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오동흠(吳東欽) |
본관 | 동복 오씨(同福 吳氏)[1] |
출생 | 1911년 7월 21일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종면 금오리 (現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오산리[2] 오산마을 334번지) | |
사망 | 1943년 10월 29일 (향년 32세) |
전라남도 해남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820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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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911년 7월 21일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종면 금오리(現 해남군 북평면 오산리 오산마을 334번지)에서 아버지 오재복(吳在福, 1873 ~ 1938. 4. 9)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은아(李銀牙, 1873 ~ 1947. 8. 21) 사이에서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일찍이 광주농업학교에 진학했으나 학비 마련이 어려워 중퇴했고, 1929년 상경해 고학당을 다니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처음 접했다. 이때 사회주의 이론을 배우다가 1932년 4월 귀향하여 고향 해남군에서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평소 일제 식민지 통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농민들의 의식을 계몽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1932년 10월부터 해남군에서 박태술(朴太述)·김홍배(金洪培) 등과 함께 농민에 대한 교양 강화 및 소작권 쟁의 촉진 등 여러 문제에 관해 협의한 끝에 야학을 설치하고 이를 바탕으로 소작쟁의를 비롯한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이들은 전위조직까지 건설할 목표를 세워두고 있었으나, 시기상조라 판단해 우선은 농민운동에 힘을 쏟으면서 훗날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듬해인 1933년 5월에는 기존의 농민운동을 보다 확대시키기 위해 황동윤(黃同允)·김홍배 등과 함께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그해 8월에는 오문현의 제안에 따라 전남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로 발전적으로 확대 개편되었고, 해남군을 비롯해 완도군·장흥군·강진군·영암군 등 5개 군에 지부조직이 설치되었다. 이때 오문현은 조직부 책임자에 선임되었는데, 당시 조직 방침이 '농민운동의 지도기관으로서 전라남도 각 군에 걸쳐 혁명적 농민조합을 건설하고, 농촌 각 마을에 3명 내지 5명으로써 농민반·청년반·소년반을 각각 결성하고, 이들 각 반을 면 단위로 통합하여 각 군의 혁명적 농민조합의 지부로 삼는다'는 것이었으므로 이 방침에 따라 해남군 북평면에서 정맹영(鄭孟永) 등 청년 3명을 포섭하여 청년반을 건설하는 등 조직 확대에 힘썼다.
그러나 1933년 여름 조직원 윤가현(尹珂鉉)이 강진군 병영주재소를 방화했다가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면서 농민조합 건설운동은 중단되었고, 1934년 2월에는 전남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의 정체가 발각돼 오문현 또한 1934년 9월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5년 12월 21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예심이 종결되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의 공판에 회부되었고,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형사부에서 이른 바 육군형법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545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폐결핵을 얻어 고통받다가 1943년 10월 29일 해남군에서 별세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1999년 11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 장남 송재(松齋) 오영돈(吳永敦, 1933. 7. 19 ~ )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 교수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