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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6:58:42

이재우(야구감독)

이재우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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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1983)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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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990)
감독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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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이재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1)
<rowcolor=#fff> 4대 5대
6
7대
감독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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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윤동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2~1994)
감독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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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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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2003)
김경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4~2011)
<rowcolor=#fff> 7대 8대 9대 10대 11대
감독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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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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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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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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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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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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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등번호 3번
강형석
(1990)
<colbgcolor=#c0281f><colcolor=#ffffff> 이재우
(1991)
안경현
(1992~2008)
}}} ||
파일:external/nanoo-attach.s3.amazonaws.com/21724a01d3591bafdf894c80682c778c_large.jpg
이재우
李在宇
출생 1945년 3월 25일 ([age(1945-03-25)]세)
대구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대구중 - 부산공고 - 경희대
포지션 유격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제일은행 야구단 (1964~1971)
육군 야구단 (1967~1970)
지도자 시애틀 매리너스 인스트럭터
OB 베어스 타격 인스트럭터 (1990)[1]
OB 베어스 감독대행 (1990)[2]
OB 베어스 감독 (1991)[3]
프런트 시애틀 매리너스 스카우트 (~2003)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
3.1. 감독 성적
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OB 베어스의 전 감독. 전 두산 베어스-한화 이글스 투수 이재우와 동명이인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야구선수의 이재우의 한자 이름은 李在, 감독 이재우의 한자 이름이 李在이다.[4]

2. 선수 경력

부산공고의 1963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당시 주전 유격수로 김명성 감독과 함께 우승을 이끌었다. 그 뒤 실업야구제일은행에 입단하는데, 입단한 첫 해 서울시청과의 경기에서 실업야구 사상 첫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동시에 7회에는 1이닝 3안타라는 진기록까지 세우기도 한다.[5] 그 뒤 육군 소속으로 있던 1967년 타격, 출루율, 도루 1위에 홈런 2위[6]를 기록하였고, 1970년에는 실업야구 역사상 최초의 3연타석 홈런을 친다.[7] 군 복무를 마치고, 1971년 미국으로 이민, 미국으로 건너가서 오클랜드 산하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에서 야구 선수로 뛰다가 은퇴했다고 전해지나, 레퍼런스에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실상 바로 코치 코스를 밟은 것으로 보인다.

선수로 주 포지션은 유격수였으나 입단 초기에는 3루수, 군 입대 전후로는 외야수로 전향했다. 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전진 대시 수비 후 1루로 스냅 스로를 한국에 도입한 인물.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미군에 입대해서 다시 2년간 군복무를 했다가 80년대 초에는 시애틀의 인스트럭터로 활동한다. 꼽사리긴 하지만 시애틀 올드타이머 올스타전에도 출전할 만큼 오랜기간 팀에 몸 담았다. 이후 OB 베어스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OB 베어스의 박용민 단장의 야구 참모 격인 인물이었다고 하는데, 이광환을 비판하고 1990년 감독 대행으로 부임하지만, 그의 시대는 한 마디로 베어스 역사상 최악.[8]

정식 감독으로 부임한 1991년, 당시 신생 창단 팀인 쌍방울 레이더스보다 못한 성적으로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7월에 중도 사임하게 된다.

사실 91 시즌 초반에는 그렇게 못한 것이 아니었다. 반짝 1위를 하기도 했었으나 중반의 11연패가 타격이 컸고 장호연의 부상으로 투수진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한것도 한몫했다. 당시 OB의 전력은 김성근 시절 노쇠화된 전력 탓에 거의 개차반이었다. 거기에 팀내의 좌완 투수이자 에이스였던 구동우를 노예로 굴리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이후 야구계를 떠나 미국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시애틀 스카우트를 겸직한다. 2003년까지 시애틀 매리너스 동양인 스카우터로서 활약했고 이 당시 롯데 자이언츠 입단을 두고 고민하던 부산고 3학년 추신수를 시애틀로 영입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외에도 백차승 또한 그가 데려와 뒤를 봐주기도 했다고.

3.1.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90OB 베어스 74 20 50 4 7위 -
1991 79 25 53 1 8위[9] -
­통산 153 45 103 5

4. 관련 문서


[1] ~6월 18일[2] 6월 19일~[3] ~7월 31일[4]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상에서는 한자를 李載雨로 표기한다.[5] 경기는 21:0으로 승리했고, 1이닝 3안타를 기록한 그 7회에는 제일은행이 10안타, 17득점을 기록하여 신기록을 작성했다.[6] 1위는 김응룡이었다.[7] 이는 한국 야구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며, 당시 기록에 대한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상대 투수는 유백만, 김철오.[8] 하지만 2014년 그보다 더한 흑역사가 탄생하는데...[9] 사퇴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