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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7 06:47:16

유비의 입촉(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유비의 입촉
장소
익주
기간
213년 ~ 215년
교전세력 유비군 유장군
지휘관 유비
관우
장비
황충
법정
방통
유장
유순
황권
장임
냉포
상존
부금
양회
고패
병력 2만 4천 약 5만[1]
피해 규모 피해 불명 2만 이상

1. 개요2. 배경3. 진행
3.1. 부성~백마관3.2. 면죽관3.3. 낙성~성도 평야 전투3.4. 동오의 개입과 유장의 투항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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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절히의 대체역사소설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에 등장하는 가공의 전쟁. 원 역사의 유비의 입촉을 다듬어 완벽한 명분과 밑준비를 끝낸 유비의 입촉을 위한 유장과의 전쟁이다.

2. 배경

유비는 서량 전투와 상용 전투로 마침내 한중 일대의 정리를 완성했다. 장완의 보조를 받는 마초는 점차 서량을 장악하고 있었고, 유비와의 동맹도 굳건해 스스로 자식들 둘을 맡길 정도로 명목상 동격인 것과는 달리 사적인 자리에서는 유비를 상사로 대우할 정도로 완전히 친 유비 인사가 되었다. 조조 역시 상용에서 악진이 무승부를 거두고 돌아오자, 굳이 무리해서 유비와 2차전을 벌이기보단 위 공국 건국이나 유수구 전투 등 자신의 왕조 개창을 위한 정치적 행위에 집중하면서 한중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또한 원 역사보다 훨씬 강력한 명분이 생겼으니, 바로 조조의 위공 즉위 행위였다. 유장의 선대 유언은 종친 직위를 이용해 익주를 차지했고, 유장과 유비의 우호 관계도 둘 모두가 한실의 방계라는 공통점에 기반했기에 유비가 조조에 맞서자고 요구하면 유장은 거부할 수 없는 처지였다.

방통은 유장이 받아들인다면 5만 정병을 동원할 것을 요구하고, 거부한다면 이를 명분 삼아서 유장을 공격하기로 한다. 그러나 당장 인접한 장로를 치는데도 주력군을 동원하지 못한 유장이, 대 조조 동맹에 대군을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결국 전쟁은 시작된다.

3. 진행

3.1. 부성~백마관

상용에서 귀환한 유비는 관우에게 일군을 주어 파군을 뚫고 낙성에서 합류하게 하고 자신은 이미 준비를 마친 채 대기중이던 2만 4천을 이끌고 빠르게 남진한다. 첫 관문인 부성을 지키던 유순은 8천 병마로 저항하나 아무리 공성전이라지만 병력 차이가 3배에 정예병인 동주병의 수가 너무 적었다. 이에 백마관에서 양회와 고패가 이끄는 지원군을 보내나 장비가 이끄는 정예 기병에게 역격당해 물러나고 사기가 떨어진 유순은 부성을 버리고 백마관으로 퇴각한다.
그러나 퇴각도 순조롭지 못했으니 양회와 고패를 격파한 장비의 계략에 넘어가 다수의 유비군이 길을 막은 줄 알고 이도저도 못하는 상태로 놓여있다 쫓아온 유비에게 잡힐 위기에 놓인다. 유비에게 잡힐뻔했던 유순은 장임의 분투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나 기존의 관을 지키던 양회와 고패가 부성을 지원하려다 크게 패하고, 유순도 간신히 패잔병을 수습해 들어온 백마관이 방어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을리 없었다. 이에 다소 무리하는 걸 감수하고 즉시 공격한 유비군에게 백마관도 맥없이 함락되고 유비군은 파죽지세로 면죽관까지 나아간다.

3.2. 면죽관

면죽관에 접근하면서 성도가 가시권에 들어온 상황 속에서 유비군과 각지에 조조의 복씨 일가 참살 소식이 들려온다. 면죽관 앞에 도달해 그 소식을 접한 유비는 즉각 조조에게 살해당한 복황후를 추모하는 제사를 올리며 명분을 강화했고, 이에 조조가 황좌를 찬탈할 것이라는 유비의 경고가 사실임을 깨달은 인근의 익주 호족들이 유비에게 호응한다. 유장은 그런 유비를 영격하러 이엄에게 군사 1만을 들려 줬으나 남양 출신이라 지인들이 전부 유비 쪽에 있는데다, 한 황실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까지 등에 업은 유비와 싸울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이엄은 즉시 유비에게 투항했고 지원군이 항복하는 걸 본 면죽관도 백기를 든다.

