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EE8AA><colcolor=#000000> 바이에른 왕국의 왕자비 오스트리아의 기젤라 여대공 Erzherzogin Gisela von Österreich | |
이름 | 기젤라 루이제 마리 (Gisela Louise Marie) |
출생 | 1856년 7월 12일 |
오스트리아 제국 락센부르크 | |
사망 | 1932년 7월 27일 (향년 76세) |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 뮌헨 | |
배우자 | 바이에른의 레오폴트 왕자 (1873년 결혼 / 1930년 사망) |
자녀 | 엘리자베트 마리, 아우구스테, 게오르크, 콘라트 |
아버지 | 프란츠 요제프 1세 |
어머니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
형제 | 조피, 루돌프, 마리 발레리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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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초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차녀.불우하기로 유명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가족들 중 가장 평안한 인생을 살았다.
2. 생애
2.1. 유년기
어린 시절의 기젤라, 1864년 |
1856년 7월 12일에 태어나 바로 밑에 동생인 루돌프와 함께 할머니 조피 대공비 밑에서 자랐다. 할머니와의 갈등을 겪었던 어머니 엘리자베트에 의해 어릴 적 언니 조피와 함께 헝가리로 여행을 하던 중 언니와 함께 고열을 앓았다. 기젤라는 살아남았지만 언니 조피는 사망했다. 실의에 빠진 엘리자베트는 이때 이후로 기젤라와 루돌프에게 완전히 손을 떼고 시어머니에게 두 아이를 맡겼다.
동생 루돌프 만큼은 아니었다고 하나 냉담한 할머니, 자신들에게 무관심한 부모님 아래에서 불행한 유년 생활을 보냈으며 2살 터울의 동생이자 같은 유년 시절을 보낸 루돌프와 친했었다. 기젤라는 조용하고 순종적인 성격의 아이로 성장했으며 어머니처럼 승마와 문학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2.2. 결혼
기젤라와 레오폴트 왕자, 1872년 |
기젤라의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16살의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한 것을 한탄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6살도 안 된 기젤라를 바이에른 왕국의 실권자 루이트폴트 왕자의 아들 레오폴트 왕자와 약혼시켰다.[1] 이 결혼에는 엘리자베트의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는데, 엘리자베트의 남동생 막시밀리안은 작센의 아말리 공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말리에는 레오폴트 왕자와 약혼할 상황이었고, 엘리자베트는 동생을 위해 기젤라를 레오폴트의 결혼 상대로 밀었다. 레오폴트는 당연히 공작의 딸인 아말리에가 아닌 황제의 딸 기젤라를 아내로 삼기로 했다.
그렇게 기젤라는 어린 나이에 10살 연상의 인물도 좋지 않은 레오폴트 왕자와 1873년 4월 20일에 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비록 정략결혼이긴 해도 차가운 할머니와 워커홀릭인 아버지, 무관심한 어머니라는 남보다 못한 차가운 친정과 다르게 시댁인 바이에른에서 기젤라는 처음으로 환대를 받았다. 또한 시댁은 물론 남편도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으며 기젤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따뜻하고 정상적인 가족과 행복을 얻었다. 부부는 금슬이 좋았으며 슬하에 4명의 아이들을 두었다.
