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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6:28:19

직백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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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문제점3. 왜 이런 짓을 했는가?4.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사정은?
4.1. 손오
4.1.1. '촉전오용 현상'
4.2. 조위

1. 개요

직백오수(直百五銖)전, 혹은 직백(直百)전이라고도 불리는 화폐는 한나라 때부터 수나라까지 주조된 중국의 전근대 금속 화폐 오수전의 일종으로 중국 삼국시대의 국가 촉한에서 주조한 촉한의 공식 화폐이다. 위나라오나라 일부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유통되었고, 중국 역사 최초로 주조지역이 명시된 화폐로 알려져 있으며 건위군 지역에서 주조되었다고 한다.

214년 촉한의 건국자 유비가 익주에 들어오면서 유파의 주도하에 주조되기 시작했으며, 촉한이 멸망하는 263년까지 약 반세기 동안 꾸준히 주조되어 촉한의 공식화폐로 쓰였다.

2. 문제점

일찍이 유장을 공격할 때 유비가 여러 장수와 군사들에게 약속했었다. "만약에 성도(成都)가 평정되면 부고(府庫)에 있는 모든 물건은 나는 관계치 않겠다." 마침내 성도가 함락되자 장수와 병사들은 다 창과 방패를 내던지고 성 내의 여러 창고로 달려가 경쟁적으로 보물을 취했다. 창고가 다 약탈되어 군수 물자가 부족하게 되자 유비가 심히 우려했다. 유파가 말했다. "이는 쉬운 일입니다. 다만 마땅히 직백전을 주조케 해, 여러 물가를 평정하고, 관리들에게 영을 내려 관시를 하게 하십시오." 유비가 이를 따르자 수개월 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삼국지》 촉서 유파전 주석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1]
촉한이 망했을 때 금은 얼마였는가? 금, 은 각각 이천 근이다. 유비가 입촉했을 때 금자 2천 근과 은자 4천 근의 하사에도 문제가 없었다. 망국 때 촉한의 경제는 참혹했고, 함부로 돈을 날린 것이 밑거름이 되었다. 금과 은이 귀한 가운데 비단, 견사가 각각 20만 필이나 있을 만큼, 촉한은 화폐 경제보다 물물 교환하는 원시 자연 경제로 돌아갔다. 왜 촉한 사람들은 돈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촉한의 화폐는 적폐와 주수[2]된 지 오래였다. 매년 막대한 군비 지출로 인해서 새로 주조되는 직백오수(直百五銖), 태평백전(太平百錢), 정평백전(定平一百) 등은 화폐의 무게가 많이 줄었고, 심지어 태평백전은 화폐가 너무 작아서 부득이하게 금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새로 주조된 돈은 많아져 군사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일시적인 계책이었다. 돈의 가치가 떨어져 촉한은 경제 체제가 붕괴된 데다, 후기 통치자가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아서 촉한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오기림(吴奇霖), 『촉한의 흥망성쇠 50년』 #

이렇게 보면 그냥 평범한 화폐 같지만 사실은 촉한이 벌인 대표적인 폭정의 일환이다. 직백오수는 말 그대로 일반 오수전의 100배 가치를 액면가로 가지는 화폐인데 정작 실질 금속함량은 일반 오수전의 2~3배에 불과한 물건이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흥선대원군의 악명높은 그 당백전의 3세기 중국 버전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직백오수전이 흥선군의 당백전보다 더 악질인 것은 첫째, 유비 정권이 세워지고 일시적으로 행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50여년 가까이 촉한의 주요화폐랍시고 당백전이 쓰여졌다는 것. 둘째, 화폐주조차익을 끊임없이 노리기 위해서 금속함량을 갈수록 줄였다는 점에 있다. 촉한은 유비가 입촉한 시기(214)부터 직백오수를 주조하기 시작했고, 이후 잇따라 직일소전(直一小錢), 태평백전, 태평백금, 정평일백 등 이런 여러 종류의 대전을 발행했다. 말할 것도 없는 행위지만 이 모든 화폐는 정상적인 화폐가 아니라 죄다 시뇨리지를 노린 악화들이었다.

직백오수전은 금속의 무게를 기준으로 이전 사출오수전에 비해서도 2~3배, 동탁의 소전에 비하면 최대 20배 가까운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나, 기존 통화인 일반 오수전의 무게에 비하면 불과 두배 정도 수준에 불과해 일반 오수전에 비해 백 배의 액면가를 가지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끔찍한 수준의 악화였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 경제법칙이므로, 유비가 강제로 관시를 열자 직백오수전은 빠르게 통용되었다. 유파는 흥선대원군의 당백전과 같이 악화를 발행하고 이를 통한 시뇨리지를 얻어 부고를 채운 것이다. 사실상 동탁관중에서 동탁소전을 찍어대며 관중을 피폐화 시키고 그 재원을 통해 호화찬란한 미오성을 지은 폭정과 다를것도 없는데, 문제는 동탁소전은 불과 2년만 유통되었으나 직백오수전은 촉이 망하는 그날까지 꾸준히 찍혔다는 것이다.

