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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3:10:34

이규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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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특별자치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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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강원도지사
이규삼
李奎三 | Lee Kyusam
파일:이규삼.jpg
출생 1924년
강원도 철원군
사망 1988년 (향년 64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1924~)
1. 개요2. 약력3. 강원도지사 이전4. 강원도지사 겸 군인 시절5. 강원도지사 이후6. 이후7. 출처

[clearfix]

1. 개요

이규삼(李奎三)은 제 12대 강원도지사이며 군인이다.

2. 약력

3. 강원도지사 이전

1924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났다.

1944년 서울 경신고등학교를 졸업 광복후 육군사관학교 2기로 입학하여 1946년 졸업하고 소위를 임관했다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9년 5월 1일 단속(取締.취체)한 군수품을 처분한 헌병대 한필동(韓弼東) 대령 등 12명의 현병대원들에게 파면조치를 취하였다 이날 징계위원으로 이규삼 외 5명이 있었다

4. 강원도지사 겸 군인 시절

희망의 마을 건설
강원도지사 당시 슬로건

4·19 군사정변 후 박정희와 친분이 있었는지 혁명정부에서 9개도지사 중 강원도지사에 이규삼을 1961년 5월 24일에 임명한다

1961년 6월 22일 9시에 원주시청회의실에서 강원도 영서지역 5개 시·군의 중요기관장회의를 열었다 이날 41명의 시장군수•교육감•경찰서장•중고등학교장 등이 참석했다

1961년 6월 22일 본사에 기탁절량된 농사 구호금 중 100만환(약3900만원)이 본보 강원지사 이규상(李圭祥)에 의해 강원도지사인 이규삼에게 와 인제•양구•화천•금화 등 4개군을 제외한 7만 8천 9백 68명의 영세농가에게 분배하여 주었다

그러나 얼마안가 경남•전북•강원 3개의 도지사를 해임 하여 강원도지사에서 해임되었다. 그후 강원도지사에는 이용 육군 준장이 들어왔다

5. 강원도지사 이후

1961년 11월 25일 이규삼 중장은 동사단참모를 비롯한 전 장병들에게서 겨우 짜낸 돈으로 소년개척단[1]이라는 전쟁고아들에게 운동화•의료품 약간의 책을 사서 건내주었다. 그리고 39사단은 천막살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30평 가량의 주택을 마련할 계획을 세워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6개월간에 협조를 얻어 39사단의 협조를 얻어 황무지 3만5천평을 개간해서 그 중 1만여평에는 보리와 시금치 마늘등을 심었다고한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여러 지역에서 여러 종자들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1964년 4월 5일 예비역으로 편입됐다.

6. 이후

1969년 한국준설 공사 상임 감사를 지내고 철원으로 낙향하여 농장을 경영하였다가 1988년 사망한다.

7. 출처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149719590501e10316&set_date=19590501&page_no=3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225219610525m10118&set_date=19610525&page_no=1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228019610622m1026&set_date=19610622&page_no=2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229019610702m1039&set_date=19610702&page_no=3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234519610826m10118&set_date=19610826&page_no=1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244019611129m1029&set_date=19611129&page_no=2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251619620213e1035&set_date=19620213&page_no=3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321019640405m10219&set_date=19640405&page_no=2
http://cheorwon.grandculture.net/cheorwon/dir/GC07800758?category=%EC%8B%9C%EB%8C%80&depth=3&name=%ED%98%84%EB%8C%80&search=%ED%98%84%EB%8C%80%2F%ED%98%84%EB%8C%80
http://cheorwon.grandculture.net/cheorwon/dir/GC07800758?category=%EC%8B%9C%EB%8C%80&depth=3&name=%ED%98%84%EB%8C%80&search=%ED%98%84%EB%8C%80%2F%ED%98%84%EB%8C%80

[1] 3만평의 땅을 30여명이서 개간하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