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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랄루딘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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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c1e44><colcolor=#ffffff> 잘랄루딘 루미
جلال‌الدین محمد رومی
파일:external/www.urduyouthforum.org/Jalal%20Al%20Din%20Rumi.jpg
출생 1207년 9월 30일
호라즘 제국 발흐
(現 아프가니스탄 발흐 주)
사망 1273년 12월 17일 (향년 66세)
룸 술탄국 콘야
(現 튀르키예 중앙아나톨리아 지방 콘야 도)
이름 루미 잘랄 아드딘 무함마드 아르[1]
Jalāl ad-Dīn Muhammad Rūmī
배우자 고와르 (1225년 결혼)
직업 시인, 철학자, 법학자, 신학자
종교 이슬람교 (수피즘)

1. 개요2. 명칭3. 생애
3.1. 전환점: 샴스와의 만남
4. 사상
4.1. 루미의 일곱가지 교훈
5. 인용구6. 출판물7. 기타

[clearfix]

1. 개요

아프가니스탄이란튀르키예의 시인이자 이슬람 법학자이자 이맘이자 철학자이다. 본래 출신지는 현 아프가니스탄 서부와 타지키스탄 사이에 걸쳐 있는 호라산발흐(بلخ, Balkh)로 페르시아어 문화권이다. 때문에 일생 동안 페르시아어를 사용했으나 장년의 그가 주로 활동하고 수피 계열의 메블라나 교단을 창시한 곳은 당시 룸 술탄국의 영토였던 튀르키예이며 그의 무덤도 튀르키예 중부의 도시 콘야(Konya)에 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존경하여 그를 기리는 서동시집을 지었고, 따라서 루미는 서양권에도 잘 알려진 편이다.

2. 명칭

언어별 표기
페르시아어 جلال‌الدین محمد رومی
튀르키예어 Muhammed Celâleddîn-i Rumi
아랍어 مولانا جلال‌الدین محمد رومی
영어 Jalāl ad-Dīn Muhammad Rūmī
중국어 梅夫拉那·贾拉尔-阿德-丁·穆罕默德·鲁米

루미의 주요 활동 무대가 터키였다는 사실은 그의 이름에서 바로 알 수 있다. '루미'는 아랍어·페르시아어 이름의 구성 요소 중 니스바(نسبة)에 해당하며 그 인물의 출신지나 주요 활동지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빈치의 레오나르도)'에서의 '다 빈치'와 같은 역할을 한다. 즉 '루미'는 '룸의-'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룸'은 '로마'를 뜻하는 단어로서 당대의 무슬림들은 동로마 제국이 점유하고 있던 아나톨리아를 '로마(인)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룸'이라고 불렀다. 결국 루미라는 그의 이름은 좀 더 의역하면 '아나톨리아의-'가 되는 셈이다. '비잔티움은 로마가 아니다'라는 시각은 교황이 내세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서구 가톨릭 세력의 지극히 정치적인 의견이었을 뿐 이러한 교황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았던 제3자 세력들(슬라브인과 페르시아·이슬람 세력)은 비잔티움을 '고대부터 이어져 온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인식하고 있었다. 루미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룸 술탄국'이라는 국호 역시 '로마의 땅 위에 세워진 술탄국'이라는 의미로서, 당대의 무슬림들이 비잔티움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식했음을 보여 주는 숱한 사례들 중 하나이다.

루미의 이름 앞에는 '스승'을 의미하는 모울라나(مولانا, 터키어로 메블라나·Mevlânâ)' 또는 '모울라비(مولوی, 터키어로 메블레비·Mevlevî)라는 칭호가 붙기도 한다. 그가 창시한 교단도 메블레비파(Mevlevîlik)로 알려져 있다.

3. 생애

루미는 1207년, 호라즘 제국의 대도시이자 페르시아어권 문화의 중심지였던 발흐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슬람 율법학자이자 신비주의자였던 바하 앗딘 왈라드였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가문은 초대 칼리프였던 아부 바크르의 후손이었다고도 하는데 근거가 불확실해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1219년, 몽골 제국칭기즈 칸이 호라즘을 침공하여 한바탕 전란이 발발하자 바하앗딘 왈라드는 친족과 제자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루미도 아버지를 따라 니샤푸르를 거쳐 바그다드로 향했고 이후 메카를 순례한 후 카라만에 정착했다. 1225년에는 고와르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으나, 아내가 죽자 재혼하여 다시 아들과 딸을 한 사람 씩 낳았다.

1228년, 룸 술탄국의 케이쿠바트 1세의 요청으로 바하앗딘 왈라드는 룸 술탄국의 수도인 아나톨리아콘야에 정착했다. 루미도 이때 아버지를 따라 콘야에 정착하였으며 여생의 대부분을 룸 술탄국에서 보내게 된다. 이후 바하앗딘 왈라드는 콘야에서 이슬람 학교의 일종인 마드라사에서 교장 노릇을 했다.