사실 동탁은 금속함량을 몇배로 줄이고 가치를 이전 오수전과 동등하게 받으려다 사단을 낸 것이고 촉은 불과 2~3배만 금속 함량을 늘리고 돈 가치를 100배로 받아먹었으니 촉 쪽이 훨씬 악질이다. 더군다나 후술하겠으나 나중엔 금속함량마저 동탁소전 수준으로 떨어지는데 화폐가치는 여전히 100배를 받아먹기까지 했던 것이니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송말원초의 학자 호삼성이 지적했듯 직백(直百)이라는 것은 액면 가치가 오수전의 무려 100배인 것이다. 오수전이 2.6 g이었고, 직백오수전은 7.9 ~ 9.5 g이었으니,[3] 고작 3배의 주조 비용이 증가했다 한들, 주조 차익이 100배나 늘어나면 그 화폐는 사실상 헐값을 넘어 똥값이 되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계산하면 직백오수전은 크기도 작았으며 불순물도 섞였던 동탁의 동전보다도 그 가치가 1/10 이하였기에 동탁의 동전보다도 악화임에 분명하다. 촉한은 이런 식으로 민간 경제를 약탈하였으며, 한중 공방전형주 공방전 등에 사용하였다.[4] 관아의 창고가 가득찼다고 서술된 것은, 촉한의 화폐와 화폐 경제가 우수했던 것이 아니라, 흥선대원군당백전을 발행해 주조 차익을 거둔 일과 흡사하다. 즉 유비의 직백오수전은 동탁의 동탁소전보다도 주조기간 내내 명백한 악화였기 때문에 오수전 유통구조의 붕괴로 인한 인플레이션 해결과 화폐경제 소생을 위해 시장에 공급한 양화가 절대로 될 수가 없고 명백히 주조차익으로 비어있는 촉한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악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의 당백전이 기존의 양화였던 상평통보의 존재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악화일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동탁의 동탁소전이나 유비의 직백오수전이나 이전의 양화인 오수전 유통구조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악화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한무제때부터 평제때 까지 전한시기에만 발행된 오수전만 280억개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나라의 상업발전이 엄청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미 한나라 시기에 수백년간 이미 수백억개 이상의 오수전이 주조되었기 때문에 동탁이 불과 2년간 그 수많은 오수전을 전부 부수어 중화에 동탁소전이라는 악화만 남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수전은 수천년 전에 쓰인 화폐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상평통보 마냥 지금도 수량이 널려 있어서 인터넷에서 염가로 화폐 수집가들이 쉽게 구할 수 있을 정도이며, 한나라 이후에도 오수전이 계속 유통되었다는 사료적 증거 및 고고학적 증거는 촉한과 동시기 국가였던 손오 통치구역에서 이미 당대에 사용된 오수전이 수십만개 씩 발굴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수전의 존재가 당대 중국에서 결코 없어지지 않았던 이상. 결국 동탁의 동탁소전이나 유비의 직백오수전이나 똑같은 난세의 혼란으로 무너지고 있던 오수전 유통구조를 주조차익을 노리며 더욱 교란하고, 각각 관서 지방과 익주 지방의 화폐구조를 무너뜨리면서 초인플레이션을 조장한 악화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한 말의 혼란 상황을 기술하면서 후한 각지의 오수전 체제의 붕괴와 초인플레이션 문제에 대해 동탁소전의 문제만 부각되는 이유는,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동탁전에서 동탁소전의 문제점을 기술했던 것과 달리 자신의 출신국가인 촉한의 직백오수에 대해선 아예 본전에서 존재 자체에 대한 기록말살시전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직백오수의 기록은 배송지가 주석으로 삼국지 본전에 대놓고 부고를 채우기 위해 만들었던 직백오수의 존재를 증언한 영릉선현전의 기록을 달아서야 간신히 삼국지에 기록될 수 있었고, 관련된 다른 기록들은 다른 사서에 분산되어 적혀 있는 형태로 남아 그 문제점을 전문적인 역사 연구 없이는 한번에 파악하기 힘들었기에 그 동인 유비의 직백오수에 대한 대한 비판도 쉽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또한 동탁소전은 근본적으로 동탁이 후한 조정을 장악한 이후 반동탁연합을 피해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중화 전역에 대한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고 장안을 비롯한 관서 지방에 영향을 미치던 시절에 만들어진 화폐라는걸 기억해야 한다. 즉 동탁소전은 주로 관서지방에 주로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엔 관서가 삼보의 난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구조가 붕괴하여 다른 지역에 유이민 이주외엔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기 힘든 상황으로 전락했던 것을 감안해야하는 것이다. 동시기 유우가 동탁의 통치와는 상관없이 유주의 물가를 안정시켰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탁의 통치하에 있는 관서와 후한 조정이 다른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쉽게 행사하기에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익주는 이미 유언장로를 시켜서 후한 조정 및 북쪽에 대한 왕래를 완전히 끊어버렸던 상황이라, 삼보의 난 등으로 모든것을 잃고 동주병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익주의 외부 유이민 세력 형성에 영향을 줬다는 것 외엔 동탁소전이 익주에 영향을 줬다는 어떠한 정황적 근거, 사료적 근거도 없는 상황이다.

거기에 유장 시기 정치적으로는 혼란했을지언정 부유했다는 기록이 수시로 나오는 촉이 유비의 익주정복 이후 삽시간에 피폐한 지역으로 전락했다는 여러 기록으로 보건데 익주의 경제적 몰락에 동탁소전이 영향을 줬다기 보단, 유비의 직백오수를 비롯한 촉한 정권의 전반적인 정책이 촉을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설명이 더욱 사실에 근접한다. 애초에 전술했듯이 동탁소전보다도 직백오수가 악화였기에 동탁소전이 익주에 들어오건 아니건 직백오수가 촉을 피폐하게 만든 원인이라는 대마는 달라지지 않지만 말이다.

결국 유파전, 선주전, 조운전을 종합하면 유비의 입촉 이후 임시적으로 시행되었던 경제정책을 알 수 있는데, 당장 작살난 국고를 채우기 위해 악화가 다량으로 발행되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익주의 부고를 채우려는 수탈적, 폭압적 조치였던 것이다. 그를 증명하는 것이 유파전으로, 아무리 국가가 민간 상업활동에 참여해 물품을 구매하자는 정책이더라도, 당장 물자가 없어 부고가 텅텅 비었다는데 무슨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조세를 거둬 부고가 금세 풍족해진다는 것인가?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대장정 당시 마오쩌둥이 있다. 대장정 당시 들른 마을들에서 마오쩌둥은 임시로 화폐를 발행해 물자를 '보충'하고 지역을 '안정'시켰다고 <화폐전쟁>에서 묘사되나, 이를 액면 그대로 신뢰할 수 있는가? 총칼로 강제로 시장을 열고 종잇장에 가까운 화폐를 '지불'하였고, 그로 인해 마오쩌둥과 공산당의 물자는 빠르게 수급되었으며, 악화가 통용된 것이 현실이다. 유파의 동전 발행 이후의 촉한 사정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조운은 옥사, 원지, 상전을 백성들에게 분배하여 부역과 조를 거둬들이자고 한 것이나 이마저도 과연 무상이었을지. 그리고 유비는 두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선주전'에서 '(백성들에게)곡식과 비단을 돌려보냈다'라고 기록한 것이다.

