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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용/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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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을용의 클럽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학창 시절

황지중앙초등학교 때 축구에 입문, 강릉시의 축구 명문 강릉중학교, 강릉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1], 울산대학교 축구부에 입학했으나 학교 축구부에 적응하지 못하고 1년 만에 중퇴하고 만다.

3. 선수 활동

3.1. 철도청 축구단

8개월 정도 축구판을 벗어나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내다가 1995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소속 철도청 축구단에 입단한다.[2] 이을용은 철도청 축구단에서 1년 8개월을 뛰고 상무로 입대한다.

3.1.1. 부천 SK

상무 제대 후 1998년 K리그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부천 SK에 지명되며 드디어 프로 선수가 됐다.[3]

발레리 니폼니시, 조윤환, 최윤겸 등의 명장들의 지도 아래 윤정환-김기동-윤정춘-이을용이라는 황금 미드필더라인의 한 축을 맏으며,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유명해졌다.
3.1.1.1. 트라브존스포르 1기 (임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활약을 하고 단숨에 유럽 구단들의 주목을 받은 이을용은 당시 유럽 진출이 확실시 된 박지성, 송종국, 김남일, 이영표보다 먼저 쉬페르리그트라브존스포르와 계약하여 2002 월드컵 멤버 중 유럽 리그 진출 1호 선수가 된다. 초기에는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현지 적응 실패에다 부상까지 겹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4] 이러한 잡음과는 달리 2002년 한일 월드컵 3위·4위전에서 터키와 우호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덕분인지 현지 팬들에게는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2002-03시즌 쉬페르리그: 19경기(선발 16경기) 출전 3도움

3.1.2. 안양 LG 치타스/FC 서울 1기

부천 SK와 트라브존스포르 사이에 이적 분쟁으로 결국 트라브존스포르로의 완전 이적이 무산되었고, 2003년 여름 이을용은 안양 LG 치타스로 이적한다. 계약금 4억 원, 연봉 3억 5000만 원, 원소속팀인 부천에 지급할 이적료 4억 원 등 총 18억 5000만 원에 3년 계약을 맺었다.

안양 LG 치타스가 2004년 연고지를 서울로 이전하며 FC 서울로 이름을 바꿨을 때에도 남아서 활약했다.

3.1.3. 트라브존스포르 2기

2004년에 트라브존스포르로 다시 이적하였으며, 이번에는 임대가 아닌 완전 이적 형식이었다. 지난 번보다 좀 더 괜찮은 활약을 펼쳤다. 두 시즌 동안 리그, FA컵, UEFA컵, 챔피언스리그 예선을 통틀어 66경기에 나섰으며 1골 8도움을 올리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당시 트라브존스포르의 감독을 맡고 있었던 바히드 할릴호지치와 잠시 함께한 적이 있다. 튀르키예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5-2006 시즌에는 쉬페르리그 15라운드 페네르바흐체 SK와의 원정 경기에서 선취골을 득점하고 역전골을 어시스트하는 맹활약을 펼쳤으나 팀은 아쉽게 2:2로 비겼다. 이날의 득점은 약 3시즌 동안 튀르키예에서 활약하며 기록한 유일한 득점이다.

3.1.4. FC 서울 2기

2006년 7월, FC 서울로 복귀했다.

2008년까지 활약하며 팀의 2008년 준우승에 공헌하였으며, 튀르키예 시절 인연을 맺었던 세뇰 귀네슈가 감독으로 취임하자 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3.1.5. 강원 FC

2009년 자신의 고향을 연고지로 하여 새롭게 창단된 강원 FC로 이적 후 초대 주장을 맡아 베테랑이자 팀의 기둥으로 활약하였다.

2011년 강원의 부진 속에 주장을 맡고 있던 서동현이 2군으로 내려가며 주장 자리를 승계했다. 창단 시즌인 2009년 이후 2번째 주장직 선임. 현재 유소년 축구 교실을 여는 등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듯 하다. 그리고 2011 시즌 잔여 경기 3경기를 남겨놓은 10월 4일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강원에서는 첫 시즌 눈부신 활약을 보였으나 두 번째 시즌에서는 후보로 밀리기도 하는 등 굴곡이 있었다. 세 번째 시즌인 마지막 시즌에서도 중앙 미드필더를 두 명이나 용병으로 영입하는 등 팀의 플랜에 없어 보였으나 처참한 경기력이란 현실에 직면하자 결국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지막 시즌의 모습을 보면 노련함, 수비력, 패스, 키핑, 드리블에선 군계일학이었으나, 활동량과 순발력, 스피드 등이 현저히 줄었고 그에 따라 빠른 역습에 대한 대처는 근본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좋은 킥이 있다고는 하지만 활동량과 스피드가 받쳐주지 않는 탓에 답답한 경기양상을 중거리슛으로 타개하기도 어려웠다. 은퇴가 임박한 선수가 다 그랬지만 양날의 검이었다.

특히 팀을 리드해 줘야 될 고참이지만,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렇게 몸으로 막 부딪히는 호전적인 스타일이 아닌데다가 활동량까지 떨어져서 팀원들의 전투의욕을 고취시키기 어려웠다. 기왕에 물러나는 만큼 강원 FC로서는 스타일 변화의 기회로 삼았으면 어쨌든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수고 많았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 그래도 경기를 보면 중원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단연 이을용이었다.
[1] 이을용의 이런 경력 때문에 2002년 이후로는 강릉상고와 강릉농고에서 축구부로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롤모델의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2] 당시 철도청 감독이었던 이현창 전 이천시민축구단 감독은 이을용의 축구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이다. 또한 실업축구단에서 회의에 빠졌을 때 힘을 준 인물이 김승희 현 대전 코레일 감독이다. 특히 이현창 감독은 이을용이 울산대에서 적응을 못하고 뛰쳐나왔을 때 직접 찾아다니며 축구를 계속하게 했고, 혼자 살면서 고생하는 이을용에게 김치와 이불, 전기장판을 챙기기까지 했다. 또한 입대하기 전까지 이을용의 월급을 직접 관리한 뒤에 이을용이 입대할 때에 천만원 가까이 들어있는 통장을 주면서 군대에 보냈을 정도로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때문에 이을용은 이현창 감독이 아니었으면 축구선수 이을용은 없다고 본인이 말할 정도이고, 감독님이 아닌 아버지라고 말할 정도이다. #[3] 부천 SK 드래프트 2순위로 입단하였다. 본인은 자신이 1순위가 아닌 2순위인게 자존심이 상했다고... 당시 부천 SK의 1순위 지명은 곽경근이었다.[4] 공교롭게도 부진한 모습과는 달리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풀타임 출전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도움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