絵島-生島 事件(회도-생도 사건)
1. 개요
1714년 에도 시대에 일어난 스캔들. 오오쿠의 고위시녀 에지마(絵島, 1681 ~ 1741)와 인기 가부키 배우 이쿠시마 신고로(生島新五郎, 1671 ~ 1743) 사이에 있었던 밀통 사건이다.2. 당시 상황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구의 치세인 쇼토쿠(正徳)[1] 4년(1714) 1월 12일. 당시 오오쿠는 선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정실 텐에이인(天英院)[2]과 선대 쇼군의 측실이자 이에츠구의 생모 겟코인(月光院)[3]이 서로 대립하는 형세였다. 텐에이인은 선대 쇼군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요절한 탓에 측실의 아들이 쇼군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반면에 겟코인은 운 좋게도 쇼군의 생모가 되는 영화를 누렸다. 겟코인은 남편을 섬겼던 소바요닌[4] 마나베 아키후사(間部詮房, 1666 ~ 1720)와 매우 가까운 사이라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추문이 뒤따랐다. 어쨌든 겟코인과 친밀한 덕인지 마나베 아키후사는 쇼군과 그 자식들, 시녀들과 면회를 갖는 가족들과 상인들 이외의 금남구역인 오오쿠에 출입하는 등 이에츠구 치세 동안 실권을 누렸다. 에지마는 그런 겟코인을 모시는 고위직 시녀였다.3. 경과
쇼토쿠(正徳) 4년(1714)에 에지마는 오오쿠의 시녀들을 이끌고 조조지(増上寺)[5]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친하게 지내던 포목상에게 권유받아 야마무라 극장에서 가부키를 관람했다. 공연 후 에지마는 배우 이쿠시마 신고로와 만났는데 그 탓에 통행금지 시간을 어기고 만다.[6] 이 일 때문에 에지마는 이쿠시마와 밀통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 사형을 언도받지만, 겟코인이 탄원한 덕분에 시나노(信濃国) 다카토오 번(高遠藩)[7] 귀양을 가는 것으로 감형된다. 연좌제로 얽혀 에지마의 오라비 시라이 헤이우에몬 가쓰마사(白井平右衛門勝昌)는 할복하고 남동생은 추방되었다. 에지마와 엮여서 겟코인을 모시던 시녀 1천여 명이 오오쿠에서 퇴출되어 겟코인의 세력은 약화되었다.4. 음모론
단순한 밀통사건인 듯하지만, 당시부터 텐에이인을 비롯한 반(反)겟코인 세력이 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겟코인이 마나베 아키후사와 가까웠고 아키후사의 전횡에 많은 이들이 반감을 품었다는 점, 에지마 외에도 무려 천 명이나 되는 겟코인파 시녀들이 모두 숙청되었다는 점, 텐에이인의 측근들이 강한 처벌을 주장하였다는 점, 이에츠구가 죽은 후 차기 쇼군 결정에 겟코인이 별다른 힘을 못 쓰게 되었고 텐에이인의 의중대로 진행되었다는 점 등에서 보이듯, 텐에이인을 비롯한 세력이 겟코인과 아키후사를 몰아내기 위해 꾸며낸 정치적 스캔들이라는 설이다. 여러 소설과 드라마, 영화에서는 이 설을 많이 채택한다.[8] 후술할 이에츠구 서거 후 벌어진 쇼군 경합에서 텐에이인이 지지한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쇼군에 등극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요시무네를 옹립하고자 긴 안목으로 꾸며낸 사건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황상 그럴 뿐, 정확한 증거도 없을 뿐더러 상관관계도 다소 불투명하기에 무작정 믿기는 힘들다. 이 일로 인해 나중에 참배하러 갈 때 부작용이 뒤따를 수도 있기에 텐에이인이 그런 무리수를 두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말도 있다.5. 영향
이 일을 계기로 오오쿠에서 풍기단속이 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 에도에서 극장 영업이 제한받았고 이쿠시마 신고로는 이즈 제도 미야케섬에 유배되었다가 1742년 72세 때 도쿠가와 요시무네에게 사면을 받아 에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에 후손없이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이외에도 야마무라 극장 관계자들, 그리고 포목상도 모두 추방당했다.배후가 있었든 없었든 음모든 아니든 겟코인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1716년에 쇼군 이에츠구가 숨을 거두자 겟코인과 아키후사는 오와리 가의 도쿠가와 츠구토모(徳川継友, 1692 ~ 1731)를, 텐에이인은 키슈 가의 요시무네를 차기 쇼군으로 밀었다. 키슈가 오와리보다 서열이 아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텐에이인이 지지한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8대 쇼군으로 취임했는데, 겟코인의 세력이 약해진 것이 이런 결과에 한 몫 했으리라 추정된다. 요시무네 취임 후, 마나베 아키후사는 파면되고 영지도 전봉되었다. 텐에이인은 사망에 이르기까지 오오쿠에서 실권을 행사했다. 이런 점도 배후설에 심증을 더해준다.