3.3. 낙성~성도 평야 전투

어정쩡한 중책을 골라 3년이나 걸린 원역보다 훨씬 빠르게 낙성까지 도달한 유비군 본대는 강주, 파군 일대를 돌파한 관우와 합류한다.[2] 이때부터는 유장도 유능한 황권의 전략을 받아들여서 동주병을 주력으로 한 방어선을 치고, 외부에서 조조, 손권 등을 끌어들이려 한다. 이 작전은 원 역사에서도 먹혀서 유비가 낙성과 성도 포위전에서만 연 단위로 고전하게 만든 전술인지라 유비도 난감해하며 군의를 여는 데 법정이 우군의 기병 1,500기를 우회시켜 성도 평야를 약탈하자는 계책을 올린다. 동주병의 재산과 가족들이 있는 성도 평야가 약탈당하면 동주병들이 방어로 일관할 수 있을리가 없다는 점을 찌른 간편하고 좋은 계책이었으나 유비군의 모토인 인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라 관우가 앞장서서 반대했고 이에 장비가 다급히 중재하는 등 일이 복잡해진다.
유비는 하룻밤을 지샌 고민 끝에 원 역사의 유비가 걸은 인의의 길을 선택, 법정의 계책대로 우군의 기병 1,500기를 우회시키되, 약탈은 하지 않고 관우와 장비를 내세워 동주병을 끌어내 야전으로 격파한다는 정공법을 설립한다.
관우와 장비를 우회시킨 이후, 유비는 2만여 병력으로 낙성 공성전을 시작하고 방통의 조언을 따라 동주병들이 실전 경험이 떨어지고, 충성심도 없는 이상 군기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노려 가벼운 견제를 지속시킨다. 그러는 동안 낙성을 우회해 성도 평야에 들어선 기병들이 짚단을 대거 모아 불을 질러 성도 평야가 약탈당한 것처럼 꾸미자 과거에 비슷하게 당하고 익주에서 본인들이 비슷한 짓거리를 저지른 이력이 있던 낙성의 동주병들은 패닉에 빠진다. 유비군이 이 때를 노려 진심으로 공격해오자, 동주병의 군기는 급속히 무너졌다.
이에 동주병 지휘관 부금과 상존, 책사 정도는 지금 성도 평야에서 깽판을 치는 유비군 기병을 대군을 출격시켜 요격하고 그대로 낙성까지 합류시키는 작전을 제안한다. 이때 저 셋은 동주병 3만명 대부분을 동원하길 원했으나, 유장이 불안함을 느껴서 1만명 만을 내줬고 부금과 상존은 1만 동주보병을 지휘해 성도 평야에서 야전을 벌인다.
부금의 선발대 3천은 장비의 기병 1천기가 공격해오자 수레와 장창, 강노 부대로 반격에 성공한다. 잠시 후 상존의 본대가 합류하자 부금과 같이 준비를 해서 다시 유비군과 싸움을 벌이나 관우가 몰아온 짐승 떼에 의해 보병 부대의 진열이 흔들리는 사이에 들이닥친 기병 돌격에 진형이 박살 나버린다.

사실 장비는 선발대와의 초전에서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덕분에 동주병의 진열은 자신들의 대기병 전술이 더 조밀하게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을 모른 채로 유비군과 승부에 나섰고 결국 제대로 뚫려버렸다. 상존은 대열을 뚫고 난입한 관우에게 목이 떨어지고 부금은 관우, 장비가 일부러 놓아준 줄도 모르고 낙성으로 달아난다. 수비를 책임진 장임이 제지하기도 전에 유순이 독단으로 이들을 성에 들였고 가뜩이나 후방 걱정에 침체되어 있던 동주병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진다. 며칠간의 느슨한 공격으로 시간을 끌며 낙성의 허실을 찾던 방통은 오랜 평화로 생겨난 사각지대[3]들을 찾아냈고 이 사각지대들을 이용해 황충이 이끄는 공격부대가 손쉽게 성벽에 다가가는 데 성공하면서 성도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낙성은 그대로 함락된다.

