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2년(효종 3) ~ 1715년 2월 27일(숙종 41)
1. 개요
조선의 의관, 유학자, 선비 의사자는 백원(伯源). 별칭 호는 신연당(新淵堂), 원학산인, 인서(麟西).
경남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 679에서 1652년에 태어나 1715년 2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남 산청군 생초면 갈전리 산35-1에 있다.
두개의 한자 이름을 사용했다.
가문, 왕실 기록에는 劉以泰, 남긴 의서에는 劉爾泰이다.
자는 백원(伯源), 호는 신연당(新淵堂), 인서(麟西), 원학산인(猿鶴山人)이다.
관직은 임금 숙종 어의(御醫)를 지냈고,
품계는 종1품 숭록대부와 안산군수를 제수받았다.
저서는 전해지는 <마진편>, <인서문견록>, <실험단방>과
1975년 대학교 교수라는 두분이 가져간 잃어버린 2권 의서와
1940년대 초반에 종가집 화재로 소실된<침구방>과 <부인방>을 남겼다.
전해지는 유품에는 <유이태유고>,
예조에 올리는 예조정장 <유이태 효행장>,
경상도 관찰사에 보내는 <정영장>이 있으며,
경북 인동(구미)의 관리에게 보냈던 <간찰>이 있다.
2. 개설
40년간 향의(鄕醫)로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했다.노년기에는 임금 숙종 어의로 활동했다.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의원(儒醫)이다.
조선인 최초 홍역 치료서 『마진편』을 저술했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유이태탕’과 ‘순산비방’, '낙반벽상토(낙반비벽토)', '천녀두골만년수' 등 가장 많은 명의 설화를 남겼다
경남 거제도 장목면에서 채록된 민속 노래 <강강술래>에 채록된 조선의 유일한 의원이다.
동의보감 편찬자 허준의 일대기『소설 동의보감』과 MBC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을 가르친 살신성인 스승으로 묘사된 유의태(柳義泰)의 모델 인물이다.
3. 생애 및 활동 사항
유이태의 생애는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나누어진다.소년기 :
∙ 어릴 때 병을 앓았는데 혼자서 의서를 읽고 병을 고쳤다.
∙ 10세 전후에 모친이 요절하자 묘소 앞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 부모를 모시는데 의학을 알아야 한다며 입신양명의 뜻을 접고 의학에 입문하여 3년 만에 의원이 되었다.
청년기 :
∙ 인근 마을, 산음, 거창, 함양, 단성, 합천, 대구, 진주, 의령, 창원. 남원,..을 돌아다니며 환자를 치료하였다.
∙ 수많은 백성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영남, 호남, 충청을 돌아다니며 인술을 펼쳤다.
∙ 의창을 주관하여 굶주림에 있는 백성들을 구하였다.
∙ 1685~1686년 흉년에 백성들이 굶주리자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었다
∙ 자신의 가진 것이 모자라자 경상좌우도 사우들에게 백미 100여석을 빌려와 나누어 주어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하였다.
장년기 :
∙ 호흡기 감염병 홍역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홍역 치료서 <마진편>을 저술하였다.
∙ 수많은 백성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인서문견록>, <실험단방>, <침구방>, <부인방> 등 의서 저술하였다.
∙ 백성들에게 질병 치료도 중요하지만, 질병에 걸리지 않는 질병 예방을 주창하였다.
∙ 후학을 가르쳤다.
노년기 :
∙ 한양을 방문하여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 임금으로부터 1710년과 1713년 두 번의 부름을 받아 어의가 되었고, 도수환 처방으로 임금 숙종을 치료하였다.
∙ 숙종 임금의 병을 고친 공로(功勞)로 말 한마리와 비단을 받았으며, 안산 군수 제수되었고, 숭록대부 품계를 받았다.
4. 의약동참(어의 활동)
1710년 임금 숙종의 환후가 발생했다.
임금이 불려서 대궐로 갔다.
1713년 10월 임금 숙종의 환후가 발생했다
산음의 명의 유이태를 대궐로 불렀다.
11월 말, 눈 내리는 날 말을 타고 산음 생림을 출발하여 전주를 경유하여 한양의 대궐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죄로 감옥에 하옥되었다.
국청에 나가서 사실을 말했고, 감기에 걸려 전주에서 잠시 쉬었다는 것이 전라도 관찰사 유봉휘의 장계에 밝혀지었다.