이후에 기젤라는 자신을 반겨준 바이에른을 위해 바이에른의 공비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특히 자선활동에 열중하였는데, 그 중에서 장애인과 빈민들을 열성적으로 도와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자택을 개방해 부상자들을 위한 병원으로 썼을 정도로 남편을 도와 많은 역할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바이에른은 공화국이 되고 혁명으로 다들 뮌헨을 떠났지만 기젤라는 동부전선에 있는 남편을 기다렸다가 함께 바트 이슐로 이주했다. 바트 이슐에서 부부는 노동자 및 군인 평의회에게 '왕족 기생충'이라 불리며 적대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기젤라의 헌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두 사람은 뮌헨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부부는 뮌헨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며, 금혼식을 치르기도 했다. 기젤라는 남편이 죽은지 2년 후인 1932년 7월 27일에 숨을 거두어 장크트 미하엘 성당 지하 묘지의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
기젤라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는 기젤라와 정상적인 모녀 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기젤라를 자신의 남동생을 위해서라는 철저히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정략결혼에 이용했으면서도, 정작 기젤라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한번도 기젤라의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 심지어 엘리자베트는 자신의 시에서 기젤라를 '마른 암퇘지'로 기젤라의 아이들을 새끼 돼지로 묘사하기도 하는 등, 그녀의 외모가 못났다고 디스하곤 했다. 원인은 외모지상주의가 심각해서 못생기면 짤없었던 엘리자베트의 인격적 문제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엘리자베트는 시에서 기젤라 뿐 아니라 손자들, 며느리인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 남편 프란츠 요제프 1세, 친척들 대부분의 외모적 결함을 매우 강조해서 묘사했다고. 아무리 그래도 이쯤되면 무관심을 넘어 증오하는 수준.반면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격무로 인해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대했다. 기젤라는 프란츠 요제프의 아이들 중 가장 그와 성격이 비슷했다. 프란츠 요제프는 어렸을 적 아이들의 물건을 소중히 보관했는데, 그의 유품 중에는 기젤라가 어릴 적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시가 있었다고 한다.
유별나게 가족 모두와 충돌하던 엘리자베트에 비해 기젤라는 착하고 순해서 가족들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가족들 중 가장 가까이 지낸 인물은 함께 자란 동생 루돌프 황태자였다. 기젤라는 지나치게 엄격한 교육을 받는 루돌프를 안타까워했으며, 아버지에게 루돌프를 후계자가 아닌 아들로 봐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결혼 후에도 루돌프와 자주 연락하며 그의 고충을 들어주었다. 후에 루돌프의 자살은 기젤라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기젤라는 루돌프의 죽음에 관해 올케 스테파니 황태자비를 비난했으며, 루돌프의 머리에 난 총상 근처에 화상이 없었다는 것을 근거로 그가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다.[2]
막내동생인 마리 발레리와는 나이 차이가 12살이나 났지만 말년에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마리 발레리는 종종 뮌헨에 있는 기젤라를 방문하고는 했다.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오스트리아의 기젤라 (Gisela von Österreich) | <colbgcolor=#fff3e4,#331c00> 프란츠 요제프 1세 (Franz Joseph I) | <colbgcolor=#ffffe4,#323300>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 (Archduke Franz Karl of Austria) | |
프란츠 2세 (Francis II) |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Princess Maria Theresa of Naples and Sicily) | |||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Princess Sophie of Bavaria) | |||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 |||
바덴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Baden) |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Duchess Elisabeth in Bavaria) | |||
바이에른에서의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 (Duke Maximilian Joseph in Bavaria) | |||
바이에른에서의 공작 피우스 아우구스트 (Duke Pius August in Bavaria) | |||
아렌베르크의 아멜리 루이제 공녀 (Princess Amélie Louise of Arenberg) | |||
바이에른의 루도비카 공주 (Princess Ludovika of Bavaria) | |||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 |||
바덴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Baden)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제프리트와 부텐하임 백작 부인 엘리자베트 마리 (Elisabeth Marie, Countess of Seefried and Buttenheim) | 1874년 1월 8일 | 1957년 3월 4일 | 제프리트와 부텐하임 백작 오토 슬하 1남 4녀 |
2녀 |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아우구스테 (Archduchess Auguste of Austria) | 1875년 4월 28일 | 1964년 6월 25일 |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아우구스트 슬하 3남 3녀 |
1남 | 게오르크 왕자 (Prince Georg) | 1880년 4월 2일 | 1943년 5월 31일 | |
2남 | 콘라트 왕자 (Prince Konrad) | 1883년 11월 22일 | 1969년 9월 6일 | 사보이아제노바의 마리아 보나 공녀[4] 슬하 1남 1녀 |
4. 여담
- 여러 장소와 시설물 등이 기젤라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어졌다. 결혼 후 기젤라는 슈바빙에서 살았는데, 슈바빙의 거리 중 하나가 결혼을 기념해 기젤라슈트라쎄로 명명되었다. 또한 기젤라가 후원한 교육시설인 기젤라 김나지움, 오스트리아의 주요 철도 노선 중 하나인 기젤라 선, 기젤라 외륜선 등이 기젤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