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육군사령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000,#DDD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
허잉친 | |||||
육군총사령 | |||||
제1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구주퉁 | 위한머우 | 장파쿠이 | 구주퉁 | 관린정 |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구주퉁 | 쑨리런 | 황제 | 펑멍지 | 뤄례 | |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류안치 | 가오쿠이위안 | 첸다칭 | 위하오장 | 마안란 | |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하오보춘 | 장쭝령 | 황싱창 | 첸띵총 | 리전린 |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탕야오밍 | 첸전샹 | 훠셔우예 | 주카이성 | ||
육군사령 | |||||
제1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후전부 | 자오시장 | 량텐샤오 | 리샹저우 | 옌더파 |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추궈정 | 왕신룽 | 천바오위 | 쉬옌푸 | 중수밍 | }}}}}}}}}}}}}}} |
<colbgcolor=#007b00><colcolor=#FFF> 출생 | 1896년 9월 22일 |
청나라 광둥성 고요현 | |
사망 | 1981년 12월 27일 |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중정구 삼군총의원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학력 | 황푸육군소학 (졸업) 육군예비학교 (졸업) |
군사 경력 | |
임관 | 바오딩육군군관학교 (6기) |
[clearfix]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천지탕이 2차 양광사변으로 몰락한 이후 월계군벌의 수장이 되었다.2. 생애
1896년 광동성 고요현에서 출생했다. 20세에 광동육군소학 5기로 입학하였으며 무창육군 제2무비학교에 진학하였다. 이후 바오딩 군관학교 6기 보병과를 졸업하였다. 1916년 중화혁명당에 가입하였으며 1919년 북양군 제1사단에 임관하여 반장을 맡았다. 1920년 월군 제3사단 단장으로 옮겼으며 곧 영장으로 승진했고 광저우 헌병사령부 부관장을 맡았다. 1925년, 국민당의 2차 동정에 참가하여 천중밍을 토벌하였다.1927년 제11사단 부사단장으로 승진하여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참가하였으며 1928년 부군장으로 승진하였다. 1931년 1차 양광사변에 참가하여 광저우 국민정부의 제1집단군 산하 제1군 군장을 맡아 7월, 리쭝런, 장파쿠이가 지휘하는 4집단군과 함께 장제스를 지지하는 허젠이 지배하는 호남성으로 진공하여 장제스와 교전하였으나 하북에서 광저우 국민정부 산하의 제5집단군 사령관 스여우싼이 패배하자 퇴각하였다. 이후 8월에 2차 북벌에 나섰으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퇴각하였다. 12월에 영월합작이 이루어지면서 중국 국민당 제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 국민당 4기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2년 서남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고 또한 초적 제1로종대 지휘관에 임명되어 차이팅카이와 함께 제4차 초공작전에 투입되어 대별산맥의 공산군을 토벌하였다. 이후 감상민월 제6수정구 종대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1935년,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국난회의 회원으로 초빙되었으며 11월에 개최된 국민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재선되었다 1936년 6월, 천지탕과 리쭝런이 2차 양광사변을 일으키자 항일구국군 제1군 군장으로 참가했으나 다이리의 포섭을 받고 광동성 수정주임에 임명되자 즉각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날아가 장제스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 천지탕 정권은 붕괴하고 위한머우가 광동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장제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공으로 8월 중앙군교 교무위원회 위원에 이명되고 9월 육군중장으로 승진했다. 10월 제4로군 총사령관을 겸하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제4전구 부사령장관에 임명되었으며 1938년 1월, 제12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광저우 방어를 맡았지만 9월에 벌어진 일본군 21군의 공격에 무력하게 광저우를 내주고 퇴각해야 했다. 이때 자신의 아내까지 버리고 황급히 달아나는 추태를 보였다.[2] 광저우 전선의 붕괴로 중국은 마지막 남은 대형 항구도시를 잃게 되었으며 이어 우한이 함락되면서 모든 대도시를 잃게 된다. 이 패배로 인해 일본의 간첩이라는 전국적인 비난을 받게되었고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장제스는 개인적으로는 일기를 통해 위한머우가 허락도 받지 않고 광저우를 포기했다고 비난했으나 위한머우의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하여 그를 처벌하지 않고 사퇴를 반려하였다. 하지만 위한머우의 정치적 입지가 워낙 좁아졌던 관계로 결국 역시나 월계군벌인 장파쿠이를 신임 4전구 사령장관 겸 광동 수정주임에 임명하였다. 하야 이후 잠시 은거하다가 1940년 제7전구 사령장관에 임명되어 12집단군 총사령을 겸하였다. 1944년 대륙타통작전이 있자 룽윈, 장파쿠이 등과 함께 리지선의 반장운동을 지원하였다.
1945년 5월, 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재선되었으며 중일전쟁이 종결된 후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이들을 무장해제시켰다. 이후 2급 상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2월 위주(衛州) 수정공서 주임을 맡았다. 1948년 5월 중화민국 육군총사령에 임명되었고 1949년 1월 21일, 장제스는 총통에 하야하기 직전 마지막 조치로 위한머우를 광저우 수정공서 주임, 장파쿠이를 해남특별구 행정장관, 주사오량을 푸저우 수정공서 주임, 탕언보를 경호경비총사령, 장췬을 충칭 수정공서 주임에 각각 임명하였다. 광저우 수정공서 주임 기간 푸젠성에서 공산군에 투항하려는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다. 8월 옌시산 내각에서 화남군정장관을 맡게 되었다. 국부천대가 이뤄지자 화남군정장관으로 하이난에서 최후의 방어를 펼쳤으나 1950년 하이난이 함락되면서 1950년 5월 대만으로 이주하였으며 총통부 전략고문에 임명되었다. 1957년 국민당 중앙평의회 의원에 선출되었고 1965년 1급상장으로 진급했다.
1981년 12월 27일, 타이베이의 삼군총의원(三軍總醫院)에서 병환으로 사망했다.
3. 매체에서
호이4에서 중화민국 군사고문으로 등장한다. 육군 병참전문가로 사단 소모 8% 감소 효과를 가져다 준다.4. 참고문헌
- 민국인물대사전, 하북인민출판사.
- 로이드 이스트만,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지식산업사.
- 레이 황, 장제스 일기를 읽다, 푸른역사.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대명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