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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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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丑洋擾
을축양요
시기1865년 6월 20일 (음력 5월 27일)
장소강화도 일대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2제국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선전관 정운구
파일:조선 어기.svg 순무영 초관 한성근
파일:조선 어기.svg 문수산성 별장 신도혁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피에르-귀스타프 로즈 제독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앙리 드 벨로네 백작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해군 소령 보셰
병력
문수산성 병력 170명[1]
증원군 200여 명
842명
호위함 1척
초계함 1척
포함, 통보함, 슬루프 총 5척.
피해
조선군 장졸 사상자 발생
주조선 프랑스인 및 천주교도 민간인 피해 발생
주조선 천주교구 주교 베르뇌 주교 사망
사망자: 4명
부상자: 다수
결과
프랑스의 철군, 조선의 전략적 승리.
유리한 조건으로 조불수호조규 체결.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5. 여담

[clearfix]

1. 개요

문피아에서 연재되었던 대체역사물 고종, 군밤의 왕에서 일어난 사건. 원 역사의 병인양요다. 병인년이 아니라 을축년에 일어나 을축양요로 명명되었고 기독교를 허용함에 따라 병인박해가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원 역사와 처음부터 끝까지 다르게 진행됐다.

2. 배경

1864년,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믿는 부인 민씨를 통해 조선교구의 제4대 교구장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 주교에게 러시아를 막을 방도를 만들어 준다면 이 땅에 교회가 설 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이 나라가 문호를 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조선말을 잘하는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를 한양으로 파견하였고 대원군은 열강의 포함외교를 역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리델 신부에게 조정에서 필히 천주교 허통에 대한 반대가 있을 것이니 프랑스 극동함대를 불러와 통교의 명분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극동함대를 부른 값이 결코 조선에게 가볍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고뇌하였으나 대원군의 연락에 응답한 시점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있기 때문에 북경에 위치한 프랑스 공사관에 큰 전함을 보내 현지인들을 위압해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하지만 그 무렵 극동함대는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적잖은 피해를 입어 곧바로 출정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퇴임을 앞둔(...) 베르테미 공사와 샤를 제독이 어려운 일은 후임에게 던져놓고 가자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조선은 가만히 앉아 반년의 유예를 얻게 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865년 6월 20일. 신임 북경 공사대리 앙리 드 벨로네가 중국 옆에 있는 미지의 나라에 누구보다 먼저 프랑스 깃발을 꽂을 꿈에 부풀어 호위함 세미라미스 호과 정비가 끝나지도 않은 선박 6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이끌고 제물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양선을 나타났다는 첩보를 받고 파견된 신헌은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싶다면 무장을 해제하고 자신을 따라 한성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이에 벨로네는 노발대발하며 자신이 대원군의 요청을 받아 이 땅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통상의 이익을 나누고자 머나먼 바다를 건너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신헌은 우선 우리 정부는 대원군의 요청을 인지한 바가 없고 올해 초부터 나라의 법을 바꿔 모든 종교를 허용하고 있으며 통상의 이익은 나라에 조세만 바친다면 이곳 제물포에서 언제든 사고팔수 있으니 이미 이루어진 바라고 벨로네의 말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던 종교와 통상의 자유가 자신들보다 한 발 앞서 이미 보장되어 있으니 할 말이 없기도 하고 '비문명국'의 '이교도 야만인'이 감히 자신에게 설교를 늘어놓는 이 상황이 더없이 모욕적이었던 벨로네는 공명심에 눈이 멀어 염하수로를 거슬러 올라가 무력 시위를 벌이기로 하니 이것이 을축양요의 시작이었다.

3. 전개

6월 21일 새벽, 제물포 진입을 시도하던 극동함대의 상륙정 몇 척이 바다안개 때문에 좌초되었다. 귀환할 때도 사용할 배였기 때문에 지휘관이었던 보셰 소령이 부하들을 데리고 어떻게든 끄집어내려고 용을 쓰고 있었는데, 그때 소란을 듣고 조선인들이 나타나 무리를 지어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두 같은 흰 옷을 입고 있어 이들을 제복차림의 군인이라 단정한 몇몇 부사관들이 사격을 지시하였는데 이 조선인들은 다름 아닌 제물포에 거주하는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좌초된 배를 보고 도와주려고 온 것인데 이를 적으로 착각한 것. 심지어 이 오인 사격으로 프랑스인 베르뇌 주조선 천주교구 주교가 사망하고 만다.

