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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09:11:04

오토 힌체

파일:Hintze.jpg
Otto Hintze
1861년 8월 27일 ~ 1940년 4월 25일 (향년 78세)
1. 개요2. 생애3. 업적
3.1. 1차 세계 대전 이전3.2. 1차 세계 대전 이후3.3. 현실형
4. 힌체의 수용과 비판5. 명예6. 참고 문헌

1. 개요

독일 제국~나치 독일 시절 독일의 역사학자.

힌체는 프리드리히 마이네케와 더불어 20세기 초반 독일 역사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헌법사(Verfassungsgeschichte)[1] 분야의 현대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또한 마르크 블로크와 더불어 비교사의 선구자로도 평가된다.

2. 생애

현재 폴란드령인 포메른 지방의 소도시 피르지체(Pyrzyce, 독일어 Pyritz)에서 태어난 힌체는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특히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에게서 수학했다. 1884년 베를린 대학에서 율리우스 바이츠재커(Julius Weizsäcker)의 지도하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프로이센 사료 간행 프로젝트인 악타 보루시카(Acta Borussica)의 편집 작업에 참여했으며, 1902년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912년 유대인인 헤트비히 구겐하이머[2]와 결혼하였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인 1915년 힌체는 프로이센 정부의 의뢰로 호엔촐레른 왕조의 브란덴부르크 통치 500주년을 기념하는 저작인 호엔촐레른과 그 업적(Die Hohenzollern und ihr Werk)을 출간했다. 현재 힌체의 저작들 중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대부분 논문들인데, 이 저작은 그의 단행본 중에서도 현재까지도 꾸준히 언급되는 중요한 프로이센 역사 서술로 평가된다.

1차 세계 대전의 패전은 힌체의 역사관에 있어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1차 세계 대전까지 힌체의 정체성은 분명한 프로이센의 역사가였고, 그는 민족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독일 제국의 입헌주의 체제를 역사적,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은 힌체로 하여금 국가권력의 폭력적, 악마적 면모를 인식하게끔 하였고, 또한 건강 문제로 베를린 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는 등 개인적인 문제가 겹치며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다소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힌체는 학술 활동에 열중하면서 프로이센 중심의 헌법사 연구에서 벗어나 유럽 국가들의 광범위한 비교 헌법사 연구를 개척해 나갔다.

나치가 집권한 이후 유대인과 결혼하였던 힌체의 학술 활동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아내 헤트비히는 프랑스로 이주하여야 했고, 1933년부터 1939년까지 파리와 베를린을 통근하면서 힌체를 간호했다. 1940년 힌체는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사망하기 전 그는 그의 헌법사 연구를 종합한 저작을 완성했던 것으로 전해지나, 나치 정권의 아웃사이더였던 그의 저작을 선뜻 출판하려는 출판사가 없었고 결국 그의 형제에게 이를 파기할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3. 업적

힌체는 헌법사 및 사회사 분야의 발전에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힌체는 동시대인인 막스 베버와 더불어 근대 국가 연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지니는데, 사회학자인 베버가 근대 국가의 성격에 관심을 가졌다면 힌체는 역사학자로서 근대 국가의 역사적 기원 및 형성 과정에 주로 공헌하였다.

힌체 이전의 헌법사 연구는 법과 제도의 역사가 중심이 되었다. 또한 국내 정치에 대한 외교 관계의 영향을 강조한 '외정의 우위'를 내세운 레오폴트 폰 랑케의 영향 속에서 독일 역사가들은 외교사를 중심으로 한 정치사 분야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사회 경제적 측면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사회 내부의 계급 갈등을 우선시하면서 국제 정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힌체는 기본적으로 랑케와 드로이젠의 역사주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나, 국가 내부 헌법(조직, 제도)의 발전을 다루는 데 있어 대외적, 정치적 요소만이 아닌 대내적, 사회 경제적 요소를 총체적으로 다룰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점에서 힌체는 헌법사 연구의 패러다임 전환을 제시함과 동시에 사회사적 접근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3.1. 1차 세계 대전 이전

1차 대전 이전의 힌체는 프로이센사를 주로 다루면서도 랑케의 영향 속에서 '로마-게르만 유럽'의 역사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힌체는 이를 랑케의 필생의 업(Lebenswerk)를 완성하는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국가형성과 헌법발전(Staatenbildung und Verfassungsentwicklung, 1902)은 그의 이러한 관점이 총체적으로 제시된 중요한 논문으로, 여기서 힌체는 국가 내부의 헌법적 형태는 국가의 '형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입장을 전개했다. 힌체는 로마-게르만 유럽의 정치적 발전 양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고대 도시 국가 - 공화제, 민주제
2. 고대 보편 제국 - 전제군주제
3. 중세 봉건제
4. 영역 국가(Territorialstaat) - 신분 대의제(Ständische Verfassung)
5. 통일 국가(Einheitsstaat) - 절대 군주제(대륙) / 대의제(영국)
6. 입헌 국가 - 대의제