직백오수와 직백전은 이후 촉한이 망할때까지 50여년간 발행되는데 촉한 정부는 계속해서 청동 함량을 지속적으로 깎아내 평가절하 된 악화를 발행하면서 시세차익을 챙긴 것으로 보인다. 말기에 들어서면 직백오수전은 2~3g 수준으로 가벼워져, 사실상 무게상으로도 일반 후한 오수전보다 명백한 악화가 되었다. 이렇듯 촉한 정부는 같은 시기 오나라에서 10여년만 잠시 고액전을 발매하여 임시수단으로 사용하고 그나마도 나중에 문제가 되자 회수한 것과 달리 재정을 충족시키기 위해 상시적으로 악화인 직백전을 운용한 것인데 동탁이 불과 2년 정도만 소전을 발행했던 것을 생각해봤을때 동탁 이상으로 악질적인 시장 교란 방식을 사용해 재정을 채웠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동시기 세베루스 왕조~군인황제시대 로마 제국에서 데나리우스 은 함량을 지속적으로 낮춰 재정을 확보하던 시도와 일치한다. 해당 행위로 인해 로마 제국에 만성적으로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과 같이, 촉한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평가절하되는 악화 발매로 인해, 다른 곳보다 촉에서 훨씬 더 심하게 백성들은 착취당하고, 다른 중국대륙 지역보다 촉에서 인플레이션이 더욱 악화되었을 가능성 역시 매우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불과 1~2년 사이의 당백전 유통으로 조선 경제에 혼란을 준 것을 감안해 봤을때, 촉한인들이 이로 인해 겪었을 혼란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유비의 직백전 채용은 삼국, 위진남북조 때, 그리고 나아가 중국 수천 년 위폐 주조와 유통의 첫 시작이었다. # 유비라는 후한 말의 군벌이자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의 특징은 익주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존까지 보여주던 최소한의 인의군자 행세를 버리고, 본격적으로 권력을 위해 자신의 기존까지의 명성과 백성들 같은건 아랑곳하지 않는 패도적 행보를 보였다는 것인데, 후한 중앙정부가 명목상으로 나마 살아있는 상황에서 직백오수 같은 사적인 위폐를 찍는 것은 명백히 공식적으로 오로지 화폐를 독점주조할 권한이 있는 후한 중앙정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반역 행위였다. 실제로 후한 말의 수많은 야심 넘치는 군벌들 가운데 후한이 멸망하기도 전에 이런 자체 화폐를 찍으며 중앙의 권위에 도전한 짓을 한 것은 유비가 유일하다.[5]

3. 왜 이런 짓을 했는가?

제갈량집》에 이른다 : 지금 백성은 가난하고 나라는 텅 비었으니, 대적할 만한 물자라고는 오로지 비단 뿐이로다.
태평어람》권815 금() 항목
선제(先帝)께옵서는 창업하신 뜻의 반도 이루지 못하신 채 중도에 붕어하시고, 이제 천하는 셋으로 정립되어 익주가 매우 피폐하오니, 참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급한 때이옵니다.
출사표

직백오수전 발행 및 유통의 이유는, 본질적으로는 촉한이 내부개발과 내정을 포기하여 내부사정이 몹시 피폐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외부의 정복활동인 북벌에만 올인한 군벌체제 국가이기 때문이다. 즉 국가로서의 체제가 완성되지 않은 유사국가 군벌이 촉한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인 것이다. 유비가 촉으로 들어온 이후 유비의 익주정벌, 한중공방전[6], 이릉대전 등의 큰 전쟁들이 연이어 이어졌고 특히 유비의 3년간의 익주정벌은 각지에서 침략자 유비군과의 전투에서 살해당한 익주주민들의 시체가 들판에 널려있다고 할 정도로 대대적인 피해를 익주 내부에 입혔다.[7] 또한 이릉대전으로 촉이 겪은 피해는 인적, 물적 자원 모두 매우 막대하였기에, 이를 거치면서 '익주는 민은국부(民殷國富, 백성은 편안하고, 나라는 부강함)에 천부지국이고, 매우 부유하니 근거지로 삼을만한 곳이다'는 제안이 나오거나[8] '백성들이 부유하여 사치를 했다'거나[9] '촉이 부유해 익주 정복의 공로로 나눠줄 물품이 창고에 많았다'[10]유장의 익주는 유비의 익주정복 불과 10여년 만에 급격히 피폐화되었고 이는 당시 촉한 국정의 총책임자 제갈량도 인정한 사실이다.

즉 남중정벌 같이 북벌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국고를 채우기 바쁜것이 촉의 현실이었고 직백오수전 발행 역시 그 일환인 것이다.남제서에 따르면 오수직백전은 커튼 고리를 징발하여 만들었다.[11] 일시적으로 커튼 고리를 강탈하여 만든 직백전으로 착취를 할 수는 있었겠지만, 안정적인 직백전 발행을 계속하기 위해선 역시 금속 광산에 대한 확보가 중요했을 것이다. 직백오수전 발행을 위해서는 구리가 필요하며 파촉 세력 기준으로 구리를 얻으려거든 현실적으로 얻을 수 있는 산지는 남중[12] 뿐이기에, 그래서 제갈량이 남중 원정을 한 것이다. 구리 채취 및 운송 과정 관리자는 보통 이회, 마충, 장억 같은 익주 출신 지방관들의 존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익주 토착 세력 출신이 선발된 것으로 추정된다.[13] 또한 직백오수전은 중국 역사 처음으로 주조지역이 명기된 화폐인데 이에 따르면 직백오수가 찍혔던 지역은 건위군으로 이곳은 남중의 산물들이 사천분지로 들어오는 입구이기 때문에 두 곳을 잇는 이곳에서 직백전을 찍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남중정벌-직백오수전의 유통의 권리를 익주인들에게 내어준 것은, 익주인 기준으로 외지인들의 정부인 유촉 조정/제갈량 한중 승상막부에서, 외지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히 불만스러울 익주 현지인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건내준 당근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 구리를 캘 남중 토착민 기준으로는 익주인도 외지 지배자였으므로 남중인들은 촉인들의 지배와 착취만 이어질뿐 아무런 개발이나 지역의 발전을 위해 자원을 쓰지 않았던 익주 정권에 반란을 자주 일으켰으며 이는 나중에 촉이 멸망할 때 초주가 남중으로 파천하자는 의견에 반대하는 주요 이유가 된다.

