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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확 李廓 | |
<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db9e00> 출생 | 1590년 |
사망 | 1665년 (향년 75세) |
자 | 여량(汝量) |
시호 | 충강(忠剛) |
본관 | 전주 이씨 |
부모 | 부친 - 이유인(李𥙿仁) |
[clearfix]
1. 개요
조선의 무신.2. 생애
1590년 태어났으며 갓난 아기때 왜란이 일어나 부친은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신장이 8척이나 되고 음성이 큰 종소리 같았으며, 힘이 장사였다. 이항복의 추천으로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되었으며 대궐 후원에 들어온 호랑이를 잡은 적이 있었다. 이이첨이 문무백관을 위협하여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주장할 때에 참여하지않아 미움을 받았다.인조반정 때 돈화문 밖에서 수비하다가 밤에 반정군이 이르자 문을 열어 들어가게 하였다. 반정 후 반정군이 그를 문초하려 하자, 이귀가 길을 비켜준 그의 공을 이야기해여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 뒤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도원수 장만의 군에 들어가 선봉이 되었다. 마탄 전투 당시 반란군에게 격파당하자 시체사이에 쓰러져 말의 피를 발라 죽은 척해 살아나갔고[1] 이후 안령 전투 당시 포수 100명을 거느리고 창의문 길목을 틀어막고 기익현의 부대가 우회할때 적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우고, 자산부사를 거쳐 부총관이 되었다.
1636년에 회답사가 되어 청나라 심양에 갔을 때, 청에서는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왕을 황제로,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하여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고 할 때 그의 일행을 조선 사신으로 참여시키려고 하였으나, 결사적으로 항의해 의식에 불참하고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그 사실을 잘못 전하여 듣고, 한때 선천에 유배시켰다가 뒤에 충절을 알고 석방하였다. 이 해 병자호란으로 청군이 침입하자 인조를 호위해 남한산성을 수비하는 데 활약하였고, 난이 끝난 뒤 충청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41년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1665년 사망했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강이다.
[1] 다만 이 과정에서 이괄군과 내통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받아 이를 해명하기 위해 고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