1231년, 바하 앗딘 왈라드가 사망하자 당시 25세였던 루미가 그 뒤를 이어 콘야에서 몰비[2]이자 율법학자로 활동했다. 또한 동시에 아버지의 제자였던 부르한 우딘으로부터 9년 가까이 수피즘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이는 1240년 경에 부르한 우딘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이후 그는 매우 명성높은 신학자가 되었다.

3.1. 전환점: 샴스와의 만남

파일:1105루미.jpg

1244년, 루미는 샴스 앗딘 무함마드 타브리지라는 늙은 떠돌이 수피즘 철학자를 만나게 되었다. 루미는 샴스의 가르침에 깊이 감화되어 남은 평생동안 그를 영적 스승으로 받들게 된다. 신의 완전한 사랑에 대한 샴스 타브리지의 가르침은 루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고, 루미는 신학자에서 신비주의 시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1248년에 샴스가 불가사의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두 사람은 결별하게 되었지만 루미는 죽을 때까지 노스승 샴스 타브리지를 그리워하며 그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존경심을 드러내기도 했다.[3]

샴스 타브리지를 만날 당시 37세 정도의 나이였던 루미는 59세였던 그로부터 받은 영감을 토대로 페르시아어 시의 일종인 가잘을 창작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시인의 삶을 시작했다. 그의 시는 대체로 섬세한 서정시의 성격을 띄고 있었으며 인간과 사랑과 신의 합일이라는 종교적 사상을 노래했다. 이후 루미는 대표작인 6권 분량의 신비주의 시집 《정신적 마스나비》를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아직도 불멸의 걸작으로 칭송받고 있으며 향후 중세 이슬람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종교를 초월한 신의 근본적 사랑 자체를 강조했던 그의 가르침 덕분에 수피즘 사상가와 이슬람교도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도, 조로아스터교도, 유대교도 등으로부터 폭넓은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이 때문에 루미는 종종 종교인 보다는 시인으로 더욱 알려져 있다.

1273년 12월, 루미는 콘야에서 노환으로 병사했다. 루미의 시신은 아버지의 곁에 묻혔고 그 매장지 위에는 화려한 영묘인 예실 튀르베가 세워졌다.[4] 조지아 왕국의 공주이자 룸 술탄국의 왕비로서 평소 루미를 존경하며 친분이 두터웠던 구르주 카툰이 그 무덤의 공사를 후원했다. 운구를 운반하던 중 루미를 존경했던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을 포함한 수많은 군중이 운집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전해진다.

4. 사상

루미는 생전에 여러가지 일을 했지만 아무래도 가장 잘 알려진 면은 사랑으로 대표되는 신비주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루미의 철학은 아래의 짧은 시로 압축할 수 있다.
بازآ بازآ هر آنچه هستی بازآ
오라, 오라! 당신이 누구이든 간에 오라!

گر کافر و گبر و بت‌پرستی بازآ
방황하는 자[5] 불을 섬기는 자우상숭배자[6]든 오라

این درگه ما درگه نومیدی نیست
우리 학교는 희망 없는 학교가 아니다.

صد بار اگر توبه شکستی بازآ
맹세를 100번이나 깨뜨린 사람도 좋다. 오라[7]

루미의 가르침은 '사랑과 자신과 신과의 합일'로 대표된다. 때문에 루미는 그게 그리스도인이든 조로아스터 교인이든간에 제자들에게 항상 청렴하고 항상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이 점에서는 자이나교의 가르침과도 비슷한 면이 있지만 반면에 수피즘에서는 개인의 쾌락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편이라 다른 신비주의적 사상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가령 수피즘에 입교하는 사람이 테케(تكه‎, 수피 종단의 숙소이자 예배당 같은 일종의 수도원 같은 건물)에 들게되면 기존의 멤버들은 신입을 환영하기 위해 성대한 만찬을 열고, 부엌에 거주하게 하면서 신입으로 하여금 온갖 재료와 향신료들을 맛보게 하고 각각의 재료들이 갖는 특성을 배우게 했는데, 이것은 각각의 재료들이 불이나 기타 조리 등의 방법, 이를테면 고통이나 시련, 혹은 수련 등으로 치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원래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요리'가 탄생됨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세마젠(Semazen)이라고 불리는 원형무 또한 스스로 반복해서 회전하면서 그 속에서 신과 만나는 경험을 위해서 춘다고 한다. 이 춤은 '네이'라고 부르는 갈대피리의 반주에 맞춰서 추는데 음악을 부정적으로 여겼던 기존의 이슬람교에 비해 수피즘에서는 음악의 신비성과 서로 다른 음의 조화라는 수피즘의 사상에 걸맞기 때문에 장려하고 또한 자주 노래를 불렀다.

