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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4 14:36:41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파일:빈 세로 이미지.svg
장르 대체역사, 빙의
작가 간절히
출판사 KW북스
연재처 문피아
연재 기간 2024. 12. 09. ~ 연재 중

1. 개요2. 줄거리3. 연재 현황4. 특징5. 등장인물
5.1. 한중5.2. 서량5.3. 익주5.4. 동오5.5. 조위5.6. 형주
6. 개변된 역사7.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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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삼국지 대체역사물 웹소설. 작가는 간절히.

2. 줄거리

촉빠였던 곽선호

유원지에 생긴 싱크홀에 빠져 후한 말 군웅 중 한 사람인 유비의 몸에 빙의하게 된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략

강대한 조조, 견고한 기반을 가진 손권과 대결해 천하쟁패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3. 연재 현황

문피아에서 2024년 12월 9일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4. 특징

중국 중세사 석사 학위까지 받고 대학원을 졸업한 20년 진성 촉빠 곽선호가 웹상에서 촉빠들이 위빠오빠들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한 상황을 한탄하다가 싱크홀에 빠져서 입촉 직전의 유비에 빙의하는 소설.

곽선호가 빙의한 시점은 유비가 익주 가맹현에서 한중의 장로를 친다면서 출병은 안하고 와병하는 척 군대와 물자를 모으던 건안 17년(212년)쯤 시점이다. 빙의한 곽선호는 일견 보기엔 제갈량의 융중대가 주장한 입촉이 합리적 전략 같지만 실제론 단점이 명확하다는 점을 파악하고[1][2] 입촉 대신에 유장과의 약속대로 장로의 한중을 공격하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5. 등장인물

5.1. 한중

본래 장로의 영지였으나 유비(곽선호)가 공격해 차지했다. 이후 유비의 서량 진출을 위한 발판이 되어주고 있다. 시작 시점에선 관우, 장비, 제갈량 등 유비군의 주축이라 할 만한 다른 인재들은 형주측에 남아있는 데다 익주, 상용 등은 아직 차지하지 못해 유비군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형남과는 분리되어 있다.

서량에서 마초 구원에 성공한 뒤 관우, 장비를 소환하여 본격적인 입촉 준비를 시작한다.

5.2. 서량

5.3. 익주

후한 13주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주. 풍족하고 크지만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낙양에서 내려온 유언의 뒤를 이어 유장이 통치하고 있다. 유장이 외부 진출을 하지 않은 데다가 폐쇄적인 곳이다보니 외부에선 이 곳의 정보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5.4. 동오

손유동맹을 유지하는 양주의 세력. 200년대 후반부터 적벽대전-남군 공방전-유수구 전투까지 조조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이는 조조의 본거지인 기주 업성에서 그나마 가까우며 기병 전력이 약한 동오의 특성상 반격에 한계가 있다는 점 때문. 과거 형주 공방전 이후 남형주의 남군 일대를 유비에게 빌려줬으나 이는 많은 논란이 있는 부분이라 언제든 마찰이 될 수 있다.

5.5. 조위

작중 시작 시점에는 위공 즉위 이전이므로 조조군이었으나 213년 위공으로 즉위했다. 하북 4주(유,기,병,청) 서주, 예주, 낙양, 장안을 차지한 작중 최대세력. 량주의 마초, 양주의 손권, 형주의 유비, 익주의 유장 등만이 조조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상황이며 이들 모두 조조를 경계하고 있다.

5.6. 형주

유비가 적벽대전 이후 주유를 위시한 동오의 지원을 받아 얻은 땅. 인구가 많은 북부는 조위의 영역에 있으나, 유비가 기반을 다지고 여러 인재들을 모은 중요한 지역이다. 원 역사처럼 손유간 분란이 될 소지가 높은 땅인데 유비(곽선호)는 익주를 오롯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조조 사망에 맞춰 익주와 형주에서 동시 진격하기까지 몇년만 붙들고 있으면 된다 여기며 영영 자기 것으로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다.

형주 절반 가량만 차지한 상태에서 관우, 장비, 유봉을 한중으로 소환하여 전력이 더 줄었다.