즉 유씨 촉한 성도 조정/제갈량 한중 막부는 외지인으로써 파촉을 통치하며 오로지 외정인 북벌에 나라 전체의 국력을 다 쏟아붓는 대가로 익주 토착 세력과 타협을 해야했고 남중 자원과 부곡을 익주 토착 세력에게 양도한 셈이다. 이는 유비 군벌 세력이 정복 집단으로써의 '질량'이 너무 미달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며, 이릉대전이 유씨 촉한 정권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 대참사였기 때문에, 안 그래도 대단찮은 그 질량을 더 극적으로 줄여버렸던 사정이 있었다.

비단 직조업 외에 거의 모든 익주의 산업기반이 박살난 상황에서[14] 믿을것은 오로지 남중을 착취하거나 한중 인근에서 나는 귀금속에 의지하거나 그나마 내부적으로 익주 내정이 모조리 다 박살난 상황에서 살아남은 비단 산업에 의지하는 것이 한계였던 당시 촉의 피폐한 사정상, 직백오수전의 실질 가치와 명목 가치의 차이는 곧 직백오수전 발행 및 유통으로 군비를 창출하는 핵심 요소였다. 직백오수전은 기존 오수전 대비 3배 중량으로써 실질 가치는 3배. 그러나 명목 상으로 내건 가치는 100배. 단기적으로 파촉민들로부터 시뇨리지 차익을 극대화하려고 이런 구조로 설계한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그냥 더도덜도 할 것 없이 그냥 흥선대원군의 당백전과 의도가 똑같다. 그나마 당백전은 1년 정도 하고 끝나기라도 했지 직백오수전은 단기로 주조가 끝나질 않고 수십년 동안 주조되었으며 그 와중에 질과 중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떨어진 것으로 보이니 문제인 것이다.[15]

결국 나중에는 금속함량을 계속 줄이다보니 3.3g인 오수전과 별 반 차이가 없는 직백오수전도 유통되었고 여기서 계속해서 북벌을 위한 군비가 필요했던 촉한 조정과 한중의 제갈량 승상막부는 직백전의 중량과 질을 계속해서 낮추면서 나중가면 동탁소전이나 다를바가 없는 0.6g 짜리 직백전까지 나타난다.# 그러나 여전히 명목 가치는 100배. 즉 심각한 악화가 파촉에 나돈 것이고, 이는 파촉 토착민들의 민생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민란이 별로 없었던 것은 이런 시뇨리지 차익 땡기기로 군비를 끌어모으면서도 남중정벌 등으로 현지 익주 토착 세력에게 당근을 주어 다수의 파촉 토착민들을 현지 토호들과 같이 관리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민란이 터져도 북벌하겠다고 군비 왕창 땡겨서 체급 대비 군사력은 상당히 끌어올렸으니 민란 쯤은 촉한 성도 조정/한중 막부와 결탁한 익주 토착세력이 충분히 진압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것이 장기적인 국가 운영에 있어서 긍정적인 구조인가 하면 그렇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물론 익주 토착 호족 지식인들에게는 어쨌거나 역사상 처음으로 파촉인들이 각종 산물이 많이 나는 익주 남부 남중지역을 식민지배 하에 두면서 이득을 챙긴 사상 첫 사례이자 사천 역사 전체를 뒤져봐도 사실상 운남성에 대한 사천 지배의 마지막 사례[16]였기 때문에[17] 이들은 이런 이득을 가져다 준 제갈량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제갈량의 남중 정벌에 종사한 파서군(마충, 장억) 계열 인물들에게서 이런 찬미가 주로 관찰되는데 제갈량의 장례 참여 금지령이 조정에서 내려졌음에도 기어이 달려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초주나 같은 파서군 출신 초주의 제자로서 제갈량에 대한 각종 사료를 수집하고 그의 통치에 대한 미화를 늘어놓은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바로 이러한 예시이다.[18][19]

어쨌거나 실질 가치는 오수전과 동급 내지 그 이하이나 명목 가치만 100배인 직백오수전이 장기 발행/유통되면서 오수전이 직백전과 1:1 대체된 것으로 보이고, 이 때문인지 파촉 내부 평범한 민중들의 경제 활동은 화폐 위주보다는 비단 같은 직물을 실물화폐로 사용하는 물물교환 위주의 경제 활동으로 회귀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손오 권역에서 출토된 화폐들의 규모로 미루어 보건데, 촉한 조정에게 직백오수전은 파촉 내부를 쥐어짜 군비를 확충하는 시뇨리지 차익 용도의 것임과 동시에 대오 무역용 무역대금 수단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손오 입장에서는 유촉이 규정한 직백오수전의 명목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으므로 실질 가치로만 따지고 통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오 측은 장강의 흐름을 장악하여 이를 통해 수로를 통해 각지에서 활발하게 상업활동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소비 시장, 경제 규모가 촉보다 훨씬 크고 무역 관계에서도 오 측이 흑자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촉전이 오에 대량 유입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촉오 관계가 어느 정도 정립된 이후 시점부터는 사실상 촉은 오의 대리 조폐기지 역할을 한 셈이며, 촉은 물산이 훨씬 풍부한 오로부터 화폐대금을 지급하여 필요한 물산을 얻어온 것으로써, 사실상 손오가 없이는 촉한이 생존할 수 없는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4.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사정은?

후한 말은 국가적 혼란으로 인해 오수전 화폐경제 구조가 붕괴되고, 중화의 상업경제가 물물교환 경제구조로 전환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각국에서도 촉한 같은 극한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지금도 발굴되는 당대 1차 사료들, 지방 행정 기록을 담은 주마루오간 같은 목간에서는 명백히 심각한 인플레이션의 징조가 발견된다. 하지만 실제 연구결과나 관련사료를 보면 위나 오에서는 오수전 체재가 촉만큼 붕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존 오수전 체제가 유지되거나 재건되고 있다는 사실이 관찰된다. 즉 당대 삼국 중에서도 유독 촉이 극단적으로 기형적인 화폐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4.1. 손오

고고학적 기록을 보면, 손오 시대 화폐 유통과 주조에 대한 정사(正史)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손오 시대에는 금속화폐가 널리 사용되었고, 촉의 직백오수 같은 악화 고액전인 대천오백(大泉五百), 대천당천(大泉唐千) 등의 화폐들도 새로 주조되었다. 또한 246년 손권이 이런 새로운 고액전이 문제가 많다며 이 주화들을 폐지하였음에도, 그 새로이 주조된 화폐는 무덤과 땅속 곳간에서 자주 발견되기에 시장에서 완전히 퇴출당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손오가 찍은 이런 고액전 주화 규모와 유통 범위를 무슨 직백오수 같은 악영향을 손오 경제에 미쳤다고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출토된 화폐의 수량을 보면, 손오 시대에 유통된 화폐는 주로 전대 왕조인 한나라 화폐, 즉 오수전이었고, 촉한의 직백오수 같은 이웃 국가의 화폐가 그 뒤를 이었으며, 손오가 발행한 새 고액전 주화의 수량은 출토된 화폐 총량의 1% 미만이었다. 같은 기간, 혹은 조금 뒤 시대의 주화 저장고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확인된다.