임금은 유이태에게 부사용 관직을 제수했고, 어의로 활동을 했다.
도수환으로 임금 숙종의 병을 고친 공로로 말 1필과 비단을 받았다.
어의 명부 <의약동참선생안>에 종1품 안산군수롤 기록되어 있다.
5. 조선의 홍역 태두
조선왕조가 가장 무서워했던 질병은 마진(홍역)과 두진(천연두)이다. 1613년 조선에 처음으로 홍역이 발생했다. 1680년과 1692년 홍역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유이태는 홍역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볼 수 없어 홍역을 직접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홍역 치료서 <마진편>을 저술했다. 이 책은 조선인 최초로 저술한 홍역 치료서이다.유이태의 홍역 치료 방법은 다산 정약용의 <마과회통>에 영향을 끼쳤다.
이같이 ‘유이태’는 홍역학의 태두(泰斗)로서 조선의 마진(홍역) 치료의 문(門)을 열었으며, 산청을 홍역 치료 발상지로 만들었고, 우리나라의 전염병 퇴치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6. 이름이 빼앗긴 유이태
유이태(劉以泰)는 매우 기구한 인물이 되었다.그의 생애가 기구한 것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기구한 운명에 처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5道를 실천하며 의창을 주관하여 굶주림에 있는 백성을 구했고, 인술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던 그의 향리 산청군청 공무원에 의하여 안타깝게도 재조명되지 못하고 이름이 빼았겼다.
유이태의 향리 산청군청 군수들과 공무원들에 의하여 유이태의 이름이 허구 인물 유의태(柳義泰)로 바뀌었으며, 유이태의 사적이 가짜 유의태(柳義泰)로 바뀌어져 있다.
임금 숙종의 환후를 고친 공로(功勞)로 안산군수에 제수(除授) 되었으나, 관직을 고사하고 향리 산음(현재 산청)으로 돌아와 오직 병마(病魔)에 고통을 받고 있던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술(醫術)만을 생각했다.
7. 5도(道) 실천
유이태는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일생을 5도(道) - 효도(孝道), 시도(施道), 정도(正道), 의도(醫道), 수도(壽道) - 를 실천했다.∙ 부모를 공경히 모시는 효도(孝道)는 자식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도리이다.
∙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며 나눔을 실천하는 시도(施道)는 가진 사람들이 나눔을 실천해야 하는 도리이다.
∙ 바른길을 걷는 정도(正道)는 백성들이 지켜야 하는 도리이다.
∙ 재물을 탐하지 말고 병의 근원을 탐구해 증세에 따라 처방하고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치료하는 의도(醫道)는 의원들이 받아 들어야 하는 충고이며, 길이다.
∙ 평상시에 건강할 때부터 자신의 몸을 철저히 관리하고 절제하는 생활로 건강하게 오래 살며,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수도(壽道)는 백성들이 실천해야 하는 길이다.
유이태는 의원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를 강조하며 실천했고, 인술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인의지도(仁義之道) : 어질고 의로운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였다.
∙ 정성지도(精誠之道) : 환자를 정성을 다하여 치료했다.
∙ 근면지도(勤勉之道) : 끊임없이 의학 연구에 매진했으며, 환자 치료에 헌신했다.
∙ 청렴지도(淸廉之道) : 진료 과정에서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 화목지도(和睦之道) : 환자의 마음을 평안하도록 했다.
8. 의학 정신
유이태는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적인 측면을 넘어 환자를 진심으로 대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따뜻한 마음을 강조했다.유이태의 의술은 백성을 향한 깊은 사랑과 헌신을 바탕으로 실천되었다.
'인술제세(仁術濟世)'로 어진 의술로 세상을 구제하는 것에 있었다.
즉,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료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질병 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건강한 삶을 위한 실천을 독려했다.
경험을 중시하여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환자를 치료하고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의사로서의 책임감과 윤리 의식을 강조하며 참된 의사의 전범(典範)을 제시했다.
9. 의학 사상
유이태의 의학사상은 인생관, 정신관, 학문관, 수기관, 치병관, 의약관 등 6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인생관 :
부모를 공경히 섬기기 위하여 반드시 의학을 알아야 하며, 가족보다는 백성을 먼저 돌보아 질병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위민(爲民) 정신으로 개인의 영달보다 백성의 안녕을 우선시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돕는 것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 정신관 :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귀천·친소·민관·빈부를 차별하지 않고, 백성을 보살피는 위민(爲民)·애민(愛民)정신을 펼치는 박애정신을 펴는 것이다.
