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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0:20:42

오구라 컬렉션

Ogura Collection

1. 개요2. 주요 문화재 목록3. 같이 보기

1. 개요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수집한 한국의 문화재이다.[1]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재력보다도 그것을 동원해 수집한 문화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한반도에 진출한 이래 사업을 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1920년대부터 수천 점의 문화재를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그가 수집한 대부분의 유물은 일본으로 반출되지 못했다. 한국이 해방될 때까지 컬렉션에 속한 유물 중 4,000점 넘게 한반도에 남아 있었으며, 전부 한국 정부에 압수되어 국립경주박물관이나 경북대박물관 등지에 맡겨졌다. 대구에서는 오구라가 남긴 문화재 중 130여 점이 수습되었다.# 그러나 컬렉션에서도 가치가 높은 1,000점 이상의 문화재는 이미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자신이 보유한 문화재를 관리하기 위해 1954년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를 설립했다.

오구라와 그의 수집품들은 당대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1950년대부터 한일 회담의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1958년 제4차 한일회담에서 한국 측에서는 일본으로 불법으로 반출된 것이 확실한 문화재를 열거했다. 그중 '오구라 다케노스케 소장품'을 명시하며, 오구라 컬렉션에 창녕 출토 금동 유물과 금관총 출토품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들은 개인 소장품이라 할지라도 가치의 중요성을 볼 때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1933년부터 조선총독부고적보존에 관한 법령을 시행해 문화재를 마음대로 유출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렇게 귀중한 유물이 어떻게 개인 소유로 넘어가 반출되었는지 문제 삼았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개인이 반입한 일에 국가가 개입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1960년대에는 한국 대중에게도 오구라 컬렉션의 존재가 알려졌다. 1964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수집한 문화재 5천여 점 가운데 8할을 대구에 두고 온 것이 아쉽다며, 오히려 자기가 반환을 받고 싶다고 적반하장격인 태도를 보였다. 같은 해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사망한 이후 컬렉션은 보존회가 관리했고, 1981년 오구라의 아들들이 도쿄국립박물관에 1,100여 점을 기증했다. 컬렉션 전부를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은 아니고, 조사 결과 일본 내 다른 박물관에도 일부 소장된 것이 확인되었다. 2008년에는 컬렉션 중 불상 등 일부 유물이 들어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적이 있다.# 2013년 1월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이 리뉴얼되어 한 전시실이 조선 테마로 꾸며졌는데, 유물의 절반이 오구라 컬렉션이었다.[2]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에서도 관심이 일었다. 2013년 국회에서는 컬렉션 중 일부에 대하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조선대원수 투구·갑옷 반환 촉구 결의안이 의결되었다. 2014년 한중일 문화장관회의에서 한국은 일본에 공동의 문화재 반환 협력 기구 창설을 제안하며 오구라 컬렉션의 반환을 거론했다.#[3] 시민단체들도 반환을 위한 소송을 수 차례 제기해 왔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2015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한 행정 소송에서 재판부는 한일협정으로 타결된 문제이므로 반환 의무가 없다는 도쿄국립박물관의 주장을 인용해 청구를 각하했다.# 2019년 2월에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컬렉션 반환 촉구 결의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2. 주요 문화재 목록

전체 목록은 국립문화재연구소도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같이 보기



[1] 이름이 비슷한 오쿠라 기하치로가 수집한 오쿠라 컬렉션과는 다르다. 오쿠라도 한국의 유물을 다수 수집해 일본으로 반출했다.[2] 다만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모든 한국 문화재가 오구라 컬렉션인 것은 아니며, 양산 부부총 출토 유물 일괄처럼 다른 경로로 반출된 문화재도 있다.[3] 문체부는 나중에 보도자료의 '오쿠라'는 오구라의 오기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