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웨덴의 군인. 7년 전쟁 시기 포메른에 주둔한 스웨덴군 사령관으로서 프로이센군과 맞섰다.2. 일생
2.1. 초기 경력
랜팅스하우젠은 1699년 레발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트하르트 헨리크 란팅스하우센 장군과 야코비나 스타엘 폰 홀슈타인의 외아들이었다. 1704년 10월 28일, 아버지는 푸니츠 전투에서 전사했고, 어린 란팅스하우센은 어머니의 밑에서 자랐다. 1717년, 란팅스하우센은 호위 연대의 자원병으로서 군대에 입대했고 1718년 홀란드 보병 연대의 기수가 되었다가 얼마 후 중위로 진급했다.1718년과 1719년, 란팅스하우센은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가하여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1720년 대북방전쟁이 종식된 후 홀란드 보병 연대가 해산되자, 란팅스하우센은 용기병 연대로 전출되어 대위가 되었으나 이 용기병 연대 역시 얼마 안가 해체되었다. 이후 란팅스하우센은 1722년부터 삼촌의 영지에서 2년간 군사학을 공부했다.
1724년, 란팅스하우센은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프랑스의 알자스에 주둔하는 외국인 연대에 합류했다. 그는 그곳에서 몇년 동안 행정학을 공부했고, 곧 능력있고 숙련된 장교라는 명성을 얻었다. 1736년, 란팅스하우센은 팔츠-츠바이브뤼켄의 대공비에게 발탁되어 그녀가 낳은 두 아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이 두 아이들 중 하나는 훗날 칼 12세의 여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에 의해 선택되어 스웨덴 왕위 후계자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할 무렵 프랑스군에 재입대한 란팅스하우센은 1745년 4월 15일 파펜호펜헨 전투에서 탁월한 용기와 역량을 발휘해 프랑스 지휘관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여단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1746년 스웨덴으로 돌아온 란팅스하우센은 하타르당에 가입했고 1747년 스웨덴 육군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예테보리에 있는 징집병 보병 연대의 지휘를 맡았다. 이후 1752년, 란팅스하우센은 스웨덴군을 떠나 몇년간 자신의 영지에서 여유롭게 살았다.
2.2. 7년 전쟁
1757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랜팅스하우젠은 스웨덴 육군 중장으로 재입대했다. 그는 포메른으로 스웨덴군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아 병사들을 예테보리, 우메오, 야콥스타드, 바사 항구에서 승선시켜 포메른에 성공적으로 상륙시켰다. 이후 1758년 11월 포메른에서 작전 중인 스웨덴 야전군의 총사령관에 임명된 란팅스하우센은 1759년 초 하인리히 폰 만토이펠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의 반격에 직면해 뎀민(1월 18일)과 앙클람(1월 21일)을 상실했다. 이에 란팅스하우센은 늦은 봄에 반격에 나섰고 8월 21일 페네 강을 건너 포메른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9월 10일, 스웨덴 해군은 프리셰스 하프 해전에서 프로이센 해군을 섬멸시켰다. 이후 랜팅스하우젠은 스웨덴 해군의 물자 수송에 힘입어 발트해의 섬인 우제돔 마을을 공략하여 1,750명의 포로를 확보하고 대포 130문을 노획했으며, 프로이센 소함대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선박들을 노획했다.
1760년 초, 란팅스하우센은 하인리히 폰 만토이펠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처음에는 만토이펠의 프로이센군이 우세를 보였으나, 나중에는 란팅스하우센이 공세에 나서 앙클람을 탈환하고 피엔담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해 만토이펠과 150명의 포로들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국내로 돌아가 향후 전략에 대한 논의에 참석한 그는 이듬해 여름 포메른으로 돌아와 프로이센 탄약고를 점거하기 위해 우커라인에 대한 공세를 시도했으나 대패했다. 그는 이 패배에 충격을 받고 11월 4일 지휘권을 박탈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1761년 여름까지 후임자가 올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7월에 포메른에 도착한 아우구스틴 에렌스베르드는 랜팅스하우젠이 스웨덴군을 잘 조직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