∙ 수기관 :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건강 유지의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으며, 분노를 경계했다.
건강할 때 올바른 식습관과 생활 습관을 통해 질병을 예방하는 것을 강조했으며, 절제된 생활을 권유했다.
또한, 본심(本心)을 잃지 않고 의로운 일을 변함없이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 학문관 :
후세에 공(功)과 혜택을 후세에 넘기고, 후학(後學)들이 새로운 치료법을 만들어 의학이 날마다 발전되는 것이다.
∙ 치병관 :
건강할 때부터 절제하는 생활로 병을 예방하고, 발병하면 근원을 찾아서 신속히 치료하며, 병이 완치된 이후에 철저한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다.
단순히 증상만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고 치료하고자 노력했고, 약물 치료뿐만 아니라 침, 뜸, 식이요법 등 다양한 치료 방법을 활용하여 환자의 회복을 도왔으며, 환자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며 재물을 탐하지 않고 환자의 치료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고, 발병 초기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 의약관 :
자연환경에서 구할 수 있는 향약재를 이용한 치료법 개발하여 채록하고, 치료한 사례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향약 의학을 고수하는 것이다.
실증주의(實證主義)로 이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 임상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과 치료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수입 약재 대신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향약)의 효능을 연구하고 활용하는 데 힘썼다.
이는 백성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고 실질적인 치료에 도움이 되고자 한 노력이다.
10. 업적
조선 최초 홍역 전문 치료서 <마진편> 저술:
홍역으로 인한 사망률이 높았던 상황에서 <마진편>은 홍역 치료의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했으며, 많은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
풍부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의서 저술:
<인서문견록>과 <실험단방>은 임상 경험과 효과적인 치료법을 후대에 전수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향약 활용법을 제시하여 백성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백성을 위한 헌신적인 의료 활동:
가난하고 병든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는 등 진정한 ‘인술(仁術)'를 실천한 의원으로 존경받았다.
헌신적인 봉사는 환자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의료인의 귀감이 되었다.
실증적인 의학 연구: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실제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의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유이태는 뛰어난 의술과 숭고한 인품으로 조선 시대는 물론 후대에도 큰 존경을 받는 선비 의사이다.
유이태의 삶과 업적은 오늘날 의료인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
11. 유이태 건강관리법
유이태는 백성들에게 장수를 위한 건강관리법을 남겼다.사람들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평상시의 마음가짐, 섭생(攝生), 소식(小食), 절제 있는 생활, 질병 예방, 질병 초기 치료, 생명 중요성 그리고 의원들에게는 약의 중요성, 새로운 처방 등 건강 관리법을 남겼다.∙ 마음이 편안하면 기운이 편안하고, 근심이 지나치면 마음을 해(害)하니 마음을 다스려라.
∙ 화를 내면 화기가 일어나 치료가 어려우니, 노여움을 경계해라.
∙ 건강할 때 계절에 따라 섭생(攝生)하여 몸을 튼튼하게 해라.
∙ 과식하면 몸을 해(害)하여 질병의 근원이 되니 소식하라.
∙ 몸을 힘들게 하면 원기가 허(虛)하게 되니 절제된 생활을 해라.
∙ 병은 몸을 해(害)하니 건강할 때 질병을 예방해라.
∙ 목숨이 재물보다 중요하니 치병(治病)에 최선을 다해라.
∙ 조그마한 병(病)이 큰 병으로 변하니, 발병 초기에 신속히 병을 치료하라.
∙ 병이 완쾌한 이후에 새로운 질병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고 질병 발생을 대비하여 철저하게 건강 관리해라.
∙ 치병(治病)시 병의 근원이 되는 곳을 탐구하여 치료해라.
∙ 약물을 잘 복용하면 모든 병(病)을 물리칠 수 있다.
∙ 의원은 처방에 따라 정확한 약제를 투약해라.
∙ 병을 치료하는 동안 약(藥)의 오남용을 주의해라.
∙ 기존 처방에만 의존하지 말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새로운 처방을 해라.
의학의 발전과 질병없는 세상을 꿈구었다.