예컨대 저장성 샤오싱 시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말기에서 서진 초까지의 대형 곳간에서는 33만 점의 옛 화폐 중, 한대(漢代)의 기존 화폐 이외에 직백오수(直百五銖), 정평일백(定平一百), 태평백전(太平百錢) 등 촉한의 화폐도 발견되었으나, 동오가 자체적으로 발행한 화폐는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장쑤성 단투에서 발견된, 동진 대 저장고에서 나온 수만 개의 동전 중 오수전이 90% 이상이었다. 그리고 삼국시대 주조된 화폐는 300점 이상이었는데, 절대다수가 정평일백과 태평백전 등 직백오수 계열 촉한의 화폐였고 동오의 대천당천은 단 한 점뿐이었다. 이는 당시 손오 정권이 찍은 고액전 자체 주화의 규모가 작았고, 유통 범위도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진서》와 《통전》의, 동진 시기에 "손씨의 예전 화폐를 그대로 사용했다(仍用孫氏舊錢)"라는 표현은 '손오가 찍은 고액전'이라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애초에 이렇게 손오가 찍어낸 고액전의 수량자체가 기념주화 수준으로 너무 적었기에 그냥 제대로 쓰였다고 볼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 중국 역사학자들은 이런 고고학적인 결과물에 따라서 사서를 재평가할 수 밖에 없었는데 팽신위(彭信威)의 《중국화폐사》에서 내린 결론에 따르면 동진이 손씨의 예전 화폐를 그대로 사용했다라는 구절은 동진 시기 손오의 주화 그 자체가 아니라 '손오의 화폐 유통 체제'를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즉 경제 구조적인 면에서 사실 동진은 손오의 직접적인 계승자였다는 것이다.

손오에서 이렇게 직백오수 같은 같은 악화가 통용되지 않은건 직백오수 그 자체의 문제와 같은 원리였다. 즉 '돈이 지나치게 가치가 높으나 명목가치와 실질가치가 들어맞지 않는다면, 세상에 재앙이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손오의 고액대전은 손오의 시장경제에서 전면적으로 배척당하여, 실제적으로 거의 통용되지 않있다는 기록이 삼국지 오서에서 발견되며, 결국 발행된 지 10년 만에(246년) 손권은 "내 듣기에 백성이 편리하다 여기지 아니하니, 대전 주조를 중지하라. 대전으로는 기물을 만들고, 관에서 다시는 대전을 주조하지 마라."라며 폐지를 명했다. 결국 손오의 시장경제는 주로 평범한 오수전을 주체로 하는 화폐 유통 체제로 돌아갔을 뿐이라는 것이다.

손오가 이런 고액전을 많이 찍지 않은 이유는 화폐를 주조하는 기술이 손오의 중심지 강남 지역에서 퇴보된 점 때문도 있었다. 손오 시대 화폐를 주조하는 장소는 비좁고 손오의 중심지인 장쑤성 남부와 저장성 북부에 집중되어 있어, 다른 지역에서 새로이 주조된 화폐를 얻기 어려웠다. 주화 기술에 있어서 손오의 관할 구역은 구리 광산과 제련 및 주조 경험이 풍부하였으나, 후한 말기 빈번한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경제가 심각하게 파괴되고 사회 발전 양상이 매우 저해되어, 대부분의 관영 화폐 주조 장소에서 주화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그로 인해 주화 공법과 관련 기술을 갖춘 인재들이 소멸했고 때문에 손오가 새로 화폐를 찍기에는 여건상으로 이래저래 힘들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다보니 손오 고관 귀족의 묘지에서 유통이 폐지된 손오의 대전 화폐가 소량 출토된 점은 이것이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화폐가 아니라 묘주의 지위를 상징하는 기념주화 적인 성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출처

사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손오는 삼국중 후한의 화폐경제, 상업경제가 가장 잘 살아남은 지역이었다. 돈과 천을 주요 국가적 결제수단이자 민간경제 유통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손오의 경제는 호조를 중심으로 한 조위의 경제와 직물과 수탈을 중심으로 한 촉한의 경제가 아닌 동한 말기의 화폐경제와 일치한다. 손오는 한나라 때부터 돈 위주의 인두세(算頭稅, 이른바 계산부과구전)를 실시했고, 전세(田稅, 곡물포전)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비해 당시 중원지방에서는 남경여직(남성이 경작하고 여성이 직무을 짬)의 생산기반이 무너지고 오수전(五铢钱)이 주물이 되는 등 전란의 여파로 고정적이고 통일된 호조제가 실시되었으며, 이러한 호조조는 이후 일부 개조되어 서진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러나 손오는 구리 광산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화폐경제도 중원처럼 파괴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 또한 손오는 남경여직 정책을 계속하여 동한 이래의 기본세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손오는 각지의 자연환경에 따라 유연한 세제를 만들어 막대한 전비 수요에 대응하였다. 그 일환으로 국가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손오는 돈 위주의 인두세와 조세 외에 다양한 수요물자를 수시로 조달한다는 뜻이다. 그 중 적어도 일부는 관이 매입한 것이다.

