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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4:01:18

의령남씨가전화첩

1. 개요2. 내용3.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4.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5.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葱臺試藝圖)6.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7.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8.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82호

1. 개요

宜寧南氏家傳畵帖. 조선 시대 의령 남씨(宜寧南氏) 가문에서 태조, 중종, 명종, 선조, 영조 년간에 있었던 국가 행사를 그림으로 그려 남겨놓은 가전화첩. 현재 홍익대학교 박물관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홍익 대학교본이 서울특별시 시도 유형 문화재 제382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가전화첩이란 조선시대에 국가적인 차원의 각종 행사나 의례를 치른 뒤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왕의 명령 또는 당시 참석했던 관원들의 발의에 의해 당시 행사 장면을 화폭에 담아 대대로 전승 보관케 한 것이다.

의령남씨가전화첩은 의령남씨 가문이 태조, 중종, 명종, 선조, 영조년간에 있었던 국가 행사를 그림으로 남긴 것으로,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葱臺試藝圖),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의 5폭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대 인터넷 상에서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의 경복궁을 묘사한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가 가장 유명하다.

3.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파일:태조망우령가행도1.png
파일:태조망우령가행도2.jpg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장지(葬地)를 신하들과 함께 돌아보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조선 개국1등공신인 남재(南在, 1351년 ~ 1419년)가 자신의 장지를 태조(太祖)의 수릉(壽陵)으로 헌상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겨 이를 기념하는 그림을 제작한 것이다.

태조가 한창 자신의 능지를 물색하던 1395년 ~ 1396년 사이에 그려진 것이며, 현대의 건원릉 지역을 묘사한 것이다.

4.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파일:중묘조서연관사연도1.jpg
파일:중묘조서연관사연도2.jpg

조선 중종이 1535년에 세자였던 인종춘추(春秋)를 떼자, 이에 교육에 힘쓴 서연관 39명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서 베풀었던 연회 장면을 그린 것이다. 네티즌들 사이에선 의령남씨가전화첩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하다.

당시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었던 의령 남씨 남세건(南世健, 1484년 ~ 1552년)의 주도하에 그렸다. 한국의 궁중 행사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며, 임난으로 완전 소실되기 이전의 구(舊)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을 가장 정밀하게 보여주는 자료로 인정받는다.

당시 경복궁은 중층으로 된 문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단, 중종실록 1520년(중종 15년) 기사에는 근정전이 청기와로 이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표현되지 않은 것은 미스터리하다.

5.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葱臺試藝圖)

파일:명묘조서총대시예도.jpg

조선 명종이 서총대에서 거행한 문무시예(文武試藝)를 그린 것으로, 당시 의령 남씨였던 남응운(南應雲, 1509년 ~ 1587년)이 백마와 흑마를 하사받은 장면을 그려 남기게 한 것이다.

6.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파일:선묘조제재경수연도1.jpg
파일:선묘조제재경수연도2.jpg
파일:선묘조제재경수연도3.jpg
파일:선묘조제재경수연도4.jpg
파일:선묘조제재경수연도5.jpg

총 5면으로 이루어진 그림으로, 1605년(선조 38년) 4월에 의령 남씨 남이신(南以信, 1562년 - 1608년)을 포함한 13명의 관리들이 각자 70세 이상의 노모를 모시고 삼청동 공해(公廨)에서 벌였던 경수연을 다섯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것이다.

7.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

파일:영묘조구궐진작도.jpg

1767년 12월 16일에 조선 영조가 경복궁 근정전 옛 터에서 백관들에게 소작(小酌)을 받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당시 우참찬(右參贊)이었던 의령 남씨 남태회(南泰會, 1706년 - 1770년)의 주도하에 제작하였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탄 후에도 그 터가 그냥 방치된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는 증거자료가 된다.

8.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82호

태조 년간(1392년 ~ 1398년)부터 중종 년간(1506년 ~ 1544년), 명종 년간(1545년 ~ 1567년), 선조 년간(1567년 ~ 1608년), 영조 년간(1724년 ~ 1776년)에 있었던 특정 사건이나 행사에 의령 남씨 출신이 관련되면서, 이를 기념하는 그림과 관련 기록을 묶어,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葱臺試藝圖),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 등 5개의 개별 화첩으로 꾸민 것이다.

의령 남씨인 남재, 남세건, 남응운, 남이신, 남태회 등이 각각 참여했던 행사의 시기와, 현존하는 <태조망우령가행도>를 비롯해 <중묘조서연관사연도>, <명묘조서총대시예도>, <선묘조제재경수연도>, <영묘조구궐진작도>의 제작시기는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령 남씨 가문의 인물이 조선 왕실과 관련한 특정 행사에 직접 참여했던 사실이 관련 기록과 행사 장면을 묘사한 화책으로, 일괄로 현전하고 있다는 점과 현존하는 유사한 사례의 작품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회화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