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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6 11:46:32

야마가타 아리토모(성군 순종대왕 일대기)

1. 개요2. 작중 행적3. 기타

1. 개요

성군 순종대왕 일대기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야마가타 아리토모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2. 작중 행적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카오루와 함께 조슈 3걸의 일원으로, 셋 중에서 가장 극단적이고 과격하며 군국주의적인 인사로 유명하다.

1882년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보고를 듣고 처음에는 일이 잘 풀리는 건가 생각해서 김칫국을 마시지만, 곧바로 이노우에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정정하자 진정한다. 이노우에가 직접 조선에 가서 알아보겠다고 하자 다른 번 세력들 견제하느라 힘든데 지금 너까지 빠지면 곤란하다고 만류하고, 조선에 숨겨진 흑막이 있더라도 흑막 정치는 일본의 특기라고 자신감을 보이면서도 반대 세력이 조슈 독재, 군벌(軍閥)이라고 욕하는 걸 듣고 내심 찝찝해한다. 이 와중에 이노우에에게 섹드립을 듣고 개소리 하지 말라며 욕 한사바리를 갈긴다.

조선에서 군제 개편을 위한 군사고문단을 요청하자 이전에 자신과 갈등을 빚어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좌천시켰던 미우라 고로와 도호쿠 출신의 구 막부군을 주조선 군사고문단으로 파견하는데, 성실하게 일하기만 해도 전쟁이 일어날 테니 괜한 짓하지 말고 평범하게 일하면 된다고 미우라를 안심시키지만 구 막부군이 조선의 농촌 개혁안을 듣고 혹한 모습을 보이고 나중에는 아예 조선으로 전향하면서 결과적으로 자폭이 되어버렸다.[1]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토가 조선군의 군제 개편안을 듣고 혹시 조선이 일본에게 중국 정복을 함께하자고 요청하기라도 했냐며 황당해하자 지금 조선이 얼마나 난리 치더라도 결국 전쟁은 일어날 것이고 근대화라는 건 한 번 잿더미가 되면 다시 쌓아 올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태연하게 말해서 이토에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까인다.

이토가 주조선 일본공사로 파견된 뒤에는 언제 조선 먹을 수 있냐, 돈을 쓰기만 하고 성과가 없다며 이토를 달달 볶는데, 대대적으로 증강한 군비는 대부분 북양함대에 대항한답시고 대양함대를 건설 중인 해군에게 돌아가고 조선군의 군제 개혁으로 일본 육군과 조선 육군의 격차가 계속 좁혀들고 있는 상황에서 이토가 계속해서 조선의 편의를 봐주자 왜 도시락 따위와 협상을 하냐고 분통을 터트린다. 그러나 "상황이 크게 변해서 이제 조선을 노리려면 일본도 크게 각오해야 할 상황인데 어차피 국운을 걸어야 할 싸움이면 중국을 노려야지 왜 자꾸 조선에 집착하냐"고 이노우에에게서 한 소리 듣는다. 그리고 이노우에가 일본의 철도 규격을 협궤에서 표준궤로 바꾸고 싶은데 예산이 모자라서 육군 예산을 빼고 싶다고 하자 여기에 반대하는데 이노우에는 그럼 해외 유치라도 받겠다고 응수한다. 계획대로라면 10년 이내에 중국의 철도망을 대거 장악해서 동아시아 경제의 패권을 쥘 수 있는데 그걸 거절할 이유가 뭐겠냐는 것. 그 말을 들은 야마가타는 자신의 동지였던 이토, 이노우에와 자신이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대로 가면 장기적으로 일본 정계의 주도권은 해군과 내각에게 쏠릴 것을 깨닫고 이대로 끝낼 수 없다며 '제2의 세이난 전쟁'을 다시 일으키기로 결심, 헌병에게 민권론자들의 폭력시위를 유도하라고 지시한다.