이 밖에 손오에는 한나라 때부터의 시세 등 상업상 관세가 있었다. 그 기본은 백전 단위로 한대의 시조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지만, 한제와 대체로 일치하는 점이 많다. 손오의 인구 통계는 일견 촉한의 군사 최우선형 경제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군사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비상근 관리와 비상근 병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손오의 부역제 및 병제는 거의 완전히 한제를 답습하고 거기에 병호제를 추가한 형태였다. 결과적으로 손오는 소득이나 지출 면에서 모두 동한(특히 동한 말) 오수전 화폐 상업 경제제도의 계승자였다.[20] 즉 정치적으로 손오는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중세의 도입기고 화폐경제나 세제는 고대국가 진한의 연장선상인데, 화폐 경제와 상업 네트워크가 살아있다보니 관이 물자 필요할 때 공출 대신 민간 상업을 통한 매입을 하는 일종의 재정국가적 성격도 강하게 띄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4.1.1. '촉전오용 현상'

한편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직백오수 같은 촉한의 고액전 화폐가 손오 관할 구역에서 차지하는 유통 지위가 상당히 두드러지는데, 출토된 수량과 분포된 기간, 지역적 범위가 손오 본국의 화폐를 능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양국의 경제 펀더멘털에 달려 있었다. 오촉 양국의 경제 체제와 화폐 본위 제도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손오는 건국 이래 정치적으로 강동의 호강(豪强) 대족에 의존하여, 경제적으로 동전비단을 병행하는 이원적 체제하에 있었다. 세제상으로는 한대(漢代) 이래로 돈 위주의 인두세를 이어갔고, 하사품으로도 대부분 동전을 사용하였으며, 장강 수로를 이용한 시장경제가 발전하였으므로 정부 운영과 민간 시장 활동에서 양측 모두 화폐 수요가 많았다. 반면 촉한은 앞서 군벌정권이라는 평가 그대로 건국 이래 외정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제갈량은 국정을 주관한 이후 북벌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이른바 "군사(軍事)를 최우선으로 하는" 경제 체제를 형성했다. 촉한 정권은 경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자국 내 금속화폐 사용을 줄였고, 염철(鹽鐵) 전매와 촉금 무역에 의존하여 재정 수입을 얻는 쪽으로 경제 정책을 전환하였다.[21] 또한 직물(布帛)과 식량 등 현물 상품이 점차 주요 지급 및 결제 수단이 되었으며, 금속화폐는 주로 민간의 보조적인 유통 및 손오에게 바치는 대외 무역용 지불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삼국지 촉지》의 내용에 따르면, 263년 촉한이 멸망했을 때 호구와 국고의 재물을 철저하게 점검했는데, 국고에는 쌀 40만여 곡, 금은 각 2천 근, 금(錦)과 기(綺), 채(彩)와 견(絹) 각 20만 필이 있었으나 비축된 금속화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를 통해 당시 촉한 내에서 금속화폐의 유통 지위가 낮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촉한이 여윳돈으로 손오의 쓸모 있는 물건을 맞바꾸는, 공급과 수요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둘째, 양국의 화폐 규모가 반영되었다. 촉한의 화폐는 한대(漢代)의 오수전에 비해 분명하게 무게가 줄어들고 액면가가 지나치게 높은 현상이 나타나 촉한 정권이 자국 내 민중의 부를 빼앗는 수단이 되었음에도, 대외 무역의 지불 수단으로 정부가 강요하는 지나치게 높은 액면 가격과 감소한 무게는 무역 상대에게 인정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 유통 가치는 동전의 무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시장에 새로 주조된 오수전과 손오 대전이 없는데 금속화폐 폐지를 거부당한 상황에서, 손오 지역의 경제 주체들은 분명히 이 금속화폐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셋째, 양국의 무역 관계가 반영되었다. 삼국시대에는 220~223년에 있었던, 동오의 형주 탈취와 복수를 위해 건국군주 유비가 촉한이 이릉전투를 벌인 것을 제외하고는, 촉한과 동오 양국 간에 비교적 양호한 관계가 계속 유지되었다. 특히 유비 사후 촉한이 대패함에 따라 양국간의 우열 관계가 명확히 정립되었고 당대 촉한 정권의 1인자인 제갈량과 그의 밑에서 정무를 주관하던 자들은 모두 대오 관계에서 친 손오파들이었기 때문에 제갈량의 《절맹호의》로 대표되는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와 싸운다(聯吳抗魏)'라는 외교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후 전쟁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 간 민간 무역은 비교적 활발하였고 오에 부적절한 적대감을 유지하던 유비가 죽은지 4년만에 촉의 화폐가 다시 동오에 통용될 정도가 되었다. 동오 자체는 상업이 발전하면서 금속화폐에 대한 수요가 높았고 촉한 내에서는 반대로 화폐경제가 쇠퇴하여 금속화폐가 상대적으로 적게 사용되었기에, 왕래 무역에서 촉한의 화폐가 동오로 유입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오와 촉의 경계인 형주 지역(후베이 일대)에서 촉한의 화폐가 더 많이 유통되었다. 이는 오촉 양국의 밀접한 무역 관계와 금속화폐의 일방적인 흐름을 분명하게 나타낸다.출처

정리하자면 직백전이 인플레이션 해결과 화폐경제 소생을 위해 시장에 공급한 양화라는 일부의 주장과 다르게 오히려 촉 본국은 현물 경제로 퇴행하는 중이었고 오히려 상업의 발전으로 화폐 수요가 늘어나던 오국에 무역대금 형식으로 공급하는 양상이었다. 고 액면가는 당연히 국내 경제의 약탈용이고, 오의 대천오백이니 대천당천 같은 오나라 특유의 고액전은 아예 잘 쓰이지도 않는 기념주화였던 것이다. 즉 촉은 백성들 착취함과 동시에, 경제와 상업이 발전하면서 화폐수요가 높은 오와 교역할 목적으로 악화를 마구 찍어 오에 '공급'한 셈이며 오는 당연히 '내가 니들 액면가 왜 챙겨야 하느냐'면서 실물 금속의 무게만 재어서 통용했던 것이다.[22] 제갈각이 '촉은 오의 마굿간'이라고 조롱한 기록이나 촉오 외교관계에서 주로 굴욕을 당하는 일화가 남은것이 촉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이는 당대 오와 촉 사이의 실질적 정치, 경제 권력에서 촉이 오에 종속되어 촉이 일종의 '오나라 조폐청' 역할을 했던 현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4.2. 조위