국가헌법과 군대조직(Staatsverfassung und Heeresverfassung, 1906)은 힌체의 가장 많이 인용되는 논문인데, 힌체는 여기서 국가 헌법과 군대 조직 형태 간의 밀접한 관련성을 주장하면서 유럽에서 근대적인 통일 국가가 형성되는 데 있어 전쟁과 지정학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힌체는 모든 국가 조직은 근본적으로 군대 조직이자 전쟁을 위한 조직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이후 국가 형성에 있어 전쟁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국가헌법과 군대조직"에서 힌체는 로마-게르만 유럽의 정치-군사 헌법을 부족제 - 봉건제 - 근대 군사주의의 세 단계로 나누고, 근대 군사주의 시대에 이르러 군대 조직의 변화와 함께 근대 국가 체제가 형성되는 과정을 다룬다. 힌체는 15세기 후반~17세기 중반의 용병제를 바탕으로 중앙 집권화되지 않은 영역 국가가 17세기 중반 이후 중앙 집권적 근대 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을 크게 대륙식과 영국식으로 나눈다. 이는 지정학적으로 상호 독립적인 개별 국가들의 경쟁 및 전쟁 압력이 강력했던 유럽 대륙에서는 강력한 육군 상비군과 군주 중심의 중앙 집권화 및 국가 운영의 관료화, 합리화를 요구하면서 '절대주의'적 국가 발전이 이루어진 반면, 대륙에 비해 지정학적으로 전쟁 압력이 약했던 영국에서는 지방 민병대 전통이 유지되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형태의 '의회주의'적 국가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힌체의 시각은 근대 국가의 본질을 '합법적인 물리적 강제력(폭력)의 독점'을 바탕으로 한 '합리화' 과정으로 규정한 베버의 이론과 결합하여 근대 국가의 합리화 과정에서 전쟁과 지정학적 압력의 영향을 강조하는 국가 형성의 고전적인 이론으로 발전했고, 이를 '베버-힌체 전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으로 힌체의 이러한 관점은 프로이센의 군사주의 및 군주제 원리를 옹호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힌체는 프로이센은 사방이 외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입지로 인해 관료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국가 형성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당대를 풍미한 '신랑케주의'의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제국의 국제적 입지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힌체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였으나, 프로이센 전통과 독일 제국의 입헌주의적 정치 체제에 호의적인 민족 자유주의(우파 자유주의) 계열에 속했다. 좌파 자유주의자인 베버가 독일 제국의 정치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과 다르게, 힌체는 군주제 원칙과 입헌헌법(Das monarchisches Prinzip und die konstitutionelle Verfassung, 1911)이라는 논문에서 독일 제국의 입헌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옹호하고자 했다. 힌체는 군주를 국가 전체 이익의 통합적 대표(Repräsentativ)로, 의회를 특수 이익의 대리(Vertretung)로 파악하면서, 영국가 다르게 내적 통합이 부족하고 사회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독일에서는 의회가 주권을 대표할 수 없고, 주권의 통합적 대표로서 군주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는 독일 제국 당대의 제국 헌법에 대한 중요한 설명으로 간주된다.

3.2. 1차 세계 대전 이후

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힌체는 국가권력의 양면적 속성을 분명히 인식하기 시작했고, 전전의 작업에서도 나타나고 있던 헌법사의 세계사적 비교 접근을 더욱 확장시켜 나갔다. 봉건제의 본질과 분포(Wesen und Verbreitung des Feudalismus, 1929), 서구 신분대의제의 유형론(Typologie der ständischen Verfassungen des Abendlandes, 1930), 대의제 헌법의 세계사적 조건들(Weltgeschichtliche Bedingungen der Repräsentativverfassung, 1931)의 세 논문은 비교 헌법사 작업의 정수라 할 수 있는데, 이 논문들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3부작으로 여겨진다. 힌체의 여기서 로마-게르만 유럽, 즉 서구만의 독특한 현상인 '대의제'의 출현 조건을 세계사적 비교를 바탕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봉건제의 본질과 분포에서 힌체는 봉건제를 젊고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문명이 오래된 문명과 접촉하면서 나타나는 범세계사적인 현상으로 파악한다. 그러면서도 유럽 봉건제의 특수한 성격은 군사적으로는 기사 계급의 형성, 사회 경제적으로는 장원제에 기반한 토지 지배, 정치적으로는 지방 세력의 독자적 영역 지배라는 세 가지 측면이 함께 나타나는 것에 있다고 파악한다. 힌체의 봉건제 규정은 봉건제를 좁은 의미의 법제적 측면에서만 접근하였던 고전적인 독일학계의 접근과 달리 사회 경제적인 요소를 포함하여 총체적으로 파악하였다는 데서 의미를 지닌다.