6. 개변된 역사

7. 평가

전작 '강감찬 천지를 껴안다'의 실패로 절치부심하던 간절히가 비장의 수로 '유비 빙의'를 선택했다는 평가가 많다. 간절히 작가의 경우엔 그 동안의 삼국지물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들을 선택한 적은 많았어도 이렇게 삼국 군주 중 하나인 유비 같은 거물을 주인공으로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덕분인지 연재 15화만에 선작 1100명을 넘는 등 초반부터 화제는 제법 끌어 유지하는 중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작품과 비교해도 유비가 워낙에 경박하고 격식없는 말투를 사용해서 원 역사 유비의 출생(유협 출신)에 현대 젊은이 곽선호의 영혼이 빙의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너무 어색하다는 불평이 있다.[31]
[1] 유비가 유표 사후에 형주 장악에 실패하였고, 적벽대전에선 주역이 아닌 객장으로 참여하면서 손권에게서 남군을 빌리는 형식으로 형남 장악을 시작하면서 시작부터 꼬여버린 상태였는데, 입촉 과정에서 의인으로 소문난 유비의 평판이 크게 깎인데다 3년간 파촉 장악에 집중하느라 위-오 전쟁, 위-서량 전쟁 등 천하의 대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만한 시점에 관여할 수 없었으며 유비가 파촉을 점령한 직후 위가 장로가 차지하고 있던 한중과 파동을 점령해버리고, 기껏 유비가 자력으로 차지한 형남 4군 중 3군은 익양대치로 오에게 양보하는 등 여러모로 손해를 많이 봤다. 인재 시점에서도 손해인 게 유비를 따라 입촉을 보좌하던 책사 방통이 전사함에 따라 형주를 방어하던 제갈량과 장비를 불러들여야 해서 형주를 관우 1명에게 맡겨야 했고, 한중공방전의 주역으로 맹활약한 황충과 법정도 220년에 죽기에 210년대 초반에 3년이나 되는 시간을 파촉을 차지하는 일에 낭비할 수 없다.[2] 사실 일단 큰 틀에서는 제갈량의 전략도 어느 정도 따른 것이긴 하다. 제갈량은 익주와 형주를 아우르고 서쪽의 융족(혹은 양주 군벌 마초)와 접촉하면서 관중으로 유비가 진격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 대전략 자체는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 사실 그렇기 때문에 원 역사에서도 방통이 바로 유장 참수작전으로 입촉에 드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자고 제안했는데, 문제는 유비가 그걸 거부하고 벌인 익주 정벌전쟁에 시간을 너무 끌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익주에서 유비군을 관찰한 여대가 유비군이 대패해 백제성으로 도망갔다는 증언을 하는 등 유비 본인이 익주의 군사적 역량을 잘못 재는 실수를 한 것이다. 주인공이 이 점을 대놓고 지적하면서 원 역사 유비의 선택을 까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정한 것이나 유비의 군사적 능력이 대놓고 별로라는 서술한 것으로 보면 간절히 작가 역시 유비가 굳이 방통의 중책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실책이라고 보는 것으로 보인다.[3] 본래 역사에서도 방통은 유비의 의견에 다른 의견을 내기보다는 군말없이 충성하는 측이었으나, 익주 정벌을 두고서는 유장의 장수들을 꺾고 부성에서 술에 취해 기뻐하는 유비를 보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좋아하시는 모습만을 보이는거 아닙니까?' 라고 불평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 등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유비가 방통에게 화를 냈다가 다시 불러들이면서 봉합되긴 했다.[4] 방통이 입촉을 찬성했단 기록도 있지만 본래 방통의 상책은 정병만을 모아서 성도를 기습해 제압하는 것인데 유비는 이를 거부하고 백수관 등의 성도 주변부터 차례대로 제압하는 중책을 썼다. 