동탁이 장안으로 도주한 이후 발행한 악화를 비롯해, 중원의 전란으로 인해 발생한 초인플레이션 폐해는 조조도 미처 다 해결하지 못하였고 조비 치세 때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후한의 상품 경제를 완전히 붕괴시킨 오수전의 붕괴를 조위는 초기에 회복하진 못했다. 조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예 오수전의 유통을 금지하고 물물교환으로만 거래가 이루어지게 하는 극약처방을 썼다. 이는 상업 발달에 지장을 준 사례임에는 맞으나, 당시 초인플레이션의 여파는 계속되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조세는 토지와 현물 위주로 재편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란의 피해가 회복되고 상업이 다시 활성화됨에 따라 금속 화폐의 수요는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결국 오수전은 위나라의 2대 황제 명제 조예 시절에 사마지 등의 건의에 의해 최종적으로 다시 복구된다. 《진서》의 식화지에 따르면 전은 폐지되고 곡식이 사용됨이 이미 오래됐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교묘하게 속임이 점점 많아져, 다투어 물기가 있는 곡식으로 이익을 늘렸고, 척박한 비단을 만들어 거래하니, 비록 엄한 형벌을 처분해도 금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마지 등 모든 조정에서 크게 의논하길, 전을 사용함은 단지 국가를 흥성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형벌을 줄이게 되니, 지금 만약 다시 오수전을 주조하면, 국가가 흥성해지고 형벌은 줄어서, 국가대사에 있어 편리할 것이라고 여겼다. 진서는 위명제가 이에 다시 오수전을 일으켜, 서진까지 이를 사용했고 이후에는 이를 다시 고쳐 만들거나 폐지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쓰고 있어 위명제가 복구한 오수전 체제가 최종적으론 서진 시기까지 문제없이 통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위나라가 복구한 오수전 체제는 직물과 전이 혼용된 체제였다. 하후현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장제가 호군으로 있을 때 아문(牙門)에서 자리를 얻고 싶으면 1천 필(匹)을 바쳐야 하며, 백인독이 되고 싶으면 5백 필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사마의장제와 가까워서 어느 날 그를 불러서 그 사실을 물어 보았다. 장제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하고, 농담으로 낙양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1전(錢)이라도 부족하면 안 되는 법이라고 했으며 사마의도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후현이 장제를 대신하여 호군이 되었지만 이러한 인사를 막지 못했다가 사마사가 호군이 된 후 이런 폐단을 없었다. 즉, 당시 위나라는 '필(匹)'과 '전(錢)' 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으며, 조예 대 사마지 등의 건의로 화폐를 재건하기 위해 오수전이 발행되었음에도 포백(布帛)의 화폐 기능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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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파성넷[2] 注水, 물먹다.[3] #[4] 카키누마 요헤이, 『촉한의 선군 정치와 경제 시스템(蜀漢的先軍經濟體系)』, 2011.[5] 동탁소전을 찍은 동탁은 일단 본인이 후한 조정 자체를 장악한 후한의 집정자였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6] 사실 성공적인 촉한의 전쟁이라고 알려진 한중공방전만 해도 유비는 한중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파군으로 들어와 익주 주민들을 납치하는 장합을 상대하며 국력의 손실을 겪었으며, 조조와 싸울때 유비가 긴급 문서를 내려 병사를 보낼 것을 요구하는 등 지속적인 인력과 자원의 손실이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당시 촉군태수였던 양홍이 사실상 익주의 남녀 모두를 동원하는 총력전을 해야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유비 정권은 익주의 모든 역량을 다 한중 공략에 쏟아 부었다. 그렇게 얻은 한중도 조조가 파군과 한중군의 백성들을 소개시켜 장로가 가꾸었던 번영한 한중의 알맹이는 이미 쭉정이가 된 상태였기에, 실은 익주의 안보를 확실하게 한다는 측면에서만 이득이었고, 실제 국력에 이득이 되는 성과는 익주에서 소모한 인풋에 비하면 거의 없었다고 볼 정도로 심각한 소모전이었다.[7] 삼국지, 후한서 유장전에서 기록된 유장의 증언.[8] 촉서 제갈량전, 방통전에서 각각 제갈량과 방통이 했던 주장.[9] 촉서 동화전[10] 촉서 선주전[11] "나라를 위해 쓰고자 장막을 거는 고리(帳鉤)를 취해 그 동으로 돈을 만들었다.(劉備取帳鉤銅鑄錢以充國用。) 출처: 파성넷[12] 과거에 남중으로 불린 중국 운남성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 최대 구리, 주석 산지이기도 하다.[13] 후일 촉이 멸망하고도 이 지역의 문제나 이권에 이들의 후손들이 개입할 정도로 이들의 해당 지역에 영향력은 꽤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14] 때문에 촉 멸망 당시에도 익주의 창고에는 다른 물품 대신 비단만 비정상적으로 많은것이 포착된다.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촉한은 망하기 좀 전에, 창고의 식량이 40여만 곡, 금은이 각기 2천 근, 비단인 금, 기, 채, 견이 각기 20만 필이었다고 한다. 얼핏 보기엔 많아 보이나, 유비가 입촉하고 나서 주요 신하들에게 수천근씩 마구 하사한 금은의 양과 대조하면 당대 촉한 조정에 잔재한 금은이 턱없이 부족한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금속화폐는 아예 전멸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15] 이런 직백전의 오용은 화폐 정책에 대해선 폐전론 논의까지 나올 정도로 화폐 정책에 있어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영조시대 조선에서조차 '백성들을 대놓고 착취하기 위한 수작질'이라고 본받을만한 행적이 아니라고 평가 했을 정도이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숭촉사상이 만연했고 화폐 경제정책에 있어선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 조선인들이 보기에도 직백오수전은 대놓고 잘못된 화폐정책으로 인식되었다.