서구 신분 대의제의 유형론에서는 유럽 각국의 신분 대의제의 특징을 다루는데, 여기서 힌체는 유럽 신분 대의제를 양원제와 삼원제(삼부회)의 두 형태로 구분한다. 힌체에 따르면 카롤루스 제국의 중심부(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아라곤)에서는 봉건제와 로마법이 도입되면서 오래된 지배 조직이 해체되고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좀 더 발전된 지배 체계인 성직자-귀족-도시의 삼원 체계의 신분제 의회가 나타났고, 이는 비교적 절대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국가 형성으로 이어졌다. 반면 봉건제가 부재하거나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 카롤루스 제국의 주변부(영국, 폴란드, 헝가리,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오래된 지배 질서가 잔존하면서 상원(고위 귀족)과 하원(하위 귀족)의 양원제 형태의 신분제 의회가 출현했고, 여기서는 보다 의회주의적인 국가 형태가 나타났다. 이러한 접근은 1914년 이전까지는 지정학적 접근 및 외정의 우위를 전제하고 있던 힌체의 인식 전환이 드러나는 부분으로, 1차 대전 이후의 힌체는 국가 형성과 관련하여 대외적, 지정학적 요인보다 대의제로 대표되는 내부 정치의 요인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의제의 세계사적 조건들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근대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인 대의제가 서구에서 출현한 조건을 심층적으로 다룬다. 힌체는 유럽에서 출현한 신분 대의제를 근대 대의제의 기원으로 파악하는데, 한편으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같은 봉건제가 부재하였던 지역에서도 신분 대의제가 나타났고, 일본과 이슬람 등 유럽 밖의 봉건제에서는 신분 대의제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바탕으로 봉건제와 신분 대의제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미 힌체는 "국가형성과 헌법발전"에서 유럽 신분 대의제의 출현 조건으로 1.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 이후 세속-종교 권력의 분열 2. 동등한 국가 간 경쟁을 바탕으로 한 유럽 국가 체제 3. 봉건제를 제시하였는데, 여기서는 이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먼저 봉건제는 구 지배 조직을 해체하였고, 교회 권력은 군주 권력을 제한함으로써 고대 게르만의 상호 의무 관계로부터 기원하는 원시적 법치주의 개념을 보존했다. 또한 이로부터 형성된 기사 신분과 성직자 신분은 군주로부터 독립적인 특권적 신분을 형성하였다. 여기에 중세 유럽을 거치며 형성된 동등한 국가들 간의 경쟁을 바탕으로 하는 유럽 국가 체제와 전쟁은 막대한 재정적 요구 및 이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 운영의 합리화를 요구하였고, 이는 신분 집단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유럽의 신분제 의회는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다.

3.3. 현실형

힌체는 역사학의 이론과 방법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당시 기준 신생 학문이었던 사회학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베버, 에른스트 트뢸치, 베르너 좀바르트, 프란츠 오펜하이머 등 당대의 중요한 사회학자들의 학문에 대해서도 논문들을 남겼다. 특히 힌체는 베버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베버가 제시한 '이념형(Idealtypus)'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베버의 이념형은 베버가 제시한 사회학의 방법론으로, 복잡하고 구체적인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그 대표적인 특성을 기반으로 추상적 개념을 형성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봉건제'와 '자본주의'와 같은 용어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베버는 이러한 이념형을 현실을 완전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 사회를 파악하기 위한 이상적, 관념적 형태의 개념 도구로 파악했다. 힌체는 이념형을 바탕으로 한 추상화 작업을 수용하면서도, 역사학자로서 개별적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 및 비교를 바탕으로 하는 '현실형(Realtypus)'의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이념형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4. 힌체의 수용과 비판

힌체 사후 1941년에서 1943년 사이 그의 제자이자 중요한 독일 헌법사 개관을 출간했던 프리츠 하르퉁(Fritz Hartung, 1883-1967)은 그의 저작 모음집을 출간하였으나 전쟁 중이었던지라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하르퉁의 제자이자 초기 근대 헌법사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남긴 게르하르트 외스트라이히(Gerhard Oestreich, 1910-1978)의 주도하에 그의 저작집이 재출간[3]되면서 힌체는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태동하던 한스-울리히 벨러와 위르겐 코카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사가들은 힌체의 사회사 및 비교사적 접근에 큰 영향을 받았고, 힌체를 베버와 더불어 그들의 방법론적 선조로 여겼다.