야마가타가 의도한 대로 민권론자들의 시위가 과격화되자 헌병을 동원하여 강경 진압에 나서는데, 헌병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구 막부군 출신 경찰이 시위대를 지키기 위해 시위를 진압하던 헌병과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를 명분으로 육군을 도쿄에 투입해 도쿄 내 민권론자들을 체포하고 도쿄 내 모든 시위와 집회를 금지하는 공안정국을 일으킨다.

이토가 야마가타의 폭주를 막기 위해 주일 조선공사로 부임한 유길준과 함께 영국 동양함대의 호위 아래 귀국길에 오르자 '제2의 흑선내항'이라는 선전을 퍼트리고 장기집권에 방해되는 정적들은 치워버리고 민권론자들은 아예 살생부를 만들어 전부 죽여버릴까 생각도 한다. 이토가 고베항에 내리자 이토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한 인파가 예상보다 모였다는 소식에 이토를 곧장 기차에 태워 도쿄로 데려오라고 지시하지만 마침 철로 도둑들의 도둑질로 인해 철도가 망가졌고, 구 막부군 출신이 상당하며 도쿄대 시위 현장에서 경찰과 헌병대와 충돌한 사건으로 인해 쌓인게 많은 경찰은 철로 도둑들을 잡는데 미온적이며, 이토가 도쿄로 오는 동안 각 역마다 정차하면서 조선식 개혁안의 도입을 약속하며 인파를 몰고다니고 있다는 소식에 당황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가만히 있다가 결국 도쿄에 도착한 이토에 의해 실각하고 만다.[2]

조청전쟁을 통해 최대한 이득을 보려던 이토가 참전시기를 잘못 재는 바람에 조선이 청군을 자력으로 밀어내면서 전쟁의 과실도 모조리 조선에게 빼앗기게 생긴데다가 동맹의 신의도 지한파로서의 명망도 모두 실추해 자중지란이 일어난 걸 보고 조슈벌과 육군의 대표로서 조청전쟁에서 공을 세워 다시 정국 주도권을 탈환한다는 계획을 세우고는 아예 계급까지 스스로 깎으면서 파병을 자청해 원정군 사령관으로 참전한다. 원정군을 이끌고 참전하기는 했지만 진짜로 조선을 도와 청나라와 싸우려는 생각은 1도 없었기 때문에 강화도에 붙잡힌 고종을 구출한 다음 그걸 핑계로 종전협상에서 끼어들어 지분을 주장할 생각이었으나 원세개가 포로 교환으로 고종을 조선에게 다시 넘겨주었다는 소식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고, 가장 쉽고 가장 가치가 높았던 표적이 사라지면서 청군과 정면대결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처해진다.

청군이 조선군에게 쫓겨 후퇴한다는 소식만 듣고 급하게 청군과 정면대결에 돌입하지만 제대로 된 상황파악도 없이 일단 전투에 들어가면 조선군이 협력할거라 판단하고 가쓰라 다로를 보내 협공을 요청한다. 그러나 청군과 조선군 수십만 대군이 부딪히면 일본군은 보조로 전락하여 전후지분을 요구하기 힘들거라 생각해 파발이 다녀오기도 전에 10만명은 멀쩡히 남아있는 북양군과 요새화된 보급기지를 향해 상륙작전을 벌여 큰 피해를 입는다.[3]

그러고는 조선군의 배신 때문에 전투에서 패배했다며 본국의 이토에게 날조된 전투 보고를 올린다. 정작 보고서 후반부에는 의주의 조선군이 합류해 육군과 해군이 정석적으로 요동을 공략하고 있다는, 조선군이 일본군에 협조 중인 게 분명한 내용을 덧붙인다. 조선탓은 이토에게 결국 패배해놓고 말이 길어진다는 취급을 받고 무시당하고 대신 청나라와의 확전명분으로 연쇄혁명론이 필요했던 조슈3걸의 끈끈한 유대로 만적 이홍장을 서울에 무릎꿇게 하려던 혁명열사로 알려지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선타락 해버린다.

