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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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81년 북송이 서하의 내분을 틈타 서하를 멸망시키려고 했으나, 각 지휘관 간 단합이 되지 않았고 사령관 중 하나였던 이헌이 환관이었던 점 등 북송군 내부의 문제가 심각하여, 서하군의 역공을 받아 실패하게 되었다.2. 배경
경력의 화의 이후 북송과 서하 사이에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다. 1066년 의종 이량조가 북송을 공격했다. 북송의 영종이 즉위하자 서하가 오종을 파견하나 북송 측에서는 오종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이량조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서하군이 진봉과 경원 일대를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에 맞서 북송 조정에서 서하에 대한 세폐 지급을 중단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연주지주 육선과 한기가 이에 동조하였고 한기[1]는 더 나아가 접경 지역의 호시도 중단해야 한다고 하였고, 1067년 서하가 북송에 사죄하고 말았다. 또한 충악[2]이 조정의 승인도 없이 외명산 부락을 점령한 뒤 수주성을 공략하였고 이에 서하군이 반격하여 보안군이 많은 인명 피해를 보았다.[3] 이처럼 경력의 화의 이후에도, 북송과 서하에는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다.이후 신종 시기[4][5]인 1068년 왕소가 평융책 세 편[6]을 지어서 올렸고 이는 신종과 왕안석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는 한동안 방치되다가, 1071년이 되어서야 왕소는 군사적인 행동을 개시하였는데[7], 1073년까지 희, 민, 탕, 하, 조 등을 수복하였고, 하황 일대로 영토를 개척함으로써[8] 서하를 양면으로 공략할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9][10]
3. 본격적인 행동 개시
이후 시간이 흘러 1081년 서하에 내분이 생기자[11] 신종은 이를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서하를 지도 상에서 없애려고 하였다. 이헌과 충악[12], 왕중정, 고준유, 유창조[13] 이 다섯 명으로 하여금 서하를 정벌하게 하였다. [14] 그리고 토번으로 하여금 서하의 우측을 견제할 것을 명하였다.그러나 북송군의 문제가 심각하였는데, 하나는 지휘관 중 하나였던 이헌이 환관이었다는 점[15][16], 다른 하나는 명령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4. 경과
오로 중 이헌은 대장 이호를 선봉으로 하여 지금의 임조 현에서 출발하여 마빙산을 넘어 강고성에 이르렀고, 다시 서시신성을 취하여 9월 2일 난주를 공격하여 수복하게 된다. 이헌은 성안에 사령부를 두고 난주를 세웠고, 그 이호는 지주로 삼았다. 이듬해 정월, 북송 조정은 희하로를 희하난회로로 바꾸었다.[17] 이로써 난주는 북송의 판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헌의 군대는 난주에 머무르자 다른 부대가 갈팡질팡하게 된다.충악은 적극적으로 작전을 펼쳤고, 부대를 이끌고 무정하를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여 처음에는 파죽지세로 출발하였고, 일련의 간접 공격 전략을 통해 서하의 미지, 석주, 하주, 인주 등지를 차례로 공략하였다. 그러나 곧 군량미 공급이 끊기고 폭설까지 겹치면서 부대의 3분의 2가 죽고 말았다.
왕중정[18]의 군대는 겨우 몇 리만 행군해 놓고 서하의 국경 지대에 이르렀다고 허위 보고하였다. 유주에서 나왕정까지 행군하였으나 양식이 다하여 6만 명 중 2만명이 아사했다.
그리고 경원로의 유창조 부대는 용맹하게 싸워 승세를 몰아 영주성 아래까지 이르렀으나, 고준유는 유창조를 견제한 데다가 전세에 대한 전반적인 파악이 부족하여 공성기구가 부족하고 병참이 부족한 상황에서 유창조에게 직접 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하고 송군은 병참을 주둔시켜 18일 포위 공격하였다. 서하군은 황하수로를 방류하여 송군의 진영을 침수시키고, 군량과 급료의 길을 끊음으로써 송군의 병사들은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다.
5. 결과
비록 이는 실패하였으나 북송군은 은, 석, 하, 유제주와 횡산 북쪽의 군사 요점만을 점령하여 서하가 횡산 연변 지대에서 200여 리를 감히 경작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는 왕안석의 신법 시기 모았던 재정이 악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6. 실패 원인
명령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던 점, 지휘관 중 하나였던 이헌과 왕중정이 환관이었다는 점, 군량 보급 문제[19], 서하의 청야전술이 한 몫 했다.[1] 남송 시기 권신으로서 개희북벌을 주도한 한탁주의 증조부[2] 청간성을 쌓아 서하를 방어한 충세형의 아들로, 아버지의 연줄로 청간성을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 충세형, 손자 충사도와 함께 충가장의 일원이다.[3]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수주를 반환해야 한다고 했으나 곽규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4] 신종은 요(연운 16주 점령)와 서하(하서주랑 일대를 점령)가 북송을 노리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다.[5] 신종은 연운 16주를 차지한 거란족의 요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요는 너무 강하여 서북쪽의 서하를 점령하고자 하였다.[6] 대략적인 내용은 서하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하, 황 두개의 주를 반드시 획득해야 한다는 내용이다.[7] 토번 부족 중 하나인 유용가를 귀순시키고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8] 안사지란으로 인해 당의 정예군이 반란 진압에 투입된 틈을 타 토번에 빼앗겼으나 이후 851년 장의조가 하서 일대를 당에 바칠 때 이 곳도 당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장의조 사후 다시 토번에 빼앗긴다.[9] 그러나 이후 이어진 요나라와의 국경 분쟁과 교지의 송 침공 사건, 희하로의 강족들 문제, 토번 부족의 반송 전쟁은 이러한 군사 배치의 지속을 방해했고, 송 신종은 서정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10] 또한 왕안석의 신법에 폐단이 많자 왕소도 실각하고, 왕소는 1081년 사망한다.(자치통감에는 1077년으로 나왔다.)[11] 서하의 이병상은 북송과 화친하려고 했으나, 양태후에게 감금되고 말았다.[12] 충악은 이에 대해 열흘 치의 군량만 있으면 된다는 등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13] 유창조는 고준유의 통제를 받았음[14] 이헌은 희하로, 충악은 연로, 고준유는 환경로, 왕중정은 하동, 유창조는 경원 이렇게 진군함으로써 서하의 흥경부를 함락시키고자 하였다.[15] 흥경을 공격하기로 약속한 시일 내에 이헌의 군대가 모이지 않게 되었다.[16] 신하들이 반대했으나 송 신종은 이를 강행한다.[17] 희하난회로는 이후 송 휘종 시기인 1105년에 희하난황로로 바뀐다.[18] 이헌과 마찬가지로, 환관이었다.[19] 북송 수도 개봉에서 서북 지역까지 너무 거리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