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필드 S. 커닝엄 Winfield S. Cunningham | |
본명 | 윈필드 스콧 커닝엄 Winfield Scott Cunningham |
출생 | 1900년 2월 16일 |
미국 위스콘신주 록브리지 | |
사망 | 1986년 3월 3일 (향년 86세) |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 |
복무 | 미합중국 해군 |
최종 계급 | 미국 해군 소장 |
복무 기간 | 1920~1950 |
학력 | 미국해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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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위스콘신주 록브리지에서 태어나 1920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수송선 USS 마사 워싱턴함 소속으로 프랑스, 지중해 인근을 항해했다. 이후 중국에서 복무하다가 대위로 진급했다. 중국에 있던 시절 조종 특기 교육을 지원했고 수료 후 항공대 소속이 되었다.1936년 소령으로 진급했고 편대장으로 활동했다. 1941년 중령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그가 복무하고 있던 웨이크섬에 일본군이 들어오자 최대한 저항해 인명피해없이 1차 상륙을 저지했다. 이후 해안포 조준경과 예비 부속품, 사격통제레이더 등 보급품 목록을 보냈다고 한다. 다만, 기자들에게는 개전 초 연속된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국민들을 위한 선전으로 "일본놈을 더 보내라!"고발표되었다.
하지만 지원오는 부대가 대규모 일본 해군 선단을 발견했지만, 진주만 공습 이후 얼마 남지 않은 해군 함대를 사지로 내몰 수 없다고 판단하여 23일 밤에 회항했다. 2차 상륙당시에도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거점이 하나둘씩 함락되었고 함포지원까지 가하자 오전 8시 수비대는 항복을 결정했다. 그 와중에도 통신망 두절 때문에 지휘부가 항복하기로 결정했음을 전파받지 못한 소부대들이 자체적으로 반격하여 일본군이 일시적으로 큰 피해를 입고 패퇴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제임스 데버루 해병소령에게 항복 권유를 하도록 시켰다. 24일 13시 30분을 기해 잔존부대가 모두 항복함으로써 태평양 전쟁 초기 가장 격렬했던 전투는 이렇게 미 해병대의 패배로 끝났다.
포로로 잡힌 후 상하이에 있는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여러번 탈옥을 시도했으나 번번히 잡혔다. 종전 후 석방되었고 해군십자장을 포함 여러 훈장을 수여받았다. 회복기간을 거친 후 항공대에 복귀했다. 1947년 소장으로 진급했고 1950년 제대했다.
제대 후 회고록을 집필하다가 1986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