이후 정치적인 일과는 별개로 텐에이인과 겟코인의 사이는 회복되어, 이에츠구의 병이 심해져 슬퍼하는 겟코인을 텐에이인이 직접 위로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6. 창작물에서
나름 흥미로운 사건이기에 창작물에서 많이 다루었다. 1913년에는 연극으로 상영되었고, 1953년에는 후나바시 세이이치(舟橋聖一)가 도쿄신문에 '에지마 이쿠시마'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연재하여 이 사건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다. 1983년작 간사이 TV판 드라마 오오쿠에서도 에피소드의 하나로 방영했다.2006년도 영화 오오쿠가 이 사건을 다룬 영화다. 나카마 유키에가 에지마를,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이쿠시마를 맡았다. 초반부부터 겟코인 세력과 마나베 아키후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텐에이인과 이에노부의 측실들은 겟코인을 은따를 시킨다.[9] 이런 겟코인을 그 측근인 에지마가 물심양면으로 서포트하지만 그때문에 에지마 역시 적대당한다.
이 영화에서는 배후설을 채택했고, 텐에이인이 연극 관람을 부추기고 이쿠시마를 매수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에지마가 겟코인과 아키후사와의 사이를 고백하면 용서해주려고 하지만, 에지마는 겟코인에게 의리를 지킨다. 이쿠시마도 끝까지 에지마를 위해 자백하지 않고 끝내 처형당한다고 나오는 등, 굉장히 애틋한 스토리로 꾸며졌다.
가부키를 다룬 만화 ‘가부쿠몬’의 이치사카 신쿠로가 이 스캔들의 주인공인 이쿠시마 신고로의 숨겨진 후손으로 추정되는 설정을 갖고 있으며, 신고로의 영혼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등장하기도 한다.
[1] 나카미카도 덴노가 즉위하면서 개원한 연호로 2년간 사용하게 된다.[2] 본명은 히로코(熙子, 1666 ~ 1741)로 고셋케 중 고노에 가문의 고노에 모토히루(近衛基熙, 1648 ~ 1722)의 장녀.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정실 다카츠카사 노부코(鷹司信子, 1651 ~ 1709)의 재종사촌이다. 노부코와 사이가 친밀했다고 전하는데, 이 때문에 추신구라 항목의 여담 문단에서 언급하였듯이 추신구라 사건에 간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3] 본명은 키요(喜世). 오키요노가타로 불렸다. 생몰은 1685 ~ 1752[4] 쇼군과 중신들 사이를 중개하는 역할. 쇼군의 측근으로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다.[5] 도쿠가와 쇼군가의 영묘가 있는 도쿄도 미나토구, 시바 공원 4초메에 있는 정토종 사찰.[6] 일설에는 에지마가 이쿠시마를 에도 성에 데리고 들어갔다고도 한다.[7] 당시 번주는 나이토 이가노카미 요리노리(内藤伊賀守頼卿,1697 ~ 1735)로 1722년에 그의 탄원서으로 용서를 받고 관청으로 가서 근무하는 여성들을 지도했다고 한다.[8] 당시 쇼군 후보였던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겉으론 관망했지만 사실 요시무네도 이를 알고있으며 유리한 상황이 되도록 움직였을 가능성 있다.[9] 없는 사람 취급하는건 아니다. 다만 형식적으로는 예의를 차리되 여러가지로 꼬투리를 잡아 망신을 주는 식으로 은근슬쩍 괴롭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