3.4. 동오의 개입과 유장의 투항

낙성이 열린 이상 성도성까지 대군이 사용할 길이 열렸고, 광한성도 2천 정도의 병력으로 포위한 이후 유비군은 천천히 익주를 차지할 방안을 수립한다.

그러나 이 때 형주에서 급보가 전해지는데 다름 아닌 동오군의 침공이었다. 제갈근이 익주에 사신으로 와 형주 반환을 요구했고, 대도독 노숙이 여몽, 감녕 등을 지휘해 3만 대군으로 장사, 계양을 들이치고 있었다.

유비는 어쩔 수 없이 장비와 법정, 방통을 1만 5천 병력과 같이 낙성에 남겨서 유장을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2만 병력을 이끌고 관우와 함께 형주로 떠난다. 남형주 임상 방면에서 대치가 길어지며 익주 전선은 암묵적인 휴전 상태에 들어간다. 유비가 자리를 비운 3개월 간 낙성을 공격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성도의 수비병 2만 남짓에 쫓겨온 패잔병이 가진 세력의 전부였던 유장은 이미 동주병을 야전에서 크게 깨뜨린 유비군을 상대로 도박을 거는 대신 가만히 지키는 쪽을 택한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 한 상태에서 유비가 이끄는 본대가 손권의 막료인 제갈근에 손오의 군기와 갑주를 갖춘 군사까지 대동해 도착하자 유장의 항전 의지는 완전히 사라졌고 동주병의 땅과 재산을 보전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자마자 투항한다.

4. 결과

215년 유장이 항복하는 것으로 원역사에선 3년여가 걸린 입촉이 불과 2년도 걸리지 않아 끝났다. 얼핏 보기에는 그렇게 큰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원 역사에선 입촉이 끝난 뒤에 벌어지는 익양대치를 임상대치로 대체하고 주인이 바뀌기 이전인 한중 점령(한중 공방전)에 이루어지지 못한 서량 진출까지 전부 병행하며 비슷한 시기에, 훨씬 적은 손실로 익주를 차지한 것이다.[4] 원 역사에선 잃거나 투항을 거부하고 죽은 방통, 장송, 장임 등의 인재들도 한 명도 잃지 않았다.

조조에게 점령 당한 후 백성들이 강제 이주 당한 텅 빈 땅인 한중을 점령해 바닥부터 재개발하다 제갈량 시기에야 군사도시로 기능시킬 수 있었던 원 역사와 달리 조조보다 먼저 한중을 상대적으로 멀쩡한 상태로 점령해 서량, 익주, 형주를 중계하는 전진 기지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서량 민심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마초의 재기를 도와 위수 이남을 확보함으로서 북벌이 훨씬 편해졌다.[5]

최종적으로 손권에 뒤지지 않는 대세력이 된 유비는 유파, 황권, 장임 등 익주계를 막하에 들이고 북벌을 위한 내부정비에 나선다.


[1] 정예 동주병 약 3만.[2] 부성에서 백마관-면죽관-낙성&광한성-성도 순으로 쭉 이어진다.[3] 성 주변 땅을 고르게 다져 엄폐할 수 없도록 해야 하는데 오랜 시간 정비하지 않은 동안 야트막하게 경사진 부분이 생겨나 그 아래 몸을 숨기고 성벽 아래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4] 익양대치에서는 손권이 실효지배 상태였던 장사-계양-영릉을 넘겨주는 협약을 했다면 임상대치는 유비가 동오의 선봉장 감녕을 전사시키고 장사와 계양을 실효지배한 상황에서 손권에게 양보해준 셈이 되어 영토 뿐만 아니라 명분 상에서도 이득을 봤다.[5] 물론 조조 역시 이를 방치하지는 않은 상황이라 한수의 사위인 염행을 앞세워 서량의 형세를 뒤집을 궁리를 하는 한편 동오를 지속적으로 압박해 유손 동맹의 균열을 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