이에 로즈 제독이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며 조선에서 군대를 파견하기 전에 염하수로를 거슬러 올라가 적절한 지점에 봉쇄선을 형성하여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도록 하자고 제안하니 달리 방도가 없었던 벨로네가 이를 승인하였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고 해군총병대는 양총의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순식간에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용진진을 함락시키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하여 문수산 점령에 나섰다. 그런데 해군총병대는 몰랐지만 문수산에는 선왕 철종의 능묘 예릉이 있었다. 선왕의 왕릉을 버려두고 도망쳤다가는 무슨 벌을 받을 지 알 수 없었던 지휘관 정운구와 예릉 능참봉을 비롯한 조선군은 이 악물고 버텼으나 프랑스군의 화력에 병력들이 지속적으로 무력화되면서 문수산마저 함락당할 위기의 순간에 때마침 한성근이 이끄는 원군이 도착했고 이에 지나치게 진군한 상태에서 적이 갑작스럽게 출현하자 매복을 의심한 해군총병대가 물러나 문수산을 사수할 수 있었다.

4. 결과

상황이 이렇게 굴러가니 애초에 아무런 명분도 없는 이번 원정을 마뜩잖게 생각했던 로즈 제독이 지금이라도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압력을 넣었고 벨로네는 안 그래도 약점을 제대로 잡힌 터라 조선이 베르뇌 주교의 죽음을 포함해 모든 일을 덮어주는 조건으로 타 열강이 조선을 압박하면 프랑스가 중재해준다는 내용이 담긴 '조불수호조규'를 체결했다.[2] 벨로네가 프랑스 입장에서 비합리적인(즉 거의 평등한) 조건의 조약으로[3] 나라의 문을 열어준 덕분에 조선은 첫 단추를 잘 꿰면서 이웃 나라들에 비해 훨씬 관대한 조건으로 문명화된 세계의 변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훗날 콩고에서 벨기에가 내세운 백인의 의무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때 프랑스는 조선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조선과 평등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타 열강을 압박하며 여론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벨로네와 로즈 제독은 외교 실패에 가까운 결과를 상대에게 떠넘기기고자 각자 "조선은 말이 통하는 준문명국인데 군인들 탓에 갈등이 발생할 뻔했다", "반(半)문명국임에도 강력한 군대를 가진 나라를 상대로 외교관이 멋대로 무모한 작전을 지시했다"고 부풀려 포장해 본국에 보고했고, 이 소문은 타국으로도 퍼져나가면서 동방의 조선이라는 나라는 함부로 짓밟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외교적 인식이 생겨 결국 어쩌다 보니 조선이 무형의 자산을 갖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 정계에도 큰 파장이 미쳤다. 특히 이하응은 프랑스와의 밀약이 발각된 탓에 큰 정치적 위기를 맞닥뜨렸으며, 원 역사에 비해 권력이 위축되는 결과를 낳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아들이 쉴드를 쳐준 덕분에 큰 위기는 넘어갔기에, 원 역사에 비해 부자지간이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승전으로 선전했을지언정, 조선 군부는 프랑스군과의 압도적인 전력차 및 그에 따른 심각한 전술적 패배에 크게 경악했으며, 이는 별기군을 창설하는 등 군제 정비의 계기가 되었다.

5. 여담

귀남은 프랑스인 주교의 허망한 죽음에 대한 배려로 주교의 조선식 이름에서 따온 경일학당을 제물포에 세워 서양인과 교류의 장으로 쓰게 했는데,[4] 이후 경일학당은 손덕명(쑨원)을 비롯한 청나라에서 서양 학문을 배우겠다고 종종 유학 오는 동아시아의 명문대학으로 성장한다.


[1] 정운구의 부하 34명, 진무 좌영 소속 병졸 48명, 진무 중영 병졸 51명, 예릉 능참봉 오 아무개가 데려온 동네 장정과 머슴 37명.[2] 프랑스군이 자국민을 총으로 쏴죽임 + 외국 왕릉을 공격했다는 것으로 후자로 도의적 감점이 생기고(당시 유럽 세계는 먼 나라라도 왕족 대접은 해 주었기에 최소한 식민지가 아닌 타국에서 왕의 무덤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전자는 주변국들의 비웃음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분노한 국민들이 본국의 정권을 뒤엎어 버릴 수 있는 문제였다. 심지어 이 세계관에서 베르뇌 주교는 말 몇 마디로 자발적 발생한 기독교 신자들의 국가의 문호를 무혈(無血)로 개방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말도 안 되는 업적을 쌓았기 때문에 더더욱 점입가경이다.[3] 최혜국 대우나 영사재판권, 해안측량권, 조차권 모두 챙기지 못한 평등조약이었고, 프랑스는 조선 정부가 타국과 외교 문제를 빚을때 중재해줄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간 탓에 뒤따라온 영국이나 독일 등의 열강들도 프랑스 눈치도 보이고 해서 함부로 불평등조약을 맺지 못했다. 특히 벨로네 공사는 베르뇌 주교 건으로 최소 자기 모가지가 걸린 상당한 정치적 약점이 잡힌 터라 타 열강이 조선에 손아귀를 뻩치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4] 서양에서는 위인의 이름을 딴 사립대학을 짓는 경우가 종종 있고 이런 풍습이 한국 사립대학에도 수입되었는데 귀남이 근현대인으로 서울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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