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올리버 잉햄 Oliver Ingham |
출생 | 1287년 |
잉글랜드 왕국 노퍽주 잉햄 | |
사망 | 1344년 1월 29일 |
잉글랜드 왕국 노퍽주 잉햄 | |
아버지 | 존 잉햄 |
어머니 | 마저리 |
아내 | 엘리자베스 주쉬 |
자녀 | 올리버, 존, 엘리자베스, 조앤 |
직위 | 가스코뉴 세네샬,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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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기사. 가스코튜 세네샬로서 프랑스 왕국의 침략에 맞섰다.2. 생애
1287년경 잉글랜드 왕국 노퍽주 잉햄에서 존 잉햄과 마조리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 존 잉햄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전쟁에 기사로 참여했다. 1310년, 그는 노퍽, 서퍽, 윌트셔, 햄프셔에 있는 아버지의 토지를 물려받았다. 이후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치를 때 기사로 소환되었으며, 왕의 가문 기사로 선임된 뒤 슈롭셔에 있는 엘즈미어 성주, 체셔와 플린트셔 카운티의 수호자, 슈롭셔의 윌트셔의 보안관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왕실 보조금을 받았고, 1322년 8월 에드워드 2세와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기사 기수로 활동했다.1324년 에드워드 2세를 대신해 아키텐 보안관으로 활동하던 이복형제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의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샤를 4세가 동원한 프랑스군이 아키텐 대부분을 공략하자, 잉햄은 스페인 출신 용병대를 이끌고 아키텐으로 이동한 뒤 아게네와 생통주에서 일부 영토를 탈환했다. 1325년 켄트 백작이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고 잉글랜드로 돌아간 후, 잉햄은 1326년 가스코뉴 세네샬에 선임되어 그곳의 민정과 군정을 동시에 살폈다. 1327년 에드워드 2세가 폐위되고 에드워드 3세가 등극한 뒤, 에드워드 3세의 섭정을 맡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와 로저 모티머는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때 프랑스는 아게네의 석권을 인정받았고, 잉햄은 탈환한 영토를 도로 내줘야 했다.
그 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잉햄은 로저 모티머의 추종자가 되어 1328년 6월에서 1330년 9월 사이에 의회에 소환되었다. 1329년 2월 모티머를 전복하려 했다가 발각된 인사들의 처분을 논하는 재판에서 판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1330년 10월 모티머가 에드워드 3세의 친위 쿠데타로 몰락한 뒤, 잉햄은 노팅엄에서 에드워드 3세가 급파한 군대에 체포된 뒤 런던 탑으로 압송되었고, 10월 22일 재산과 토지를 압류당했다. 하지만 1330년 12월 8일 에드워드 3세의 용서를 받고 재산을 돌려받았다. 1331년 6월 29일 가스코뉴 세네샬로 재임명된 뒤 가스코뉴의 평화, 질서, 방어를 책임졌다. 1336년 8월 프랑스의 재침이 가시화되자, 모든 가스코뉴 무장병이 허가 없이 땅을 떠나는 것을 금지하고 모든 주요 거점에 적절하게 수비대를 배치하고 장비를 갖추며 식량을 공급하도록 명령했다.
1337년 5월 24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아키텐 몰수령을 선포하고 프랑스 위원들을 가스코뉴에 파견했다. 잉햄은 리부르네에서 그들을 만나 가스코뉴를 넘기길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아게네에서 군사 활동을 벌여 프랑스군과 전투를 치렀다. 에드워드 3세는 거리가 먼 가스코뉴에 가는 대신 프랑스 북부를 공격해 프랑스의 시선을 그곳으로 돌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 때문에 잉햄은 잉글랜드로부터 군대와 자금을 받지 못하고 전적으로 가스코뉴인들의 지원에 의존해 프랑스에 대적해야 했다. 그는 펜다제네를 상실했지만 보네가르데 및 다른 거점을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1339년 보르도에 대한 프랑스군의 공세를 가까스로 격퇴했다. 그해 말에는 남프랑스의 강력한 귀족인 알브레 영주 베르나르 에르지 5세를 회유해 잉글랜드 편으로 돌려놓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343년 고령을 이유로 가스코뉴 세네샬에서 물러난 후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1344년 1월 29일 잉햄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엘리자베스 주쉬(? ~ 1350): 초대 주쉬 남작 윌리엄 라 주쉬의 딸.
- 올리버(? ~ 1326)
- 존(? ~ 1339)
- 엘리자베스(? ~ 1344)
- 조앤(? ~ 1365): 노킨의 기사 로저 르 스트레인지와 초혼, 베데일의 기사 마일스 스테이플턴과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