방통 입장에선 속전속결하자는 상책도 이미지 관리, 도박수라는 이유로 거절하고는 시간 걸리는 중책을 채택하더니, 아직 끝난 것도 아닌 마당에 긴장이 풀린 모습을 보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즉 입촉 찬성이든 반대든 간에 자기의 상책이 채택되지 않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던 것.[5] 유비-손권 동맹 파탄의 원인의 책임 소재에 논란은 지금까지도 큰 논쟁 대상이긴 하지만 적어도 관우의 대처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결코 현명하지 못 했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6] 악진과의 교전 묘사를 보면 중년을 훨씬 넘긴 관우는 적진을 한참 휘저으면서도 쌩쌩한데 부하들이 먼저 지쳐서 돌격력이 약해진다.[7] 작중 유비는 이를 '우당탕탕'이란 수식어로 정리한다.[8] 당연히 무장인 장비가 서예사의 위인인 종요를 능가할 순 없지만 자신만의 개성있는 필체 + 일찍이 만인지적으로 조위와 손오 양쪽에서 인정받은 장군의 글씨라는 점에서 화제성은 충분했다.[9] 정확히 말하면 주창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정사에서 언급되긴 하지만 단순히 부장이라 나오지 이름은 안나온 탓에 주창이란 인물 자체는 정사에서는 허구 취급 받는다.[10] 실제 역사상으로도 한번 물길을 타고 내려가면 다시 군대를 되돌리기 쉽지 않아 위험하다는 이유로 기각된 상용점령작전을 기획한 사람인 만큼 어느 정도 이런 기책이나 도박을 즐기는 성격으로 작가가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11] 유비는 가는 길에 무장을 하고 여비를 넉넉히 쓰라고 비단 장수로 위장시켰는데, 유비의 서량 개입에 의한 나비 효과로 인해 서량과 조조 세력권의 치안이 생각보다 나빴기 때문에 도적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12] 그래도 실 역사에서는 동주계의 유력인물인 방희를 상대로 파군쪽을 두고 자웅을 겨룰 만큼 장로는 유장에게 있어서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13] 원 역사에서는 아예 남진하는 조조군의 진입로에 토성을 쌓아버리는 대공사로 조조의 기를 죽였으나, 본작에서처럼 한중군민들이 경계를 유지하지 못한 탓에 패했다.[14] 실제 역사에서도 213년, 마초가 기성을 공격할 때 장로는 양앙을 대장으로 삼아 마초를 돕게 했고 마초가 기성을 점령하자 그의 명령대로 위강 등 위나라의 관리들을 죽인다.[15] 배송지의 기록으론 10만. 작중에선 5만 내외로 서술한다. 아무래도 작가는 전근대 병력 서술이 늘 그렇듯이 이 당시 10만을 호왈십만으로 본듯 하다.[16] 뛰어난 학력과 가문, 소수민족의 핏줄까지 가졌다. 마초는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이며 강족의 피가 섞여 이민족들과도 연줄이 있었고, 무엇보다 군재도 뛰어났다. 만일 동관대전에서 이겼다면 적벽에서 이긴 손권처럼 군주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17] 사실 양부 입장에서는 기성 전투에서 일족이 몰살당하다시피 했는데 이제와서 일족을 다 죽인 마초와 화해하라는 것도 말이 안되는 소리긴 하다. 애초부터 양부는 조예 시절까지 조위에 충성하면서 조예에게 온갖 충언을 아까지 않았던 골수 친조조파-조위 충신이기도 하니 일찍부터 한실에 대한 기대는 버렸다고도 볼 수 있다.[18] 원 역사의 양부는 조예 시기 구경에 오를 정도로 출세하나, 끝내 조예가 자신의 충언을 무시하자 홧병으로 죽는다. 즉, 여기서는 조예가 즉위하기도 전에 죽었으니 원역사보다 빨리 죽은 셈.[19] 왜 그렇게 되냐면 양부 고모의 논리대로 조조가 충신이라면 헌제가 외척인 동승에게 몰래 조조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의대조 사건이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 원역사에서는 마초가 이를 알지 못해 그냥 말없이 죽여버리지만 여기서는 의대조 사건의 당사자인 유비가 있다보니 완벽하게 카운터를 쳐서 양부의 고모를 데꿀멍 상태로 만들어버렸다.