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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8:30:40

프란츠 에케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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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장자
프란츠 폰 에케르트
譽啓爐 | Franz von Eckert
파일:에케르트.jpg
출생 1852년 4월 5일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 주 노이로데
(現
[[폴란드|]][[틀:국기|]][[틀:국기|]] 돌노실롱스키에 주 노바루다)
사망 1916년 8월 6일 (향년 64세)
[[틀:깃발|
기 명칭
일본제국령 조선
]][[틀:깃발|
깃발 명칭
일본제국령 조선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일본제국령 조선
]] 경성부
(現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서울)
사인 위암
국적
[[프로이센 왕국|]][[틀:국기|]][[틀:국기|]]

[[독일 제국|]][[틀:국기|]][[틀:국기|]]
묘소 서울특별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직업 음악가, 작곡가
주요 작품 대한제국 애국가
태호선
중국 행진곡
기미가요[편곡]
한국 이름 예계로(譽啓爐)
1. 소개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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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독일 제국 태생의 음악가.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하고 기미가요를 편곡하였다.[2]

2. 생애

1852년 4월 5일 프로이센 왕국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음악가의 꿈을 가진 에케르트는 음악 학교에서 오보에와 음악 이론을 전공했다. 그 이후 군악대에서 의무 병역을 마쳤고 1879년 3월에는 주일 독일 명예영사의 알선으로 독일 제국 해군부를 통해 일본 제국에 파견되어 해군 군악대 교수로 일했다. 그 무렵 일본은 아직까지 서양 음악의 불모지였는데 에케르트는 일본에서 다양한 서양 악기 연주법을 시작으로 서구식 가락과 화성을 일본 음악계에 전파했다.

그러던 중 1880년 일본 해군으로부터 기존의 기미가요를 편곡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편곡 작업에 참여했다. 그 후에도 일본 교육성 음악 분과에서 관악과 타악부분을 맡았고 1892년부터 1894년까지는 육군토야마학교(陸軍戸山学校) 군악대에서 독일 군악을 가르치는 등 일본에 서양음악을 대중화 시키는 데 많은 공로를 세웠다. 1899년에는 건강을 이유로 독일로 귀국해 프로이센 왕립악단의 단장이 되었다.

이 무렵 대한제국에서도 서양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었는데 때마침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참석을 하고 온 민영환고종에게 군악대 설치를 적극 권유했고 그 군악대를 이끌 사람으로 일본에서 활약한 에케르트를 영입하기로 결정해 외무대신 박제순이 독일 영사를 찾아가 그의 한국행을 부탁했고 이에 1901년 2월 19일 한양에 도착한 에케르트는 3월 19일 고종황제를 알현했고 4월 5일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6월 14일대한제국군 육군 군악대 교사로 채용된 에케르트는 한국 최초의 군악대 조직과 창설 작업에 착수해 왕실의 지원을 받아 악대 구성에 필요한 악기를 구입하는 한편 대원의 모집과 악기 다루는 훈련을 시켰고 이에 군악대는 에케르트의 열정적인 노력으로 불과 4개월 만에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게 되었다.

이 군악대는 매주 목요일 탑골공원에서 수많은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정기공연을 했다고 하고 1901년 9월 7일에 있었던 고종황제의 제 50회 탄신 기념식 행사에서도 많은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1902년 7월 1일 에케르트가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하자 고종은 이에 에케르트의 공로를 치하하며 태극 3등급 훈장을 수여했다.

그 후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덩달아 군악대도 해산되었지만 에케르트는 귀국하지 않고 음악학교를 설립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인 백우용과 정사인은 훗날 서양 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리고 양악대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공연을 했다. 하지만 1914년 본국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지원이 끊기고 설상가상으로 위암까지 발병해 에케르트는 더이상 활동할 수 없었고 1916년 8월 6일 투병 중 자신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명동성당에서 치러졌고 유해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치되었다.

한동안 잊혀져있던 그는 해방 이후 제3대 대한민국 해군 군악대장 남궁요열(南宮堯悅) 해군 중령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일본 유학중 한국에 서양음악을 전수해준 에케르트의 존재에 대해 알게된 남궁요열은 에케르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그의 공로를 기리는 행사도 기획해, 1949년 해군 군악대가 양화진 묘원에 안장된 에케르트의 묘소에 헌화하고 묘소 앞에서 해방후 최초로 대한제국 애국가를 연주하는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남궁요열은 에케르트와 관련된 많은 자료들을 수집했는데 그중에는 에케르트가 대한제국 애국가를 최종적으로 완성하기 직전의 악보도 있었다고 하나, 6.25 전쟁으로 대다수의 귀중한 자료가 소실되고, 남은 것은 에케르트의 초상 사진을 비롯해 몇 점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에케르트 가문은 3대에 걸처서 한국을 위해 헌신하였고, 3대 모두 사후에는 한국에 유해를 묻혔다. 현재에는 양화진 묘지에 잠들어 있다. 프랑스 어학당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장녀의 사위인 마르텔은 1949년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고, 손녀는 원산에서 수녀로 봉사하다 6.25전쟁 때 북한에 포로로 잡혀 고생하고 납북된 어머니와 함께 풀려난 후 대구의 베네딕트계 수도원에서 1988년 사망할 때까지 봉사하였고 역시 한국에 묻혔다. 이렇듯 에케르트 일가의 3대에 걸친 이 땅에서 보여준 봉사와 헌신에 대해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은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서 추모해야 마땅한 은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편곡] 기미가요의 작곡자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는 편곡을 했다.[2] 에케르트가 기미가요 작곡가로 오해를 받는 이유는 1888년 그가 편곡한 기미가요 악보를 일본 해군성이 악보집으로 제작하고 조약국에 배포하면서 악보하단에 F.Eckert라는 이름이 게재되어 있었고 이게 앞뒤 설명 없이 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