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해남 윤씨[3] |
출생 | 1901년 12월 7일 |
전라남도 해남군 화이면 용덕리 (現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율동리 용덕마을[4] 468번지)[5] | |
사망 | 1929년 11월 15일[6] |
전라남도 해남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675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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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윤창하는 4촌 동생이다.[7]
2. 생애
1901년 12월 7일 전라남도 해남군 화이면 용덕리(現 해남군 화산면 율동리 용덕마을 468번지)에서 아버지 윤주엽(尹柱燁, 1873. 12. 7 ~ 1950. 11. 10)과 어머니 무안 박씨(1899. 10. 10 ~ 1936. 2. 8)[8]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해남군 해남면(現 해남군 해남읍) 고도리에 거주하면서 해남공립보통학교(現 해남동초등학교)에 다녔다.해남공립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그는 학교 기숙사에서 학우 김규수(金奎秀) 등과 함께 4월 6일 열릴 해남면 읍내 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운동 경고문을 제작해 등사했다. 그리고 시위 당일인 4월 6일 장터에 모여든 1,000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해남면 읍내 일대를 행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6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를 신청해 사흘 뒤인 5월 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6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1929년 11월 15일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고향인 해남군 화산면 율동리에 안장되었다가 2007년 11월 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이후 윤병하(尹秉夏)로 개명했다.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이 개명 전 이름인 윤옥하로 기재되어 있으므로 이를 따른다.[2] 대전현충원묘적부와 해남윤씨대동보 권2 446쪽에는 모두 윤병하(尹秉夏)로 등재되어 있다.[3] 호군공파(護軍公派) 26세 하(夏) 항렬.[4] 해남 윤씨 호군공파(護軍公派) 집성촌이다. 윤영일 전 국회의원과 윤한덕 전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 독립유공자 윤창하도 이 마을 출신이다. 이 마을은 본래 율동마을과 한 마을로서 해남 윤씨 호군공 윤종(尹種, ? ~ ?. 1. 26)의 5대손 윤후강(尹厚綱, 1579. 4. 21 ~ ?. 11. 28)이 본래 전라도 해남현 화일면 시목동리(現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송산리 시목마을)에 살다가 율동마을을 개척한 뒤 윤후강의 차남 윤상은(尹相殷, 1607. 10. 14 ~ 1684. 4. 14), 3남 윤광은(尹匡殷, ? ~ ?. 1. 12.), 4남 윤취은(尹就殷, 1616. 3. 15 ~ 1681. 12. 9) 등이 이곳으로 옮겨 와 개척한 것이라고 한다.[5]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의 필지는 1914년 12월 31일 토지조사사업 당시 윤옥하의 아버지 윤주엽(尹柱燁, 1873. 12. 7 ~ 1950. 11. 10)의 소유였다. 이후 1966년 6월 28일 13촌 지간의 족질녀(族姪女) 윤재남(尹在南, 1928. 4. 29 ~ 2011. 6. 30)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1972년 12월 9일 458-1번지와 458-2번지로 분리되었다. 이 중 458-2번지는 현재까지 윤재남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458-1번지는 1995년 2월 8일 장남 윤재원(尹在源, 1920. 3. 6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2006년 10월 12일 장손자 윤장금(尹長錦, 1942. 6. 11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이후 2015년 4월 9일 장증손자 윤순주(尹淳朱, 1973. 1. 5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6] 음력 10월 15일.[7] 윤옥하의 아버지 윤주엽(尹柱燁, 1873. 12. 7 ~ 1950. 11. 10)과 윤창하의 아버지 윤주백(尹柱伯, 1879. 6. 10 ~ 1949. 11. 3)은 본래 친형제로 각각 윤석호(尹奭浩, 1840. 3. 28 ~ 1913. 10. 18)의 셋째 아들과 넷째 아들이다. 그러나 각각 11촌 지간의 족숙(族叔)인 윤현호(尹賢浩, 1832. 12. 26 ~ 1886. 7. 19), 윤인호(尹仁浩)에 입양되면서 족보상 12촌 지간으로 멀어졌다.[8] 박상경(朴相敬)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