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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6:05:00

자우마 산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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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우마 산투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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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월드사커 로고.png
1962 · 1963 · 1965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파일:자우마_산투스(브라질).pn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자우마 산투스
Djalma Santos
본명 데자우마 두스산투스
Dejalma dos Santos
출생 1929년 2월 27일
브라질 상파울루
사망 2013년 7월 23일 (향년 84세)
국적
[[브라질|]][[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
포지션 라이트백
소속팀 포르투게자 (1948~1959)
SE 파우메이라스 (1959~1968)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1969~1970)
국가대표 98경기 3골[1] (브라질 / 1952~1968)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위상5. 사망6. 기록
6.1. 대회 기록6.2. 개인 수상
7. 여담

[clearfix]

1. 개요

브라질의 전 축구선수. 현역 시절 포지션은 라이트백이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20년 가까이 그 기량을 유지하며 브라질 국가대표팀 주전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었던 선수이다. 4번의 FIFA 월드컵을 참가하였으며 월드컵 2연패를 달성하기도 했다. 선수 시절 극강의 수비력을 자랑했으며 뛰어난 공격력과 기술적 수준 또한 엄청났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자우마 산투스는 1948년 아소시아상 포르투게자 지 제스포르투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산투스는 중앙 수비수와 오른쪽 수비수 등 모두에서 브라질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으며, 1952년, 1955년 리우데자네이루와 상파울루 클럽이 맞붙는 토너먼트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산투스는 아소시아상 포르투게자 지 제스포르투스에서 400경기 넘게 출전했으며, SE 파우메이라스로 이적한다. 산투스는 이적하자마자 맹활약, 상파울루 주립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1960년에는 전국리그에서 우승까지 차지한다. 그후 파우메이라스에서도 400경기 넘게 출장하여 파우메이라스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으로 기록되었고, 주립 리그 3회, 전국 리그 3회씩 우승하며,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후 1969년 클루비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 이적하여 1년 후 1970년에 은퇴한다.

2.2. 국가대표 경력

1952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한 자우마 산투스는 1954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했는데, 8강에서 당시 무적을 자랑하던 '매직 마자르' 헝가리와 8강에서 만나 페널티킥으로 득점을 올렸다. 이 득점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은 4:2로 패배, 탈락하고 말았지만 산투스는 1954 스위스 월드컵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된다.

이후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가린샤, 펠레 등의 젊은 선수들로 팀을 구성해내기 시작했다. 브라질은 이 대회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조별리그에서 레프 야신이 이끄는 소련을 2:0으로 격파, 쥐스트 퐁텐레몽 코파가 버티는 프랑스를 준결승전에서 5:2로 격파하고 결승전에서는 군나르 그렌닐스 리드홀름이 이끄는 스웨덴을 5:2로 격파하며 마침내 월드컵 첫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자우마 산투스는 니우통 산투스와 함께 브라질 대표팀의 측면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컨디션 난조로 인해 결승전 밖에 뛰지 못했다.[2] 하지만 결승전에서 실로 어마무시한 공격력을 자랑하며 측면에서부터 팀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그에 맞춰 수비력도 극강이어서 바위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당시 유명한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쿠르트 함린을 경기장에서 지워버렸다.

1962 칠레 월드컵에서는 펠레가 부상으로 이탈하는 사고가 있었으나 가린샤의 원맨쇼로 결승전까지 진출했고, 요제프 마소푸스트가 버티는 체코슬로바키아를 3:1로 격파하여 월드컵 2연패를 달성한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이 당시 브라질은 디펜딩 챔피언임에도 불구하고 노쇠화로 인해 전력이 약해졌고, 설상가상 펠레의 부상으로 인한 부재에다 가린샤도 정상이 아니었기에 결국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포르투갈에게 패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만다.

이후 산투스는 1968년에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속도와 힘, 제공권 등 수비수에게 요구되는 여러 피지컬 영역에서 훌륭했으며, 대단히 정교한 수비 기술을 자랑하여 선수 시절 단 한 차례도 퇴장당한 적이 없었다. 또한 커리어를 미드필더로 시작하였기에 좋은 공격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정확한 롱 패스와 크로스, 볼 컨트롤과 드리블 등으로 상대 선수를 따돌리고 공을 전진시킬 수도 있었다. 여기에 세트 피스 키커로도 우수했고 롱 스로인 능력까지 갖췄다고 한다. 그리고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항상 높은 프로 의식과 성실성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4. 위상

엄청난 실력과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까마득한 옛날인 1950년대의 축구 선수이다 보니 국내에서는 카푸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만큼의 인지도는 없다. 그러나 전문가들 내에서 역대 베스트 11을 꼽으면 기본적으로 아우베르투는 물론이고 이따금씩 카푸보다 자우마를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세계적인 위상으로는 카푸에 비해 다소 밀릴 수는 있으나 브라질 자국 내에서는 아우베르투와 더불어 둘 모두 그 카푸보다 더 높은 위상을 가진다. 또한 FIFA 100과 브라질 축구를 빛낸 명예의 27인에도 그 이름을 남겼다.

5. 사망

"브라질 축구는 오늘 1명의 아이돌을 잃었습니다."
주제 마린

2013년 자신이 20여년간 투병하던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7. 여담

파일:GOAL_Defender.jpg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60년대 수비수들 중 4위에 이름을 올렸다.


[1] 의외로 당시 황금기였던 브라질 대표팀의 멤버 중 FIFA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선수는 아무도 없다. 펠레의 경우는 30살에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여 91경기에서 자신의 기록을 마감했고, 발지르 페헤이라니우통 산투스도 70경기 수준에서 멈추었다. 산투스는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의 컨디션 난조로 경기를 거의 못 뛴 것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2] 결승전 전까지의 경기들은 니우통 지 소르지가 뛰었다.[3] 두 번의 대회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