[16] 남중을 지배한 성한 정권은 남중의 지배권을 두고 경쟁자인 동진과 지속적인 전투를 벌여야 했으며 남명 정권의 경우엔 되려 운남에 조정을 두고 사천에 영향력을 행사한 사례이기에 촉한과 동일하게 비교하긴 어렵다.[17] 서진 당시에도 이 지역에서는 지방관으로 부임하면 쏠쏠한 이득이 많아 이 지역의 지방관으로 부임하려던 관료들이 많았다는 기록이 화양국지에 전한다.[18] 진수가 표면적으로 위진정통론으로 사서를 쓸 수 밖에 없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삼국지의 서술 자체는 매우 촉을 미화하는 편향적인 서술을 했다는 사실 자체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인정받고 있으며, 특히 삼국지에서 제갈량에 대해 기술한 파트는 익주를 다스렸던 선배로서 제갈량의 유능함을 강조하고 익주민들도 그의 유풍을 받았다는 식의 익주 출신들의 자기 PR을 위해 그를 미화했다는 강력한 의심을 받고 있다.# 예컨데 그는 기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가정의 위치를 명확히 서술하지 않아 1차 북벌 가정 전투 패배의 책임을 오로지 제갈량의 명령을 어겼다는 마속에게 전가시키며 그런 극단적인 전술을 써야 할 정도로 장합의 대군에 맞서 위기에 빠진 선봉인 마속을 제대로 구원하지 않은 제갈량의 군사적 무능을 숨기는 서술트릭을 썼는데, 비슷한 시기 원자를 쓴 원준이 제갈량을 옹호한답시고 기산에 있던 제갈량 본대와 가정에 있는 마속의 선봉부대는 사실 매우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술하며 가정의 진짜 위치는 기산 혹은, 기산에서 매우 가까운 인근이라고 서술하는 바람에 이 서술이 배송지의 주석으로 삼국지에 실림으로서, 이 전투 패배에 제갈량의 결정적 책임 소재가 있음이 사실상 들통나는 일까지 있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저서인 《통전》이나 소설인 《삼국연의》 등에서 가정의 위치를 기산에서 멀리 떨어진 위수 북쪽 엉뚱한 곳으로 잡았고, 이런 잘못된 비정에 넘어간 사람들 덕택에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그의 군사적 무능이 후대엔 숨겨졌다가 후대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간신히 21세기 무렵에서야 재조명 되기 시작했다. 같은 이치로, 진수는 동탁전을 썼을때 주조차익을 노렸다가 초인플레이션을 부른 동탁의 악행에 대해서 명백히 기술하며, 주조차익 장난질은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나, 촉서 등에서는 직백오수에 대해서 아예 서술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 역시 유비나 제갈량의 유능한 통치를 강조하고 망가진 촉의 실상을 가리기 위한 수작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파의 출신지 영릉에서 작성되었을 영릉선현전의 경우, 오나라 영토인 영릉에서 쓰였기에 굳이 이런 촉의 행적을 비호해 줄 이유가 없었으므로 직백오수의 적나라한 실상을 그대로 적었고 이 사료가 배송지에 의해 삼국지에 실리고 고고학적 유물 발견 조사에서 교차검증 됨으로서 촉과 제갈량 통치의 허상을 깨뜨리고 실제 촉의 경제적 실상을 제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19] 같은 익주 출신이지만 남중 정벌로 이득을 봤을 파서군 출신들을 선배로 둔 진수와 상대적으로는 그에 비하면 그렇지 못했을 촉군 출신 상거의 평가가 갈리는 부분도 재밌는 부분이다. 진수는 촉서에서 한중왕표와 유비의 칭제문을 수록하면서까지 은근히 촉의 위상을 한의 후계 비슷한 위치까지 격상시키지만, 제갈량의 잘못된 남중 반란 행정처리로 자신의 조상이 되는 일족(위씨춘추에선 상방, 화양국지에선 상기라고 기록되었다.)이 화를 입은 촉군 출신 상거는 화양국지에서 제갈량의 능력을 칭송하면서도 폐기된 천명을 따라 상국에 무모하게 대항했다면서 오로지 외정에만 몰두한 군벌정권 촉을 비판하는 뉘앙스의 서술을 하고 있다. 같은 의미로 진수는 북벌에 소극적인 제갈량의 후임 장완, 비의에 대해서 평가가 짜지만 상거는 촉 내부에 그나마 신경을 쓴 이들에 대해선 되려 긍정적인 평가를 남기고 있다. 이는 같은 익주 출신이라도 촉한 정권을 보는 시각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20] 손오 화폐 경제의 구조와 특징. - 카키누마 요헤이.출처[21] 오로지 북벌 같은 외정 이외엔 제대로 된 통치 이상이 빈약했던 촉의 통치체계를 보건데 이 염철 개발이 촉한의 재정 확보 이상으로 익주 주민들에게 이득이 되었다 보기는 어렵다. 예컨데 태평어람이나 박물지 등의 서적에 인용된 기록을 보면 제갈량이 임공현에서 염정이나 철을 개발할때 천연가스를 이용한 행적을 기술함으로서 그의 신이함을 강조하지만 실상 이런식의 염철 개발 및 사용은 이미 한나라 시절부터 익주의 주요 수입원이었으므로 이는 명백히 제갈량을 신격화하고 미화하기 위한 서술이다. 오히려 당대의 기록으로만 따지면 당시 촉의 신하였던 요립은 촉의 염철을 담당한 왕련을 두고 '풍속에 흐르는 자로서 성급히 권세를 믿고 함부로 돈이나 물건을 거두어들여 제멋대로 백성이 피폐해지게 한 것이 오늘날에 이른다'며 대놓고 인민들의 생활 향상에 적대적이었던 촉의 착취적 염철정책과 유비, 제갈량 정권이 벌였던 주요 실정을 비판했던 기록이 있다. 남중 정벌에 있어서 후처리가 몹시 허술했던 점이나 파군을 개발하려고 한 이엄의 개발정책을 오로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막는 등 제갈량의 촉 통치 자체가 비판받을 구석이 분명히 있는데도 항상 자신의 정책적 잘못이 있으면 거리낌없이 책망하라고 주변에 권했던 제갈량이 실제로 요립의 비판에 보여준 반응은 요립의 숙청이었다. 옆나라 손오에서 폭군으로 악명이 자자했던 손호조차도 화핵이나 육개 같이 자신의 정책을 비판한 사람들을 무조건 숙청하진 않았다.[22] 사실 이런 대안 화폐의 이용은 비단 손오만의 일은 아니고 후대에도 있었던 일이다.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 이전 시대엔 금속의 가치를 곧 화폐의 가치로 치환했기 때문에 금,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옛 화폐나 다른 정권의 화폐라도 금속화폐로의 가치를 인정받은 경우가 흔했다. 《수서》식화지에 따르면 양나라까지 촉한의 화폐를 사용하였는데 당대 양나라는 청동의 산출이 부족해서 철을 화폐로 쓸 정도로 금속 화폐가 부족했었기 때문에 사용한 것으로, 양나라가 굳이 옛날에 멸망한 촉 화폐의 액면가치를 인정해줄 이유가 없으므로 순수하게 금속가치만 쳐서 직백오수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손오도 마찬가지였을것이며, 후대 명나라도 필요할때마다 은자를 조금씩 잘라서 쓰는 등 금속 자체의 가치를 중시한 모습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