12. 유이태가 남긴 유훈 시(詩)
유이태는 인서문견록을 저술하면서 그의 의학 정신을 담은 시를 남겼다.余無功利及於人(여무공리급어인) 내가 사람들에게 베푼 공(혜택)이 없었으니
以是傳之萬病春(이시전지만병춘) 이로서 전하여 만병의 치료에 전한다.
手錄年年成一冊(수록년년성일책) 해마다 내가 손수 기록하여 하나의 책을 만들었으니
後來觀者補相新(후래관자보상신) 훗날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이 덧보태어 이 책을 새롭게 하길 바란다.
豈獨爲子孫計(기독위자손계) 이 책을 지은 것이 어찌 내 자손들만을 위한 계책이었겠는가?
猶且濟衆人心(유차제중인심) 오히려 많은 사람을 구제하려는 마음이라네.
盖無病都無用(개무병도무용) 무릇 세상에 병이 없으면 역시 이 책 또한 쓸모가 없을 것이니
願書閣長不尋(원서각장불심) 서재에 감추어 두고서 영원히 찾지 않기를 바란다.
13. 의의와 평가
전염병 홍역이 창궐하자 퇴치에 공헌하였으며 조선인 최초로 홍역 치료서 『마진편』을 저술하여 조선의 홍역 치료의 문(門)을 열었다. 의학 발전과 질병 예방으로 질병 없는 세상을 꿈꾸었고, 환자 치료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여 유의(儒醫)의 전범(典範)을 제시하여 참된 의사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조선의 의술 윤리 도덕을 확립한 인물이다.질병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의원이었다.
또한, 병 치료를 받은 환자들, 사우들고 백성들과 후세 사람들은 환자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여 진정으로 의원을 따르는 심의(心醬), 죽어가고 있던 사람을 실리는 신의(神醫)라고 불렸다. 또한, 백성들은 유이태의 의술을 중국의 명의 화타와 편작. 의학의 발달과 의술의 윤리도덕을 확립한 서양의 히포크라테스에 비유하였다.
14. 유이태가 류의태(유의태, 柳義泰)로 바꾸게 된 과정
산청의 전설적인 명의 유이태는 의서 동의보감 편찬자 허준 일대기 드라마 <허준>과 <소설 동의보감>에서 허준을 가르친 살신성인의 스승으로 묘사된 유의태의 모델 인물이다.1965년 경희대 한방병원장 노정우가 진주 거주 한의사 허민으로부터 전화 통화시 전해들은 산청의 명의 유이태 이름을 진주 근처 대성 진주 유(柳), 의로울 의(義), 클 태(泰), 유의태로 만들어 인물한국사에 논문 <허준>에 발표하였다.
소설가 이은성이 노정우의 논문 <허준>에서 유의태를 읽고 소설과 드라마에서 유의태를 허준의 살신성인의 스승으로 묘사했다. 물론, 생존연대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실제 유이태는 허준보다 후대의 사람이다.
1968년 노정우는 인물한국사의 논문 <허준>에서 허준의 성장지(산청), 허준의 스승(유의태), 허준의 조모 친정(산청군 신안면 하정리)를 오류로 알고 산청, 유의태, 조모 친정산청을 삭제한 논문 <한국의학사>을 고려대학교 <한국문화사대계>에 발표했다. 허준의 조모 친정은 경기도 금천군 서면 백암리로 현재의 경기도 광명시 광명시청 주변이다.
2000년 2월 1일 노정우는 유철호에게]"고증을 하지 못한 점 미안하다. 허준의 스승은 역사학자가 밝혀내야할 몫이다."라고 말했다.
유철호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노정우가 말한 내용과 허준 조모 친정 묘소(이장된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관읍 사능리)를 답사하여 노정우 논문이 오류이었음을 밝혔다.
15. 참고문헌
- <기억하고 싶은 조선의 참 의원 유이태>
- <조선의 명의 유이태 연구>
- <허준의 스승 柳義泰는 허구다.>
- <조선의 히포크라테스 유이태>
-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
- <마진편>
- <인서문견록>
- <실험단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국구비문학대계>
- <천옹유고>
- <묵재집>
-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 <산청군지>
- <산청향교지>
- <거창군지>
- <조선환려승람>
https://www.youtube.com/watch?v=7g9TTesZ9n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