"Musîki dinlemek hak aşıklarının gıdasıdır."
"음악을 듣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양식이 된다."
- 루미[8]

루미의 시는 수천 편에 이르는데, 대부분이 사랑과 신과의 만남, 그리고 쾌락을 노래하고 있는데 상당부문에서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그리스도교적 특징이 묻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불교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태도로 언급했다.[9] 물론 주류 이슬람교에서는 상당히 이단시되는 주장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높으신 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서민들 특히 다양한 종교가 혼재하던 터키에서 루미의 인기가 압도적이라 오늘날에도 터키인들은 루미의 어록이나 시 한두 편은 외우고 다닐 정도다. 루미의 시는 기본적으로 페르시아어로 쓰여있으며 '디반(دیوان, Divân)'이라는 사행시를 주로 썼다. 디반은 두 개의 행이 한 연을 구성하며 서로 연관된 연들로 내용을 구성하는 형식이다. 루미의 시들은 각운과 음보를 엄격하게 지키는 형식성 가운데 자유로운 시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시성(詩聖)'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수간을 소재로 시를 쓴 적도 있다.# 교훈을 주려고 쓴 시이기는 하나 그의 작풍이 얼마나 자유로웠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시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루미를 매우 존경했고, 그에게 화답하는 시인 '서동시집'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독일 낭만주의와 프랑스 상징주의,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 등 근대 유럽 사상들에 수피 신비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루미의 시는 서양의 각종 언어들로 번역되었고, 전근대 중동 문인들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조로아스터교 사상을 간직하고 있는 수피 신비주의의 영향은 후일 니체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이어지게 된다.

루미가 남긴 어록들은 위키인용집(영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4.1. 루미의 일곱가지 교훈

루미가 생전에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정리한 교훈으로 루미 사상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5. 인용구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이도, 심지어 셰익스피어단테조차도 루미처럼 깊은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반면 루미의 시는 찬양과 환희와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 앤드루 하비
우리는 세계문화의 탁월한 예술가 가운데 베르길리우스, 페트라르카, 셰익스피어, 바이런 등을 사랑의 시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위대한 시인들의 명단에 우리는 또 한 사람의 이름을 덧붙여야 한다. 루미, 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 댄 파인
루미에게 우주는 사람들이 욕심과 갈망으로 취해 돌다가 진리의 부름을 기억해 내는 선술집과 같다. 가장 사소한 것에서 가장 깊고 가장 열정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모든 사랑의 핵심이 그의 노래의 신성 안에 담겨 있다.
- 미국 타임
나는 취했고, 당신은 미쳤다. 누가 우리를 집에 데려다 주나?’ 당신이 취했다면 여기 좋은 소식이 있다. 13세기 이슬람 신비주의 시인 루미에 대한 소식이다. 전혀 무해한 그의 미친 사랑의 노래가 지금 미국을 덮고 있다.
- 영국 가디언
13세기 수피 시인, 루미가 마돈나데미 무어 같은 헐리우드 스타들을 통해 기대하지 않았던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한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시인이 700년의 세월을 넘어 컴백한 것이다.
- 영국 BBC

6. 출판물

파일:external/image.aladin.co.kr/8965550327_f.jpg
이현주가 루미의 일부 시가를 번역한 책.

한국에는 류시화가 세계의 명시들을 수집 및 번역한 시집인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 루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인터넷 상에서 좋은 말, 혹은 블로그용 허세글로 꽤 자주 인용된다.

2019년에는 직역 시집이 출판되었다. 역자는 페르시아어 전문 통번역 센터의 대표인 정제희이다.

7. 기타


[1] 국립국어원 규정용례[2] 이슬람교의 쿠란선생 내지는 설교자.[3] 수피즘의 전승에 따르면, 샴스 타브리지는 자신의 가르침을 감당할만한 사람이 있기를 기도했다. 이때 어느 음성이 울리며 "그 댓가로 무엇을 내놓겠는가?"라 말하자, 샴스 타브리지는 망설임없이 "제 머리를 내놓겠습니다."라 말했다고 한다. 결국 샴스 타브리지는 자신의 충실한 이해자인 루미를 찾았고 그 댓가로 정말 갑자기 사라져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한편 루미 역시 샴스가 와인을 마시라 하고, 와인을 사오라 하는 요구를 모두 따르며 충성을 보인다.[4] "녹색 무덤"이라는 뜻이다.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운 녹색 돔이 씌워져 있는데 그 건물이 아직도 남아있다. 현재는 튀르키예에서 메블라나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5] 쿠란 제 1장 알 파티하 7절에서 그리스도인을 방황하는 자로 표현한다.[6] 불교도들이 불상 앞에서 절하는 것을 보고 중세 페르시아인들이 "우상숭배자"(Budperest)라고 명명한 이후 이슬람 문헌에서 언급되는 우상숭배자는 거의 불교, 드물게 힌두교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7] 페르시아어 독음은 다음과 같다. "버저 버저 헤르 언치 헤스티 버저/ 게르 커피르 우 게브르 우 붓페레스티 버저/ 인 데르거헤 머 데르거헤 노브미디 니스트/ 사드 버르 에게르 토으베 쉬케스티 버저"[8] 사우디 아라비아와 카타르의 종파인 와하브파와는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쪽에선 음악 자체가 타락한 것으로 여겨 금기시하며 심지어 한국인 무슬림 중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9] 예: "내 사랑이여, 그대와 하나가 되는 술을 마시고 보니, 메카와 부다가야로 가는 길이 서로 같음을 아네." (출처: Kulliya-te Shams-e Tabrizi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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