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야마 보쿠스이 [ruby(若山, ruby=わかやま)] [ruby(牧水, ruby=ぼくすい)] | |
출생 | 1885년 8월 24일 미야자키현 히가시우스키군 도고정 (現 미야자키현 휴가시) |
사망 | 1928년 9월 17일 (향년 43세) 시즈오카현 누마즈시 |
국적 | 일본 |
학력 | 와세다대학 영문학과 졸업 |
직업 | 가인(歌人) |
문학 활동 | 자연주의 문학 |
대표작 | 『이별(別離)』 (1910년) |
데뷔작 | 『바다 소리(海の声)』 (190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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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가인.본명은 와카야마 시게루(若山繁). 18세 때부터 호를 보쿠스이(牧水)로 칭하기 시작한다. 유래는 당시 가장 사랑하던 것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牧[1]라는 글자는 어머니 이름에서, 水는 자연을 사랑하는 그가 유독 관심을 품었던 계곡과 비를 아우르는 글자를 따온 것이다.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며 자연주의 문학가들과 교류했다. 여행을 좋아했고 일본 전국을 여행하며 부른 단가가 유명하다. 그가 만든 단가만 대략 8000수(首)가 넘는다 하며, 일본 각지에 그가 지은 노래비(歌碑)가 있다. 또한 수필도 작성했으며, 서가(書家)로도 알려졌다.
1911년 '창작사(創作社)'를 세우고 시가 종합지 『창작(創作)』을 주재한다.[2]
2. 연표
메이지 18년 (1885) | 0세 | 휴가시 도고 마을에서 태어나다. |
메이지 29년 (1896) | 11세 | 츠보야 심상 소학교를 졸업한다. |
메이지 37년 (1904) | 19세 | 미야자키 현립 노베오카 중학교를 졸업한다. 와세다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한다. |
메이지 41년 (1908) | 23세 |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녀가집 『바다 소리(海の声)』를 출판한다. |
메이지 43년 (1910) | 25세 | 3번째 가집이자 대표작 『이별(別離)』을 출판한다. |
다이쇼 2년 (1913) | 28세 | 6번째 가집 『미나카미(みなかみ)』를 출판한다. |
다이쇼 7년 (1918) | 33세 | 11번째 가집 『쓸쓸한 수목(さびしき樹木)』을 출판한다. |
쇼와 3년 (1928) | 43세 | 43세로 타계 |
3. 작품
3.1. 단가
- 海の声(1908년 7월 출간)
- 独り歌へる(1910년 1월 출간)
- 別離(1910년 4월 출간)
- 路上(1911년 9월 출간)
- 死か芸術か(1912년 9월 출간)
- みなかみ(1913년 9월 출간)
- 秋風の歌(1914년 4월 출간)
- 砂丘(1915년 10월 출간)
- 朝の歌(1916년 6월 출간)
- 白梅集(1917년 8월 출간)
- さびしき樹木(1918년 7월 출간)
- 渓谷集(1918년 5월 출간)
- くろ土(1921년 3월 출간)
- 山桜の歌(1923년 5월 출간)
- 黒松(1938년 9월 출간)
3.2. 기행
- みなかみ紀行
- 木枯紀行
4. 대표 단가
얼마나 많은 산하 넘어 가며는
외로움 멎을 땅이런가 오늘도 나그네길 떠나네
幾山河越えさり行かば寂しさの終てなむ国ぞ今日も旅ゆく
외로움 멎을 땅이런가 오늘도 나그네길 떠나네
幾山河越えさり行かば寂しさの終てなむ国ぞ今日も旅ゆく
흰 새는 외롭지 않은가 하늘의 푸름
바다의 푸름에도 물들지 않고 떠다니네
白鳥は哀しからずや空の青海のあをにも染まずただよふ
바다의 푸름에도 물들지 않고 떠다니네
白鳥は哀しからずや空の青海のあをにも染まずただよふ
보고픈 속마음 끝내 이루지 못한채 헤어진 먼 사람들아
うら恋しさやかに恋とならぬまに別れて遠きさまざまな人
うら恋しさやかに恋とならぬまに別れて遠きさまざまな人
백옥같은 이에 스미는 가을밤의 술잔은 과연 단정히 들라 하더라
白玉の歯にしみとほる秋の夜の酒はしづかに飲むべかりけり[3]
정취가 다채롭고 서늘한 가을밤에는 여럿이 마시는 술자리보다 혼자서 조용히 즐기는 것이 더 즐겁다는 보쿠스이의 성격과 인간상이 드러났다고 평가받는 구절이다.白玉の歯にしみとほる秋の夜の酒はしづかに飲むべかりけり[3]
쿨쿨, 술잔 넘치며 울리는 소리 외로워 마음도 따라 울리는데
たぽたぽと樽に満ちたる酒は鳴るさびしき心うちつれて鳴る
たぽたぽと樽に満ちたる酒は鳴るさびしき心うちつれて鳴る
잎에 질세라 연분홍 꽃 피어날 제 겨우 고개를 켜누나 산벚꽃은
うす紅に葉はいちはやく萌えいでて咲かむとすなり山ざくら花
연분홍 꽃은 왕벚나무를 의미한다. 왕벚나무는 산벚꽃과는 달리,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특징이 있다. 왕벚나무가 꽃을 피우려 잎보다 먼저 움틀거릴 적에, 산벚꽃이 비로소 피어나기 시작하더라는 의미다. 본문에서 'いちはやく(재빨리)'라는 표현을 쓴 것은 연분홍 꽃에 은유한 왕벚나무 꽃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다.うす紅に葉はいちはやく萌えいでて咲かむとすなり山ざくら花
5. 매체에서
6. 기타
1927년 아내와 함께 약 2개월 간 조선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가 보낸 엽서를 보면 조선을 마음에 들어했음을 알 수 있다.[5] 진도나 금강산 등을 보며 생애에서 제일 긴 여행을 했지만, 여행 이후 몸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결국 생애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하루 한 되 양이 되는 술을 마시던 주당이었다고 한다. 그가 죽은 주 원인이 간경변인데, 사후에 얼마간 썩는 냄새가 나지 않아 '산 채로 알코올에 절여진 게 아닌가' 하고 의사가 경탄한 일화로 유명하다.
1911년 이시카와 다쿠보쿠와 알게 되고, 1912년 이시카와 다쿠보쿠가 임종할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 와카야마 보쿠스이가 쓴 수필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임종"에서 그 때 상황을 조금 알 수 있는데, 그의 용태가 나빠졌을 때 보쿠스이는 다쿠보쿠의 6살난 딸을 데리고 오지만 그는 이미 아버지와 아내 품에서 절명했다고 한다.
[1] 목장할 때 목 자로, 음독으로 보쿠(ぼく)라고 읽는다[2] 한국에선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노래 '구월 밤의 불평(九月の夜の不平) '가 실려있는 걸로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이 외 주영섭, 황순원이 『창작』의 동인이다.[3] 어미의 'べかりけり'는 의무나 추량의 보조사인 べし의 연용형인 べかる에 고전문법에서 회상의 의미를 나타내는 けり가 결합한 형태로, ' ~해야한다 하더라', '(모름지기) ~하는 법이라더라'의 의미를 가진다.[4] 남편이 평소 술만 찾는 것을 싫어하던 아내가 단잠에서 깨 들킨다면 혼날 것이 뻔하므로 조심히 걸어간 것이다.[5] 금강산 내 장안사에서 '장안사 뜰의 작약 한창이구나 / 다가가보니 들리네 꽃향내가'라는 단가를 읊는 등 조선의 자연환경 또한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