또한 1975년 그의 저작 중 일부가 영어로 번역되면서 힌체는 역사 사회학자들에게 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이후 찰스 틸리와 테다 스카치폴을 비롯한 국가 형성에 있어 전쟁의 역할을 강조하는 역사 사회학 연구가 유행하는 가운데 힌체는 이러한 입장의 이론적 선조로 조명되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힌체는 베버와 더불어 국가 형성에 있어 지배 엘리트들의 역할, 그리고 전쟁과 폭력에 초점을 맞추는 '위로부터의/햐항식(Top-down)' 관점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전후 독일 역사학계의 초기 근대 헌법사 연구를 대표하는 패러다임인 외스트라이히의 '사회 규율화(Sozialdisziplinierung)', 볼프강 라인하르트하인츠 쉴링의 '교파화(Konfessionalisieurng)' 이론 역시 국가 권력의 신민에 대한 규율, 통제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그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미 힌체 생전에 중세사가 오토 브루너는 Land und Herrschaft(1939)라는 저작에서 그의 총체적이고 사회적인 헌법사에 공감을 표하면서도 중세 헌법사를 19세기 근대 국가의 개념을 바탕으로 이해하려 한다는 보다 근본적인 비판을 제기하였다. 브루너는 중세 후기 독일에서 영방이 형성되는 과정을 영방 군주들의 권력이 아닌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관계 및 상호 의무라는 고대 게르만의 전통에서 찾고자 했는데, 이는 국가 형성의 자생적, 자발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상향식Bottom-up)' 국가 형성에 대한 접근법의 단초를 마련했다. 이후 페터 블리클레는 브루너의 입론을 이어받아 초기 근대 국가 형성에 있어 농민들의 주도적인 참여 및 이들의 저항, 반란이 미치는 영향을 대대적으로 강조하면서 상향식 국가 건설 연구의 흐름을 주도했다.

또한 1980년대 이후 역사학계에서 '문화적 전환'을 중심으로 정치를 문화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접근이 대두하면서 힌체로 대표되는 고전적인 헌법사는 더욱 근본적인 도전에 처한 상황이다. 바바라 슈톨베르크-릴링어로 대표되는 이러한 경향은 '정치의 문화사', '문화사로서의 헌법사'를 주창하면서 정치 행위를 국가 권력의 일방적 강제가 아닌 행위자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혹은 상호 작용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는 정치에 있어 정부와 시민 사회 간의 협력, 협상, 갈등 조정에 초점을 맞추는 거버넌스 이론의 출현과도 접점이 있으며, 고전적인 하향식 국가 건설론 역시 도전받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힌체 헌법사의 근본 개념들인 '봉건제', '절대주의'와 같은 개념에 대해서도 역사학계의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러한 개념들이 과연 당시의 실제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들이 제기되기 시작했고,[4] 이러한 용어의 사용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힌체는 신분 대의제 연구와 같은 분야에서는 아직까지도 기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가 보여 준 총체적이고 세계사적인 비교 접근은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힌체의 헌법사는 근본적으로 광범위하고 거시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는 만큼 디테일에 있어서는 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국가 형성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접근이나 문화사적 접근 역시 고전적인 위로부터의 접근을 완전히 대체한 것도 아니며, 힌체는 절대주의 권력의 한계에 대해서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오늘날까지 의미를 지닌다.

5. 명예

아내인 헤트비히 힌체가 유대인이었기에 1938년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6. 참고 문헌



[1] 독일어의 Verfassung은 근대적인 성문 헌법만이 아닌 정치 공동체 내부의 '상태' 및 조직 전반을 가리키며, 전근대와 관련해서도 사용된다. 기본적으로 고전적인 정치사 및 제도사 분야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며, 영어의 Constitutional History에 해당한다.[2] Hedwig Guggenheimer, 1884-1942. 후에 헤트비히 힌체가 된다. 헤트비히 힌체는 마이네케의 지도를 받아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독일 최초의 여성 역사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힌체 사후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가 병원에서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3] 1권 Staat und Verfassung. Gesammelte Abhandlungen zur allgemeinen Verfassungsgeschichte(1962) 2권 Soziologie und Geschichte. Gesammelte Abhandlungen zur Soziologie, Politik und Theorie der Geschichte(1964) 3권 Regierung und Verwaltung. Gesammelte Abhandlungen zur Staats-, Rechts- und Sozialgeschichte Preußens(1967)[4] 봉건제는 수잔 레이놀즈의 Fiefs and Vassals(1994), 절대주의는 니콜라스 헨셜의 The Myth of Absolutism(1992)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