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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22:15:47

와르카

1. 개요2. 상세

1. 개요

파일:와르카.png

두만강 일대에 거주하던 여진족 집단을 부르던 명칭. 한국말 오랑캐의 어원이 되는 집단이다.

2. 상세

와르카는 종족 명칭이라기보다는 지방 이름에 가까웠다. 일반적인 지명이 그렇듯,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와르카인지 딱부러지는 설명은 없다. 조선에서는 6진을 감싸는 동량북(東良北)[1]에서 야춘(夜春)[2]의 지역으로 파악했는데[3], 즉, 두만강 주위 평야지대에 살던 여진족들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한자표기는 올량합(兀良哈), 올랑합(兀郞哈), 오랑합(吾郞哈) 등이 있다.

이들이 처음 한국사에서 등장한 것은 1391년 공양왕 시기로, 고려에 내조했다고 한 기록이 그것이다.관련 고려사 내용 와르카 지역 여진족 유력인물들은 한양으로 내려와 국왕을 알현하고, 관직 등을 제수받았다. 상을 받은 이들은 와르카로 돌아가 그지역 여진족들이 조선을 약탈하지 않도록 통제했다. 먼터무 사후 두만강 유역이 혼란한 틈을 타 조선은 이 지역에 6진을 설치했고, 와르카의 상당수가 조선에 예속되었다.[4] 이후 6진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와르카는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북방 이민족 세력이 되었다.

명나라 영락제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와 몽골 견제 목적으로 여진족이 살던 곳에 수많은 위소(衛所)를 설치했다. 와르카 지역도 마찬가지로 위소가 설치되었는데, 이름은 모련위(毛憐衛)였다. 조선 세조 시기 모련위의 유력자 낭발아한(浪孛兒罕)이 조선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에 조선은 낭발아한을 정벌하고 명나라에 사후통보 했는데, 명나라에서 딱히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후로도 조선은 와르카 지역에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와르카는 성종 시기까지 온갖 말썽을 일으키다가 1500년대 이후로는 별 문제없이 조용히 지냈다. 와르카는 조선의 국경에 걸쳐있었는데, 이에 따라 조선은 국경 내에 있는 와르카를 성저야인(城底野人), 국경 밖에 사는 와르카를 심처야인(深處野人)이라 불렀다. 그리고 조선은 성저야인을 울타리로 삼아[5] 6진 지역을 보호하게 했다. 하지만 중종 이후로 조선은 여진족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결국 1583년 6진의 번호였던 니탕개가 주위 여진족을 끌어모아 대대적인 약탈행위를 벌인다. 니탕개의 난은 이전과는 급 자체가 달랐던 초대형 약탈이었다. 조선은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조선의 군사체계와 북방방어체계를 재정비한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진군하면서 이 지역에 있던 노토 부락을 건드려보기도 했다.

16세기 말, 건주위를 통합한 누르하치는 와르카 지역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누르하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구 수급이었다. 주위의 명나라, 몽골, 조선과 비교했을 때 인구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누르하치는 같은 언어를 쓰는 족속은 모두 만주라 주장하며 주위 퉁구스계통의 사람들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상당한 인구를 가지고 있던 와르카는 매우 탐이 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울라의 부잔타이도 이 지역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들은 와르카를 두고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와르카인들은 누르하치, 부잔타이, 조선 중 하나를 택해 귀부했다. 초반에 우세했던 부잔타이는 결국 누르하치에게 패하고 말았고, 누르하치는 두만강 북쪽에 있는 와르카 사람들을 허투알라로 이주시켰다. 홍타이지도 여전히 이 지역에 남아있던 와르카인들을 청나라로 이주시켰다. 이후 후금은 조선 내로 이주한 와르카, 여진족의 쇄환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병자호란 이후로는 더욱 노골적으로 와르카 사람들의 쇄환을 요구했고, 조선에게 이는 큰 부담이었다. 1644년 순치제 즉위 직후, 도르곤의 대조선 유화정책 일환으로 와르카 송환을 중지시키면서 와르카 송환 문제도 가라앉게 된다. 이후 조선에 남아있던 와르카인들은 조선에 동화되었다.

와르카의 어원은 알 수 없다. 혹자는 몽골의 우량카이에서 왔다고 주장하지만, 원나라, 명나라 시기 우량카이는 두만강 유역으로 온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들이 거주했던 곳은 헨티산맥, 대흥안령 산맥, 연산산맥 등으로, 두만강의 와르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명나라에서 우량카이족을 가리키던 올량합(兀良哈)과 조선에서 와르카를 가리키던 올량합(兀良哈)의 한자가 같았기 때문에 간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와르카의 한국발음인 오랑캐는 점차 북방 이민족을 지칭하는 말로 발전했고, 조선후기에 이르러 이민족에 대한 멸칭이 된다.


[1] 무산군 내 지명 중 하나[2] 훈춘의 옛 이름[3] 관련 조선왕조실록 내용[4] 회령, 종성, 온성, 경원이 와르카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이다.[5] 번호(藩胡), 번리(藩籬) 등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