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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3 18:08:39

양문순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운익(雲益)
오촌(梧村)
출생 1862년 3월 28일
전라도 남원도호부 이언면 상동리
(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1] 부동마을 481번지)
사망 1927년 9월 22일[2] (향년 65세)
전라북도 남원군
본관 남원 양씨(南原 梁氏)[3]
묘소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신정동 선영
상훈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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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62년 3월 28일 전라도 남원도호부 이언면 상동리(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부동마을 481번지)에서 아버지 양종엽(梁鍾曄, 1829.11.25. ~ 1905.2.11.)[4]과 어머니 밀양 박씨(1833.1.23. ~ 1877.5.12.)[5] 사이에서 5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남원도호부 일대에서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1905년 진사 박재홍, 전(前) 숭인전(崇仁殿) 참봉 류병두(柳秉斗) 등과 함께 영남·호남에서 1,000여 명이 넘는 군사를 모았고, 양한규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같은 해 2월 전북지역의 요충지인 남원읍을 기습, 점령하여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던 양한규가 불의의 총격을 받고 전사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적의 반격이 시작되자 의진은 그만 와해되었다. 이후 그는 재기를 기약하며 은신했지만 결국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은 뒤 진도에 유배되었다.

1907년 11월 순종 황제의 사면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병고에 시달리다 1927년 9월 22일에 병사했다. 유해는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신정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인근의 정송리와 함께 남원 양씨(南原 梁氏) 집성촌이다. 양창식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음력 8월 27일[3] 용성부원군파(龍城府院君派)-평리공(評理公)-충장공(忠壯公) 26세 순(淳) 항렬.[4] 자는 춘백(春伯).[5] 박종언(朴鍾彦)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