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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03:39:45

임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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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任俊英, 생몰년도 미상. 조선 시대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한 무관.

2. 상세

탐방 군관[1]으로 활약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전사하고 조선 수군 병력이 대부분 궤멸되자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복귀했다. 이순신 장군은 앞 포구가 좁아서 이진 아래에 있는 창사로 진을 옮겼고, 1597년 음력 8월 26일 저녁나절에 임준영이 말을 타고 와서 왜군이 이진까지 온 것을 급히 보고하는 것으로 난중일기에 처음 등장한다.

명량 해전이 일어나기 2일 전인 음력 9월 14일에는 육로를 정탐하고 와서 왜군의 배 200여 척 중에서 55척이 먼저 어란 앞바다에게 온 것이라고 보고했으며, 적에게 사로잡혔던 김중걸(金仲乞)이 전하길 "이 달 6일에 달마산으로 피난갔다가 왜놈에게 붙잡혀 묶여서는 왜선에 실렸습니다. 김해에 사는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묶인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 날 밤에 김해 사람이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왜놈들이 모여 의논하는 말이, `조선 수군 열 여 척이 왜선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불태웠으므로 할 수 없이 보복해야 하겠다. 극히 통분하다. 각 처의 배를 불러 모아 조선 수군들을 모조리 죽인 뒤에 한강으로 올라 가겠다.'고 했다"는 정보를 이순신 장군에게 보고한다.

음력 10월 13일에는 정찰선을 통해 귀환하한 임준영이 "해남에 들어와 웅거해 있던 적들은 7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 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몽땅 도망가버렸는데, 해남의 향리 송언봉, 신용 등이 적속으로 들어가 왜놈 들을 꾀어 내어 선비들을 죽였다."고 보고했다.

18일에는 임준영은 임계형과 함께 진중에 들어왔고, 음력 11월 20일에는 완도를 정탐해 적이 없다고 전했다는 난중일기 내용을 끝으로 행적을 알 수 없다.

3. 대중매체에서



[1] 오늘날로 치면 해상 수단을 이용해 북한에 침투하여 공작 활동을 하는 정보사 특임대 해상요원 정도로 볼 수 있다. 현재도 그렇듯 당시에도 생사를 넘나드는 훈련을 받은 고도로 훈련된 자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