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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20:12:26

와룡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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臥龍生 (1930 ~ 1997)

1. 개요2. 이력3. 한국에서의 와룡생4. 작품 목록

1. 개요

대만무협소설 작가. 와룡생이란 이름은 필명이며 본명은 우학정(牛鶴亭, 뉴허팅)이다.

대만에 신파(新派) 무협을 정착시킨[1]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사마령, 제갈청운과 함께 대만무협의 삼검객(三劍客)으로 불린다.

2. 이력

3. 한국에서의 와룡생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무협작가라고 하면 아무래도 김용이겠지만, 국내 무협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무협작가는 아마도 와룡생일 것이다.[8]

와룡생은 1960~80년대까지 20여년간 한국에서 많은 인기를 끈 작가로[9], 오늘날 한국 무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대 배경이 모호한 강호에서 구파일방과 악의 세력이 정사대전을 벌이는 식의 이야기'는 와룡생의 영향을 제법 받았다.[10] 한국 무협계에서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정파, 사파의 구분도 와룡생의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11] 절벽에서 떨어진 주인공이 비급을 얻는다는 기연이나 춘약에 중독된 주인공을 여주인공이 몸으로 해독해 준다는 클리셰도 와룡생이 유행시킨 것이다.

와룡생은 거의 모든 작품이 한국 무협소설 작가들에게 표절당한 작가이다. 70~80년대가 표절이나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던 시절이라 큰 문제 의식도 없이 그냥 베껴쓰는 경우도 많았는데,[12] 한두 군데도 아니고 참으로 열심히 베껴대서 무협소설의 역사에서 가지는 위상과는 별개로, 현재 대한민국 독자들이 와룡생 작품을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식상한 이야기라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의 무협소설가 좌백은 와룡생의 의의를 무협에서 역사를 제거한 것으로 보았다. 그의 소설을 시작으로 무협이 중국의 역사라는 배경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특정한 시대로부터 자유로워진 판타지 세계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좀 더 논의는 필요하겠지만, 실제 와룡생의 작품에서 국가 공권력은 잘 비춰지지 않고, 무림인들은 백주대낮에 칼을 들고 싸우며 몇천 명이 무리지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사투를 벌인다. 또 강호무림인은 정파와 사파, 구대문파와 무림세가로 나누어져서 싸움을 벌인다.#

이러한 작품의 특성은 군벌내전기를 겪은 와룡생의 인생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국공내전을 겪으며 소년병으로 복무하기도 한 와룡생에게 공권력은 역설적으로 와닿지 않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고로 소설에 등장하는 각 무림 문파는 중국 각지에서 할거하던 군벌의 투영이며 정파와 사파는 극한으로 치닫던 당시 이념 대립의 투영이라는 식의 주장이다.

4. 작품 목록

대만에서 찍은 위작과 국내에서 멋대로 이름을 붙인 위작 때문에 따로 와룡생 진품 목록이 돌아다니는데, 대표작은 다음과 같다.


[1] 와룡생은 어릴 적부터 구파(舊派) 무협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작가로서 감을 쌓았다고 한다.[2] 덕분에 와룡생은 무협 작가들 중에서 문장력이 형편없는 작가로 손꼽힌다. 실제로 와룡생의 초기 작품들은 연재 중인 신문사의 편집자들이 와룡생이 보낸 원고의 문장들을 매끄럽게 다듬어서 신문에 실은 경우가 대다수였다고 한다.[3] 다만, 풍진협은의 후반부는 다른 사람의 대필이라고 와룡생이 직접 증언했다. 풍진협은을 연재하던 중 와룡생이 교통사고를 당해 연재를 할 수 없게 되자 신문사가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소설을 완결시켰다고 한다.[4] 한국에서도 VHS로 나왔는데 여타 대만산 무협 영화와는 달리 영어 더빙 버전으로 나왔다.[5] 본명은 진유(陳瑜). 1925년 저장성 출신.[6] 본명은 이병곤(李炳坤). 1937년 허난성 출신.[7] 단순히 작은 사기 사건이 아니라 대만 경제 역사상 최대급 규모의 경제 범죄 사건으로 피해자만 16만명, 피해액은 948억 대만 달러였다. 범죄의 수법은 1980년대 일본에서 터진 도요타상사 사건과 유사하다.[8] 크게 보면 와룡생, 고룡, 김용 작품들이 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와룡생이 세계관 등 기본적인 영역에서 많은 영향을 줬다면, 고룡은 특유의 문체와 작풍 등에서 영향을 줬고, 김용은 그 세계관과 분위기 속 주요 문파(무당파, 화산파, 개방, 마교 등)들의 설정과 특징에 많은 영향을 줬다.[9] 오죽하면 다른 작가들, 심지어 김용 작품조차 와룡생의 이름을 달고 막 찍어내던 시기도 있었다. 국내에서 비디오로 출시된 무협시리즈 중 심검(心劍)이란 드라마의 케이스에도 와룡생 원작이라고 버젓이 붙어있었다. 실제로는 와룡생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데도 말이다.[10] 다만 항목에도 있듯 와룡생의 구파일방은 오늘날의 구파일방과는 약간 다른 개념이긴 하다.[11] 이에 대해 와룡생이 1920~40년대 중화권 무협 작가들의 문풍/파벌 대립(남파와 북파)을 참고해 정파와 사파 개념으로 치환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12] 70~80년대 로봇이 나오는 극장판 한국 애니메이션이 대표적인 사례. 많은 캐릭터와 메카닉이 일본 애니를 베꼈는데, 저작권에 깐깐한 일본 측이 여기에 대해 일일이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당시 한국의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대부분 일본 업체의 하청을 맡아 성장하였는데, 원청 회사들이 엄청난 작업량을 할당하면서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웠지만 큰 군말 없이 묵묵히 작업에 임한 한국 하청업체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그랬다는 카더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