난에 허덕이던 리즈에게 스미스의 이적료를 선금으로 전부 지불하겠다고 제시한 유일한 구단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즉 스미스 입장에서는 맨유로 가지 않으면 리즈가 파산하는 꼴이 된 셈이다. 물론 본인이 인터뷰에서 "난 기필코 맨유에서는 안 뛴다"라고 말을 한 게 있어서 스미스도 할말이 없긴 하다.[2] 루니의 영입 과정에 걸쳐 스미스가 본의 아니게 굴욕을 겪은 에피소드가 있다. 2004-05 시즌 초반 맨유는 심각한 빈공에 의한 부진을 겪게 되고, 심지어 관중석에서 '제발 루니 좀 영입해 주세요'(Please buy Rooney)라고 피켓을 든 소년이 유명세를 탔을 정도이다. 이후 진짜 루니가 영입되고 소년은 퍼거슨과 루니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게 되는데, 그 소년이 셔츠에 마킹한 등번호가 다름 아닌 달랑 몇 달 전에 영입된 공격수 앨런 스미스.#[3] 발목이 거의 두 동강 난 상태였다고 한다. 예전에 아스날 선수였던 에두아르두 다 실바의 부상과 유사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당연하지만 공이 아무리 세다 하더라도 공에 맞은 걸로는 발목이 두동강나지는 않는다. 강하게 맞은 후 착지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것이다.[4] 이 부상 때문이었을까? 06-07 시즌 리그 우승을 한 맨유는, 우승 메달 수여에 필요한 리그 출전 횟수(10경기 이상 출전, 현재는 5경기로 완화)를 채우지 못한 스미스에게 프리미어리그 우승 메달을 줄 수 있게 해달라고 FA에게 요구했고, FA는 승낙했다.[5] 스미스는 뉴캐슬에서 공격수로 활약한 경기가 몇 안된다. 이미 샘 앨러다이스 감독은 스미스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쓰기 위해 영입했고 지금에 이르러 이젠 완전히 미드필더로 전업한 상태나 다름없다. 물론 아래 항목에 나오듯이 부진한 건 맞다.[6] 하지만 스미스를 팔리지도 않는 주급 도둑 정도로 생각하는 뉴캐슬 팬들로서는 오히려 파듀 감독의 이러한 말이 통쾌하다라는 평가도 있다. 본인이 자초한 면도 있지만 여러모로 정말 슬픈 커리어의 선수다.[7] 주급 6만 파운드 중 뉴캐슬이 45000파운드를 부담하고 리즈가 6000을 부담, 나머지는 스미스가 주급을 자진삭감하는 형태로 팀간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당연하게도 스미스가 거절했다.[8] 로이 킨에게 "키노게이트"라고 불리는 사건에서 엄청나게 까인 후, 바로 다음 경기인 첼시전에서 미친듯한 허슬플레이를 선보이며 팀의 승리에 지대한 기여를 했고, 경기 최우수선수로 뽑혔다.[9] 14-15 시즌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며 풋볼 리그 2 로 강등.[10] 에드윈 반 데 사르가 오기 전까지 팀 하워드와 함께 맨유에서 뛰던 예능형 골키퍼로 유명했다.[11] 뉴캐슬과 노츠는 유사한 흑백 줄무늬 유니폼을 가지고 있어(정확히는 뉴캐슬이 노츠의 유니폼에 영향을 받았다.) 공히 맥파이스(까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12] 하지만 맨유로 이적할 수밖에 없얶던 이유는 한푼이라도 급전이 필요했던 리즈 파산 당시에 스미스의 이적료를 유일하게 일시불로 질러준 팀이 맨유밖에 없었기 때문인 것도 있다.[13] 리즈시절 부분 반론에 나와있지만 스미스의 실제 능력에 비해 외모나 경기의 임팩트 때문에 좀 더 고평가되어 있긴 하지만 03-04까지는 충분히 잉글랜드 최고 수준의 유망주였다. 문제는 비슷한 스타일이면서 모든 면의 상위호환급이던 웨인 루니가 등장하면서 잉글랜드 국가대표급 유망주라는 위상이 완전히 가려져버린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