[20] 원역사보다 1년 빨리 침공이 벌어졌다.[21] 유장의 선대인 유언이 자사를 목으로 바꿀것을 영제에게 건의하고 익주목으로 임명받았던 것을 계승한 것이다.[22] 이 동주병은 유언이 익주에 몰려든 난민들을 이용해 만든 정병으로 타 군벌들의 정병에 지지않는 강병이었다고 한다. 수도 최소 3만~5만에 달해 누구라도 얕보기 어려운 전력이었다. 원역사에선 이 동주병들이 유비를 막아서느라 유비 옆에 방통, 법정 같은 우수한 참모가 있었고 유장의 세력을 알음알음 사전에 강탈했음에도 연 단위로 고전했다.[23] 유비가 장송에게 단순히 안부 편지를 보내는 방식이었지만 어쨌든 경계 대상 1호인 유비와 서신을 주고받은 것이니 황권은 이 기회에 장송을 조지고자 했다. 그러나 장송이 진짜 내통을 했다면 이렇게 대놓고 편지를 주고 받겠냐며 반박하자 황권도 아무 말을 못했고 일단 사형은 피한 채 옥에 수감된다. 이마저도 유비가 양회와 고패를 풀어주면서 유장에게 해명하는 서신을 보낸 덕에 곧장 석방된다.[24] 실제 역사를 보면, 손권이 먼저 유장을 치자고 유비에게 제안했었는데 유비가 '지금 조조와 맞싸우는데 같은 반조조연합인 유장을 치면 안 되고 또 유장은 자신과 동족이니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면서 군사를 동원해 길을 막고 '나는 유장을 치느니 머리 풀고 입산하겠다' 드립을 쳤었다. 그런 인간이 이제는 대놓고 유장의 통수를 치고 자기가 입촉을 하면서 손권의 통수도 같이 쳤으니 손권 입장에선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25] 실제 역사에서도 손권이 나중에 주유, 노숙, 여몽, 육손 등의 도독들을 평가한 바가 있었는데 노숙이 여러 부분에서 잘한게 많으나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줘서 통수를 맞은 건 실책이라고 평가하여 주노여육 네 도독 중 가장 평가가 낮았다. 물론 노숙도 할 말이 있는데 작중에서도 언급되지만 강동과 형주를 잇는 장강 수로가 동오에 압도적으로 유리해서 막강한 수군으로 언제든 손쉽게 찔러 내려갈 수 있었고 수군이 약한 유비측은 여기 대응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호구라서 그냥 넘겨준 게 아닌 것.[26] 말이 공작이지 기주 10개 군은 군사경제적으로 핵심지역이기도 하고 일반적인 왕공작의 봉작 영역을 한참 넘어서서 사실상 한실을 찬탈하겠다는 예고나 다름 없었다. 비유를 하자면 큰 공을 세운 장군이 수원, 화성, 성남, 군포, 안양, 오산, 용인, 평택, 여주, 안성이라는 경기도 대부분을 자기의 땅으로 만든 꼴이라고. 실제로 이후 선양으로 가는 길을 여는 찬탈자들이 이런식으로 왕공작을 받아 선양을 받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기도 했다.[27] 사실 이 부분은 본 소설의 시계열이 좀 꼬인 상태인데 본래 순욱의 자결은 한창 조조의 위공 즉위 논의가 진행되던 212년에 있었던 일이고 조조의 위공 즉위는 213년에 있었던 일이다. 아마도 이 세계관에서는 소식이 뒤늦게 전달됐거나, 혹은 조조가 위공을 칭하자 순욱이 그제서야 죽은 듯 하다.[28] 보통 조등의 양아들이자 조조의 친아버지 조숭이 본디 하후씨였는데 조등에게 입양되었다고 알려져 있어서 하후연이 조조의 사촌동생 정도로 여기지는 경우가 많은데, 패현 조씨와 하후씨가 가까운 사이는 맞았지만 정말 조숭-조조 가문과 하후씨의 관계가 혈연 관계 였는지 어땠는지는 지금도 설이 분분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조숭 문서 참고.[29] 관우는 변수가 적은 힘 승부, 단일전장에서는 강하나, 변수가 많고 분산되는 전장에서는 약한데 하필 형주가 딱 이런 상황이었다. 또한 당시 조조군은 이통, 문빙 등의 우수한 지휘관을 대거 동원했다.[30] 죽서기년에는 요순시대의 선양이 상당한 정쟁을 거쳤음을 알리는 내용이 있다.[31] 속으로 하는 거야 현대인 특이라 봐도 되니 상관이 없는데 양부의 고모를 대할 때처럼 대놓고 그러는 경우가 많다보니 문제로 삼는 것. 사실 이는 백이잇 시절부터 제기되는 작가의 고질적인 문제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