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9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경오(敬五) |
본관 | 풍천 임씨[1] |
출생 | 1892년 3월 2일 |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상패계 누각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153번지) | |
사망 | 1964년 9월 16일 (향년 72세) |
묘소 |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풍취리 |
상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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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송구용은 그의 매형이다.[2]
2. 생애
1892년 3월 2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상패계 누각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153번지)에서 아버지 임진호(任晉鎬, 1846 ~ 1915. 10. 22)와 어머니 전주 류씨(1851 ~ 1916. 7. 25)[3]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연지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46번지에 거주했다.일찍이 충청남도 대전군 대전면 본정(本町)[4]에서 송인용(宋麟用), 매형 송구용 등과 함께 곡물상 남일무역상회(南一貿易商會)[5]를 경영하던 중 1928년 2월 평소 한학에 밝던 송구용이 《상서》 「홍범(洪範)」 등을 근거로 오행의 상생(相生)·상극(相克)의 이치를 설명하며 조선 독립을 도모할 뜻을 밝히자 이 취지에 공감했고, 그해 9, 10월부터는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형태로 가게를 운영하면서 오석근(吳錫根)·서현근(徐鉉根) 등을 동지로 포섭했다.
1929년 10월 가게의 영업실적이 부진하자 본정에 있던 사무실을 폐쇄하고 거처를 대전부 영정(榮町)[6]으로 옮긴 뒤 남일상회(南一商會)라는 이름으로 1932년까지 경영했다. 이 사이 1930년 5월 송구용 등과 함께 《예기》에 나오는 '대도무명(大道無名)'이란 글귀를 인용하여 '무명(無名)'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엄영섭(嚴英燮)을 동지로 포섭했고, 자택에서 송구용 등과 만나며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계속된 영업실적의 부진으로 1930년 8월부터는 미곡잡화상의 형태로 가게를 경영하면서 가게를 출입하는 고객들을 동지로 포섭하고 가게의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이때 2,500원을 자금으로 쾌척하고 송구용이 350원, 오석근이 50원을 출자해 상회를 공동경영하는 한편, 김연화(金蓮華)·서정순(徐貞順)·우일모(禹一謨)·오하영(吳河泳)을 동지로 포섭해 비밀결사 무명에 가입하도록 했다. 그러나 장기적인 영업실적의 부진으로 1932년 6월 결국 남일상회를 폐쇄했다.
1932년 5월 말 상경한 뒤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친일 유교 단체 대성원(大聖院)을 운영하던 김창한(金彰漢, 1870. 10. 28 ~ 1950. 10. 2)[7]을 만났다. 김창한은 독립운동가 김가진의 조카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參議)로 있던 인물이었는데, 당시 대성원의 총무로서 때마침 전국에 지원(支院)을 더 설치하고 경성본원의 본부 임원을 늘리려 하고 있었다. 이에 김창한과 협의하에 1932년 10월 19일 경기도 경성부 원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에 있던 대성원 경성본원의 본부 서무부장 겸 시중월보사(時中月報社) 부사장에 취임했고, 대성원을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활용하면서 동지를 포섭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할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12월 말에는 일전에 폐쇄한 남일상회 자리에 대성원 충남·대전총지원(總支院)을 설립했고, 대성원 경성본원 본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비밀리에 동지를 모았다. 그러나 1933년 4월 김창한이 사기 혐의로 체포되자 비밀결사가 발각될 것을 우려해 그해 5월 중순 대성원 임원직을 사임하고 충남·대전총지원도 폐쇄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비밀결사 활동을 재개하고, 1938년 5월 15일부터 그해 8월까지 자택에서 오석근·서현근 등과 만나 중일전쟁의 전황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임교재는 "이 사변은 일본이 중국에 이기면, 소련이 이를 묵시하지 않고 반드시 중국을 원조해 일본과 싸우게 될 것이고, 다른 제국도 일본을 미워하여 소련을 원조하면 일본은 고립무원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금일까지 약 1년간 전쟁에 의해 병력, 재정 모두 피폐해졌기 때문에 도저히 승리는 불가능하고 패전할 것"이라며 전황에 대해 전망했다. 이 밖에도 "실제로 전쟁터에서 일본군 다수가 전사했는데 일본 당국은 국민의 사기를 고려해 일부러 장병들의 유골을 조금씩만 귀환시킨 것"이라는 말을 했고, 1938년 7월 말부터 소련군과 관동군 사이에 하산 호 전투가 발발하자, "곧 소련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결국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는 등의 발언을 했다. 1938년 6월에는 대성원 경성본원 본부 상담역이던 서상호(徐相浩)에게 오행의 상생·상극의 이치를 설명하고 가까운 장래에 조선 독립의 행운이 올 것이라 힘주어 말하면서 그를 동지로 포섭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8년 9월 대전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939년 4월 22일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대전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후 1년 반 동안 심리를 거친 뒤 1940년 10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아 석방되었다. 이에 검사 측에서 공소를 제기했으나, 1941년 12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검사 측의 공소 이유없음으로 무죄 판결이 유지되었고 출감 지휘를 받아 이튿날인 12월 23일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64년 9월 16일 별세했다.
201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죽애공파(竹崖公派) 27세 재(宰) 항렬.[2] 둘째 누이의 남편[3] 류진(柳晋)의 딸이다.[4] 현재 본정1정목은 대전광역시 동구 원동, 본정2정목은 대전광역시 동구 인동, 본정3정목은 대전광역시 동구 효동 등으로 각각 남아 있다.[5] 한국근현대회사조합자료에 의하면, 1929년 1월 25일 합자회사 남일무역(南一貿易)으로 설립되었는데, 곡물, 소금, 비료 등의 무역 및 위탁 매매가 그 설립 목적이었다. 본점은 충청남도 대전군 대전면 춘일정3정목(現 대전광역시 중구 선화동) 14번지에 있었고, 당시 사장은 임교재의 형 임도재(任道宰, 1887. 6. 12 ~ 1946. 3. 14)의 장남, 즉 장조카 임경순(任慶淳, 1907. 3. 6 ~ 1971. 2. 9)이었다. 임경순은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고, 1952년 보은군 탄부면의회 의장, 1953년 탄부면장 등을 역임했다. 1931년 3월을 전후해 사장이 송인용(宋麟用)으로 바뀌었으며, 본점의 주소지가 대전군 대전읍 춘일정1정목(現 대전광역시 동구 중동) 87번지로 옮겨졌다. 이후 1937년 4월 1일을 전후해 본점의 주소지가 대전부 춘일정1정목(現 대전광역시 동구 중동) 88번지로 옮겨졌다.[6] 현재 영정1정목은 대전광역시 동구 정동, 영정2정목은 대전광역시 동구 삼성동, 영정3정목은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 등으로 각각 남아 있다.[7] 자는 성의(聖儀). 창씨명은 가네야마 마사이치(金山昌市), 안토 이치로(安東一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