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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1 01:35:09

와타나베 쓰네오

와타나베 쓰네오
渡邉恒雄 | Watanabe Tsuneo
파일:渡辺恒雄.jpg
이름 와타나베 쓰네오 ([ruby(渡邉恒雄, ruby=わたなべつねお)])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출생 1926년 5월 30일
일본 제국 도쿄도 토요타마군
(현 도쿄도 스기나미구)
사망 2024년 12월 19일 (향년 98세)
일본 도쿄도
직업 기업인,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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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가이세이중학교 (졸업)
도쿄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철학 / 학사)
경력 요미우리신문 대표이사, 주필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 대표이사 회장
일본신문협회 회장
요코즈나 심의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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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성향4. 프로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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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언론인이자 기업인. 통칭 '나베쓰네'(ナベツネ)로 불리며 일본 언론, 정치, 스포츠계에 거물로 군림했다.

2. 생애

1926년 5월 30일 도쿄 스기나미구에서 태어나 가이세이중학교, 구제 도쿄고등학교를 거쳐, 도쿄대학을 졸업했다. 도쿄대 재학중이던 1945년에는 육군에 징집되었으나 패전이 임박한 8월 15일[1] 제대하여 전쟁에 희생되지는 않았다. 1947년에는 잠시 일본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1950년 도쿄대에서 대학원 연구과정을 수료한 후 요미우리 신문에 입사하여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였다.[2] 이 때 자유민주당에 출입하면서 오노 반보쿠 등 자민당 중진과 친분을 쌓으면서 사주 쇼리키 마쓰타로의 비호 아래 자민당 정권에 직접 관여하게 된다.

특히 중요한 것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의 관계로, 나카소네에게 오노 반보쿠,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지를 이끌어 각료를 거쳐 총리에까지 이끄는데 역할을 했다.

거물 기자가 된 와타나베는 1985년 요미우리 신문의 주필이 되어 요미우리의 우익 노선을 이끌었으며, 경영자로서도 1991년 사장, 2005년 그룹 회장에 올랐다. 또한 198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이사진으로 들어간 후 1996년에는 창업주 쇼리키 일가에 이어 구단주직에 올라 일본프로야구계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평생 기자'를 내세우며 90세가 넘은 고령에도 활발히 활동해 왔으나, 2024년 12월 19일 도쿄도의 한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

3. 성향

일본의 주류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논객으로 특히 1990년대에 본격화된 평화헌법 개정 담론을 주도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를 자칭하는 만큼 극우와는 선을 긋고 있어서, 구 일본 제국의 태평양 전쟁은 명백한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나카소네 이래 이어진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가차없이 비판했다.[3] 심지어 2005년에는 신문사 사업으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망라한 '검증 전쟁책임'(検証 戦争責任)을 간행하였다.

4. 프로스포츠

원래 스포츠와 인연이 있던 인물은 아니나 요미우리 신문의 최고경영자 반열에 들면서 산하 스포츠 팀에 강하게 관여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존재감이 나타났던 대목이 1990년대 J리그의 헤게머니 다툼으로 리그 회장 가와부치 사부로와 대립한 것과[4] 2004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해체 문제로 촉발된 프로야구 구조 개편 분쟁이다.

다만 요미우리의 영향력과 별개로 위의 두 사안에서는 모두 와타나베의 의중과 반대의 결과로 이어졌으며, 요미우리 자이언츠 또한 와타나베가 구단주로 있는 동안 그 이전에 비해 성적이나 흥행력 면에서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5]


[1] 전쟁이 정식으로 마무리된 것은 항복 문서가 조인된 9월 2일이며, 와타나베는 일본이 쇼와 덴노옥음방송으로 사실상 패전을 선언하기 직전에 제대 조치되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은 사상 통제의 문제로 대학생을 마지막까지 징집하지 않았다가 막판에서야 병사로 징집하고 영내 폭력으로 깔아누른 바 있다.[2] 원래 아사히 신문 쪽을 지망했지만 아사히 입사전형은 떨어졌다. 현재는 지위가 역전되었지만 와타나베의 입사 때는 아사히의 입지가 더 높았고, 요미우리는 간사이 진출조차 이루지 못한 도쿄 지방지에 불과했다.[3] 자민당 정치인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피하는 경우 대체로 중국과의 관계를 우려하는 소치인 데 비해 와타나베는 명백히 전범 합사를 이유로 들고 있다. 즉 2차대전 후 연합국에 의해 규정된 전범 처벌을 긍정한다는 뜻이다.[4] J리그는 일본프로야구가 요미우리에 지배당하는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의도적으로 요미우리 등 모기업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폈다. 대표적인 것이 기업명 표기 금지와 실질적인 도쿄 연고 금지로, 경제 불황과 흥행 부진까지 겹쳐 요미우리는 1998년에 축구에서 손을 뗐다.[5] 성적은 센트럴 리그까지는 나베쓰네 구단주 29년간 12번 우승을 따고 있지만 정작 일본시리즈에서 퍼시픽 리그 팀에게 번번히 깨지고 있다. 흥행 또한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