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883년 일본 기독교 친목회에서. 가장 앞열, 유일하게 한복입은 이가 이수정이다. 그리고 이수정의 바로 좌측이 쓰다 센, 바로 위가 도시샤대학의 창립자인 '니지마 조'이다. |
李樹廷
1842년 ~ 1886년
조선 말의 성서 번역가
2. 일생
1842년 전라도 옥과현(현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입면·겸면·오산면 일대)에서 이병규(李秉逵)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이씨로서 왕족의 먼 친척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장서각 왕실족보에 그의 이름은 검색되지 않는다.그는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거름으로 위장해 탈출시킨 업적이 있으며 이 사건으로 왕궁의 신임을 얻었다. 그 후 신사 유람단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갔다. 농업과 법률을 공부를 위한 유학의 일환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의 대표적인 농학자 쓰다 센을 만났는데, 이 쓰다 센이 유럽에 가서 세례까지 받고 돌아온 대표적인 기독교인이었다. 이때문에 일본을 몇번 왕복하는 중에 개신교로 개종했고, 일본에서 세례까지 받았다.
그 후 성경의 번역에 힘썼으며 배재학당의 아펜젤러, 연희전문학교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등 외국 선교사들에게 조선으로 입국하기 전에 우리말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 그들은 선교 활동 중 이 사람의 번역본을 사용했다고. 개화파 주요 인물들에게 개신교를 전파하였다.
하지만 갑신정변 이후에는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에게도 미움을 샀다. 이수정은 민영익의 도움을 상당히 받고 있었는데,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이 거의 죽을뻔했던 것 때문에 김옥균과의 사이가 틀어졌다. 이 때문에 여러차례의 암살시도가 있었는데, 1886년 3월 암살시도로 상당한 중상으로 입었고 해당범인은 일본에서 체포되어서 징역형에 처해졌다. 이에 대해서는 김옥균 측의 암살시도라는 이야기가 많은 편이다. 이 때, 조선 정부는 일본 유학생들에게 귀국명령을 내리고, 암살시도에 시달리던 본인 역시 이 시기에 영구귀국한다.[1]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했다.
2.1. 순교
기독교를 적대시하던 당시 집권 세력에 의해 처형되었다. 당시 귀국한 유학생 가운데 유형준, 김한기 등이 처형당했는데, 이수정 역시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당시 이수정과 친밀하게 지냈던 선교사 클라라 루미스는 자신의 글에서“권력을 잡고 있는 보수파들에 의해 체포되어, 장차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반대할지도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사지를 토막 내 처형당했다”
라고 적었다. 일본교회문건에도 처형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일본에서는 추모회까지 열렸다. 조선 정부는 기독교 전파를 박해하였다. 이에 개신교를 전파한 이수정은 처형당하였고 순교하였다. 예시.
[1] 이수정은 이전에 여러차례 귀국하라는 동생의 요청을 받았으나 거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