이후에도 병영국가화를 주장하면서 군부를 장악해 조슈 삼걸 중 가쓰 가이슈를 제발에 넘어지게 만들고[4] 정권을 장악했으나, 한국에서 야마가타보단 이토가 낫다는 판단하에 귀국시키면서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주는 바람에 그저 운으로 얻어걸린 정권이었던 야마가타는 아무것도 못해보고 이토에게 총리직을 내주게 된다.

그 후로 해군대신에 앉았으나, 정권에서는 거의 묻힌 신세였다가 1907년 일본의 남양 해방 작전에서 다시 등장한다. 일본군을 지휘해 대남국 수도를 장악하고 중국과 경쟁하듯이 군정청을 설치해 착취하며 병참기지화를 진행한다. 본래 치고 빠질 작정으로 파병한 이토와 일본 내각의 의사와는 달리, 야마가타는 대동아 전쟁을 일으켜 남양국가 전체와 영국, 프랑스와 전면전을 벌일 작정이었다.

때문에 도고 헤이하치로에게 계속해서 말라카나 싱가폴을 공격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시암 등에도 군사 쿠데타를 계획하며 여지없이 폭주했다. 그 계획에 미국이 얻어타면서 함대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이었지만, 이순신함이 제동을 걸면서 실패하자 젊은 시절 서구의 함포에 굴복했던 과거, 천황을 이용만 하고 방치한 자신과 대비되는 해군대신 민태호에 대한 비참한 심정에 붕괴한다.

결국 청문회에 나오라는 이야기에 할복했다는 소식이 이토에게 들어온다. 그러나 이토는 죽음으로 인한 도피조차 허용하지 않고, 궐석으로 청문회를 진행하여 야마가타의 추종자들까지 모조리 쓸어버리고, 야마가타를 패배한 군국주의자들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꼴로 만든다.

3. 기타

셋 중에서 가장 군국주의적이고 위험하다는 작가의 서술대로 조슈 3걸 중에서 가장 과격하고 도를 넘은 인물이다. 나중에 가면 이토와 이노우에조차 야마가타가 선을 넘었다고 손절할 정도이며, 자유민권운동 당시에 보여준 행보는 전두환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 정계의 상황이 상황이라 살아남은 것이니 인맥과 운이 잘 따라준 케이스라 볼 수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객관적으로 섬나라라는 특성상 해군 중심인 게 정상이지 육군 중심의 군국주의 국가라는 건 명백히 기형적인 체제로, 일본이 너무 오랫동안 육군 중심의 봉건영주 체제로 존재했다 막 통합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파크스는 메이지 유신을 도와주면서도 일본의 이런 기형적인 체제를 프로이센에 빗대 위험성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었고, 대외관계의 무지함까지 겹쳐 훗날 어떤 식으로든 영국을 배신할 것이라 정확하게 예측하기도 했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와 경쟁에서 패하고 해군 대신 직에 앉혀지면서 사실상 기반을 상실했다. 이후 남양원정 중에 속내를 드러내는데 한국과 그에 협조한 이토가 훨씬 온후한 방식으로 해외에 진출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생각한 것보단 낫다는 생각에 적잖은 자괴감을 느끼고 있으며, 이를 부정하기 위해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이었다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


[1] 심지어 이 때는 아직 금광 입찰로 영국과 프랑스가 조선에 달려들기 전이었다.[2] 사실 살생부도 머릿속으로만 생각해뒀을 뿐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이토가 도쿄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회는 여전히 야마가타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야마가타가 먼저 타협을 제안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으나 낭인 출신으로서 오로지 칼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성공가도를 걸어온 야마가타에게 있어서 대화는 인정할 수 없는 해결책이었다.[3] 정작 조선군은 이미 종전협상을 진행중이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차피 다른 사고를 쳤을거라는 나레이션이 일품.[4] 정확히는 가쓰가 야마가타의 폭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슬쩍 발을 뺐다가 야마가타의 뒷수습을 명분삼아 정권을 잡을 생각이었는데, 당시 아시아 정세가 딱 야마가타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면서 오히려 야마가타에게 주도권을 빼앗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